개인적으로 드라마보다는 영화를, 대하소설보다는 단편소설을, 몇 시즌씩 거듭되는 연재만화나 웹툰보다는 단권만화를 좋아하는 편이다. 왜일까? 특별히 시간을 아끼는 편도 아닌데. 단편 좋아하는 스스로의 마음을 추적해보고자 오늘은 최근에 펴낸 에이드리언 토미네(Adrian Tomine)의 『킬링 앤 다잉(Killing and Dying)』(goat, 2024) 중 두 편을 자세히 이야기해본다. 자사의 책을 추천하는 것은 뻔한 홍보 수작으로 비칠 수도 있겠지만, 지난 화에 말씀드렸듯 그래픽노블이란 장르는 다소 ‘보호’가 필요한 영역이기에 너른 아량으로 읽어주시면 고맙겠다.
이 책에는 여섯 가지의 형식적으로도 내용적으로도 이질적인 단편이 한데 들어 있다.(이 모두진술을 하면서 당장 깨달은 단편만화의 매력. 한 가지만으로는 두께를 가진 책이 되기 어렵다는 물리적인 이유로 n가지 이야기를 담은 단편집은 그 자체로 ‘종적 다양성’을 확보한 단일종이 된다. 게다가 대체로 발표지면이 상이하고 발표시기가 띄엄띄엄하기에, 독자로 하여금 ‘그(작가)’가 아닌 ‘그들’을 읽는 독서경험을 선사한다.)
밀봉된 상자 안에 들어 있는 여섯 가지 과자 모두를 즐기리라는 자신이 있어야만, ‘종합선물세트’를 살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운을 시험하며 세트를 구입한 당신은, 운이 정말로 좋아서 대여섯 가지 작품 모두가 당신의 인생만화가 될 수도 있고, 단 한 편 정도만이 당신의 마음을 잡아끌 수도 있다. 그러나 그 한 편의 여운이 꽤 오래간다면? 그 한 편의 영향력이 당신으로 하여금 ‘만화’ 혹은 ‘그래픽노블’이라는 장르 자체를 끌어안게 만든다면? 그렇게 ‘끝사랑’이 아니라 ‘첫사랑’이 된 그 한 편은, 단순한 ⅙ 이상이 되지 않을까. 이런 이야기를 늘어놓는 이유는, 물론 나 역시 어떤 단편집을 구매하거나, 심지어 그것의 한국어판 출판권리를 구입할 때도, 거기 속한 개개 항목 전부가 좋아서 그러지는 않음을 밝히기 위해서다. 어떤 만화는 주인공이 잘생기지 않아서 더 몰입이 된다. 어떤 만화는 해부학적, 생리학적으로 불가능한 포즈를 그리기에 더욱 경이롭다. 이야기가 압도적으로 좋아서 다른 것들이 무시된다는 뜻은 아니다. 모든 무난함보다 어떤 모자람을 사랑하는 것이 우리들 만화독자이기 때문인지도……?
그래서 나는 이 만화책에서 가장 좋아하는 단편과, 그럭저럭 좋아하는 단편 하나씩을(공교롭게도 이 두 편은 책의 순서대로다.) 다루기로 마음먹었다. 그것이야말로 이 책에 대한 ‘스포’도 ‘주례사’도 안 될 것이니까.
첫 번째 단편은 별미는 아니어도, 이걸 읽은 주변의 친구들 모두와 “우리들 다 집에 ‘원예(조소)가’ 한 명씩은 데리고 살지.” 하는 식의 은어를 나누게끔 해준 작품이다. 욕조에서 잡지를 뒤적이던 원예가는 이사무 노구치의 기사(“1933년 자연의 흙을 조소창작의 새로운 재료로 삼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를 보며 영감을 얻는다. 그리고 한마디 혼잣말을 한다. “이 아시아인은 뭘 좀 아는 사람이었군!” 이 말은 생각이 아니고(생각은 유려하게 뻗친 말꼬리를 갖지 못한다.) 실제로 내뱉은 것이다. 네 컷 만화에서 나온 유일한 대사가 이것이어서, 그것도 심지어 육성으로 내뱉은 것이어서, 그리고 이 책을 지은 작가 역시 아시아계여서 나는 첫 쪽부터 이 만화책이 웃기다고 생각했다.
에이드리언 토미네, 『킬링 앤 다잉』, goat, 11,21,23쪽
주인공은 “원예와 조소라는 외관상 이질적인 두 분야를 조합해서 생명력 있는 새로운 예술형식을 창조”한다. 그것은 “문자 그대로 살아 있”다. “대규모의 야외조소가 있는데 — 심지어 하나하나 수작업으로 만들어졌는데 — 거기에다가 신중하게 골라 기른 식물을 더한 광경”, 그것을 ‘원예조소’라 부르기로 정한 것이다. 이 콘셉트를 아내뿐 아니라 이웃과 친구에게 공표할 때, 그들의 반응을 눈으로 확인하기도 전에 나는 가슴이 아팠다. 이 사람 예술의 재료는 원예, 즉 그의 삶이니까. 그의 삶이 이웃으로부터 “잔자라잔, 잔~디인형”이란 조롱을 듣고, 뉴스매체에서 기사화를 퇴짜맞고, 전시 판매를 거부당하고, 법적 상담을 반려당하게 되는 운명인 것이다. 그러나 그 과정을 직접 겪은 그는 ‘내가 식물의 생장에서 배운 거라면, 작게 시작할 필요가 있다는 거니까.’라며 야심의 규모를 제 집 마당에 맞게 줄이고, (자면서 꾸는) 꿈을 통해 스스로 회복한다. “독창적이고 독보적인 예술작품”의 진가를 사람들이 알아봐주기까지는 시간이 걸리기 마련인 법이다.
두 번째 단편은 이렇게 시작한다. “세상에서 가장 쉬운 유의 이야긴 아니지만, 그래도 꺼내야 한다는 생각이 들어…. 안 그럼 이게 계속 내 주윌 떠돌 거고, 나중에 설명하려고 하면 지금보다 더 기괴해져 있을 거 같거든.” 이 첫 번째 패널을 보고 생각했다. ‘이 작가의 인터뷰를 많이 못 찾은 데도 이유가 있겠어. 이건 완전히 작가와의 만남에서 들을 법한 대사잖아?’
같은 책, 31쪽
「앰버 스위트」는 5~6년 전쯤 서술자에게 일어난 기괴한 이야기를 들려준다. 대학생인 그녀가 캠퍼스에 들어서면 모르는 학우들이 쑥덕거리고, 지나가던 차가 멈추며 아무렇지 않게 성적인 농담을 건네는데, 작은 단서를 건져 인터넷에서 검색하고서야 그녀는 한 인기 포르노 배우의 존재를 알게 된다. 그 배우의 외모가 자신과 꽤 닮았다는 사실까지. 컴플렉스까지 빼닮은 그 배우의 존재는 바야흐로 그녀의 삶을 뒤흔든다.
물론 컴퓨터에서 ‘앰버’의 흔적을 좇으며 정보를 습득해가는 그녀의 존재를 ‘앰버’ 본인이 알 턱은 없다. 그녀가 ‘앰버’를 알면 알수록 ‘앰버’는 그녀에게 영향을 끼치지만, 정반대의 힘은 늘지도 줄지도 않는다. 그녀는 이러한 고충을 여자 친구들과 공유하려 하지만 “유명 포르노 배우로 오해받을 정도의 매력이라니… 힘들겠네.”라는 핀잔이나 듣고, 뭇 남성들의 크고 작은 관심은 끊일 기미가 없다. 그런 상황 속에서 “외모가 타입은 아니지만 멍청한 헛소문은 모르는 눈치인” 남자를 만난다는 선택, 그와 데이트를 하다가 자신을 앰버로 착각한 남자를 향해 정중한 거절부터 욕설에 이르기까지 건네야만 하던 다양한 리액션, 새출발이란 미명으로 감행한 자퇴와 이사, 새로운 도시에서 만난 남자의 컴퓨터에서 ‘앰버 스위트’라는 검색어를 입력하고 진짜로 그 폴더를 발견하는 일, 관계를 지속하고자 애쓰면서도 한편으로는 가상의 상대에게 느끼게 되는 경쟁심과 질투… 이 모든 것들은 ‘앰버’를 모르고서는 겪기 힘든 사건들이다.
그런 일련의 사건을 겪고 서술자는 ‘앰버’ 혹은 어제까지의 서술자와는 완전히 다른 외형을 채택하게 된다. 테가 두꺼운 안경과 아주 짧은 머리, 노출이 적은 긴 바지 말이다. 그러던 어느 날, 진짜 ‘앰버’를 길에서 마주친다. 반사적으로 “앰버…?”라고 혼잣말한 그녀에게 진짜 앰버는 익숙한 듯 쾌활하게 인사한다. “네! 안녕하세요?”라고. 그녀는 안경을 벗으며 앰버에게 자기소개를 건네고, 앰버는 자신과 닮은 얼굴을 보고 “그러면 당신은… 내가 누구인지 알아요?”라고 묻는다. “당신은”과 “내가” 사이에 놓인 세 개의 점 속에 숨은 진짜 앰버의 삶이 어느 정도 그려져서 독자인 나는 좀 먹먹해진다. 실제로 앰버 스위트를 만나면 무슨 일이 벌어질지를 꽤 오래전부터 생각했던 그녀는 그간 억눌린 모든 분노를 소환하려 최선을 다하지만, 친근하고 싹싹한 앰버 앞에서 경계를 풀고 만다. “음, 물론 저 자신의 선택이라고 해서, 뇌 전문의가 되려던 애가 막판에 ‘아니야…. 나는 차라리 「금발이 너무(야)해」의 주연을 맡아야겠어!’라고 외친 상황은 아니에요.” “제 말은, 만약 제 인생 이야기를 모조리 듣고 나면, 당신도 아마 이렇게 말하리라는 거예요. ‘이 사람이 포르노 업계로 뛰어든 것도 당연한 일이군! 하!”
같은 책, 40쪽
둘이 나누는 대화 속에서 앰버의 관심사는 전폭적으로 그녀에게 기울고, 그녀에 관한 수많은 정보를 벼락치기하듯 앰버는 ‘하나같이 매혹적’으로 공부해나간다. 그러다 둘은 연락처 교환 없이 작별한다.
그런 짧은 만남이 있고 난 뒤, 이상하게도 어느 누구도 서술자를 앰버로 착각하지 않는다. ‘충분한 시간이 흘러서일까, 아니면 이제는 충분히 다르게 보여서일까.’
같은 책, 41쪽
이 단편의 마지막 칸에는 이렇게 적힌다. “이해해.” 어째서인지 눈물이 났지만 ‘이해’를 특별히 뜯어보지는 못했다. 화가의 생애를 알기 전에 바라본 화가의 그림처럼, 만화에서도 낱말 한 개 정도는 신비로 남기고 싶다.
꼭 이 책이 아니라 어떤 단편집이더라도, 거기에는 당신이 좋아하지 않을 과자, 어쩌면 당신의 알러지를 유발하는 물질, 당신의 과거 경험으로 비추어보건대 상당히 비상식적인 간식이 들어 있을 수 있다. 그래도…… 좋지 않은가? 물과 기름처럼, 섞이지 않은 것들이 각자 그것들 나름으로 들어 있는 하나의 과자세트 같은 만화집이란 건.* AI 학습 데이터 활용 금지
킬링 앤 다잉
출판사 | 고트(goat)

김미래
대학에서 문학을 공부한 후 2010년 문학교과서 만드는 일로 경력을 시작했고, 해외문학 전집을 꾸리는 팀에서 일하면서 새로운 총서를 기획해 선보였다. 책을 둘러싼 색다른 환경을 탐험하고 싶어져 크라우드펀딩 플랫폼의 출판 분야에서 매니저로 지냈고, 현재 다양한 교실에서 글쓰기와 출판을 가르친다. 출판사뿐만 아니라 출판사 아닌 곳에서도 교정·교열을 본다. 편집자는 일정한 방침 아래 여러 재료를 모아 책을 만드는 사람이다. 다만 방침을 만들고 따르는 일에 힘쓰면서도, 방침으로 포섭되지 않는 것의 생명력을 소홀히 여기지 않으려고 한다. 직접 레이블(쪽프레스)을 만들어 한 쪽도 책이 될 수 있음을 보여 주는 낱장책을 소개한 것도, 스펙트럼오브젝트에 소속되어 창작 활동을 지속해 온 것도 그러한 노력의 일환이다. 창작자, 기획자, 교육자 등 복수의 정체성을 경유하면서도 이 모든 것은 편집이므로 스스로를 한 우물 파는 사람이라 자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