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담의 추천사] 소설을 참을 수 없는 사람의 소설, 『불멸의 인절미』에 바쳐
안담 작가가 보내온 한유리 작가의 신간 『불멸의 인절미』 추천사.
글ㆍ사진 안담(작가)
2024.08.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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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절미’라는 이름의 기니피그 한 마리가 불멸을 얻게 되는 소설을 읽어보시라고 추천한다면, 과연 읽는 사람이 있을까? 아마도 거의 없을 것이다. 오늘 출간된 한유리 작가의 단편소설 『불멸의 인절미』에 따르면, 기니피그는 “인지도 낮은 소동물”이라서 “문학 분야에서 인기 있는 소재”는 아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다행이다. 왜냐하면 그런 소설은 이 세상에 없으니까.


대신 이런 소설이 존재한다. [‘유리’라는 인물이 {‘인절미'라는 이름의 기니피그 한 마리가 불멸을 얻게 되는 소설}을 쓰는 내용의 소설]이다. 『불멸의 인절미』 얘기다. 작가가 직접 밝힌바, 『불멸의 인절미』는 그의 첫 소설이 아니다. 그에게는 “드래곤”이나 “정령왕”이 등장하는, 모든 등장인물이 고난 끝에 행복을 찾게 되는 환상적 이야기들을 창작하며 즐거움과 보람을 느꼈던 시절이 있다. 그러나 머리 위로 피어오르는 픽션의 세계, 고통에 대응하는 보상이 기다리는 아름답고 마땅한 세계가 머리 아래 몸이 처한 현실을 “모욕”한다고 느끼면서 그는 가상을 짓는 일을 그만두었다. 이후로 그는 ‘만약 우리에게 돈도 있고 시간도 있다면 말이야’라는 가정법에서 시작할 수 있을 이야기보다 ‘우리에게는 돈도 없고 시간도 없다’는 사실 기술로부터 시작하는 이야기의 영역에서 오랜 시간 읽고 썼다. 이를테면 “집회 현장에서 읽는 발언문", 그가 활동가로 일하면서 수도 없이 써낸 입장문, 참세상에 연재한 칼럼들, 동료 활동가들과의 인터뷰, 22년에 펴낸 그의 에세이집 『눈물에는 체력이 녹아있어』처럼. 모두 그가 처한 현실과 동일한 현실에 대하여, 그와 동일한 인물인 ‘한유리’라는 서술자에게 말하게 할 때 가장 잘 쓸 수 있는 형태의 글들이다.


그런 작가에게 누가 고료를 주며 소설을 청탁한다면 어떻게 될까? 그래도…웬만하면 수락하는 게 좋지 않을까? 더욱이 그 작가가 서울 관악구 신림동 반지하 쓰리룸에서 자신과 진배없이 가난한 성노동자/활동가 친구와 함께 살고 있다면, “단행본 한 권, 공저 한 권을 쓴 애매한 작가”라서 글 쓰는 일보다 다른 일을 더 많이 해야 하는 상황이라면, 결정적으로 늙고 아픈 기니피그를 돌보기에 여윳돈이 절실한 부양자라면 말이다. 그러나 소설을 쓰는 편이 낫겠다고 판단하게 한 이 모든 현실적 조건이 그가 소설 쓰기를 참을 수 없도록 만든 바로 그 조건과도 일치한다면, 대체 이 소설을 어떻게 쓸 수 있을까?


그에 대한 한유리의 대답은 소설의 도입부에서부터 명백하게 드러난다. 소설은 다음 두 가지의 사실, 작가의 현실과 똑같고 그렇기에 의심할 수 없는 사실들을 기술하며 시작하기 때문이다. 1. “유리는 여름과 함께 살았다.” 2. “유리는 단행본 한 권, 공저 한 권을 쓴 애매한 작가다.” 심지어 소설 속 현실에서도 ‘유리’는 ‘위즈덤하우스’에서 청탁받은 소설을 쓴다. 다만, 그 ‘유리’는 정말로 가상의 이야기를 쓴다. 그것도 지금-여기와 조금도 닮은 점이 없는 먼 미래, 먼 우주에서, 자신이 돌보는 기니피그 ‘인절미’가 영원불멸한 존재로 등장하는, 터무니없이 환상적인 소설을 쓴다.


그런 ‘유리’의 소설 집필을 더디게 만드는 방해꾼 역시 ‘유리’가 처한 현실이다. ‘유리’와 ‘여름’은 “인생을 유료 구독 중인 노동자"로서, 오늘 수고했으니 푹 쉬라는 의례적 인사를 서로에게 건네기조차 민망할 만큼 과중한 노동에 치이고 있다. 구인 공고 사이트에 등장하는 거의 모든 직종에서 일해 본 탓에 각 노동의 단점 또한 확실하게 알고 있는 ‘유리’는 그나마 견딜 만한 일로 식음료 제조를 선택한다. 이 삶의 원리는 이렇다. 남이 먹을 음식을 만들어서 번 돈으로 나와 룸메이트와 기니피그가 먹을 음식을 마련한다. 그 일을 반복한다. 실제로 이 소설 속에서는 노동하고, 노동할 몸을 건사하려 운동하고, 밥을 짓고, 아픈 기니피그에게 음식과 약을 먹이는 장면이 되돌아온다. 일반적인 이야기의 속성과 다르게 나아가거나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는 일상에서, ‘유리’의 단편 소설 『불멸의 인절미』가 조금씩 완성된다. 이 소설은 강단에 선 한 외계인의 강의로 이루어진다. 이 강의는 온 우주가 사랑하는 기니피그 ‘인절미’가 그를 잠깐 소유했던 인간 ‘유리’의 열악한 집에서 탈출해 지구 밖에서 불멸자로 살기까지의 일대기를 다룬다.


‘유리’가 집필 중인 소설이 ‘환상적’인 이유는 비단 그 이야기가 머나먼 우주를 배경으로 펼쳐지기 때문만은 아니다. 그 우주에서는 ‘인절미’의 삶이 중요하다. 모두가 그 이야기를 귀 기울여 듣는다. 그의 삶을 증언하기 위해 인간 ‘유리’가 남긴 기록(“213일 분량”의 일기)을 다루기는 하지만, 인간중심주의적 시각으로 인해 불완전할 수밖에 없었을 기록물의 행간까지 예리하게 파고들며 왜곡된 기니피그의 삶을 복원하려는 의지와 지혜를 지닌 강연자가 존재한다. 강연자 앞에는 인간의 이야기에는 금방 지루해지는 청중이 있다. 청중의 신체 구조는 인간과 다르며, 필연적으로 오해가 발생하는 매개인 언어의 개입 없이 서로의 기쁨과 슬픔을 그대로 감각할 수 있다. 인절미를 향한 이 문명의 존경과 사랑은 곧 인절미의 치유를 도운 성노동자를 향한 존경과 사랑으로도 이어진다. 그 우주에는 성노동자의 이름을 딴 별이 있다. 그곳에서 성노동자들은 존엄과 권리를 침해받지 않으며 일한다. 외계인 강연자는 마치 이 현실에도 꼭 하나 있으면 좋을 지적이고 매력적인 활동가처럼 보인다. 말하자면 이 환상은 현실보다 정확하며, 타당하다.


이 바로잡힌 현실을 통해 ‘유리’는, 자신과 사는 기니피그에게 차마 물어보기 두려웠던 질문에 대한 답을 스스로 써 내려간다. 행복하냐고. 그랬으면 좋겠지만, 아닐 가능성이 더 높은 것 같다고. 왜냐하면 이 삶은 객관적으로 “열악하고 고독”하므로. 그렇다면 내 소설 속에서, 너는 나로부터 탈출하는 게 좋겠다고. 나는 이 대목에서 무너진다. 그가 믿지 않는 소설의 가능성을 빌려서나마 인절미에게 주고 싶었던 최고의 삶에는, 그가 그토록 사랑하는 인절미를 그로부터 떠나게 하는 일이, 보다 인간 중심적으로 쓴다면 그로부터 인절미를 빼앗는 일이 포함된다는, 이 엄정한 자기 객관화 앞에서.


이쯤에서 내가 한유리 작가와 가까운 사이임을 밝혀야겠다고 느낀다. 내가 힘닿는 대로 그를 위로하고 싶었음을, 여러 사람이 그런 시도를 했음을, 그러니 그의 소설이 단순히 교차 검증의 기회를 얻지 못한 자아비판의 결과물이 아님을 말하고 싶기 때문이다. 올해 4월 24일 치러진 인절미의 장례식에서도 나름대로 마땅한 일을 하기 위해 노력한 사람들이 있었다. 장례식에서 조문객들은 상실을 겪은 사람을 위해 말을 짓는다. 이제 편할 거야, 좋은 곳으로 갔을 거야, 멋진 꿈을 꾸고 있을 거야, 다른 별에서의 모험은 끝내줄 거야. 실제 삶을 바탕으로 하지 않는, 상상력을 동원해야만 지을 수 있는 이야기들을 서로에게 건네며 애도의 절차를 밟는다. 그러나 한유리는 오래전 그런 이야기를 위해 동원되는 언어를 낭비이자 사치로 여겨본 일이 있다. 한유리 작가는 장례식 이후에 이 소설의 결말부를 완성한다. 인절미에게 이 삶이 최선이었다는, 고맙고도 달콤하지만, 동시에 공허하며 구체성 없는 환상을 그는 믿지 않았다. 그리고 그가 어떤 환상을 믿지 않은 탓에, 인절미를 둘러싼 사실들을 먼저 기록해야 한다고 여긴 탓에, 소설 『불멸의 인절미』라는 환상이 쓰일 수 있었다.


그리고 여기, 한유리가 쓴 『불멸의 인절미』도 아니고, ‘유리’가 쓴 『불멸의 인절미』도 아닌, 세 번째 소설이 있다. ‘유리’가 쓴 『불멸의 인절미』 속 외계인 강연자가 “걸출한” 기니피그 인절미의 삶을 설명하기 위해 언급했던 인간, 인절미의 이전 소유자였던 한 인간 ‘유리’가 썼다는 소설이다. 그 소설에 관해 외계인은 이렇게 말한다.


운명과 인절미의 의견이 다를 경우 꼭 인절미에게 좋은 쪽으로 이루어지길 바란다고 염원한 유리의 소원은 마치 계약서처럼 조건을 더해나가며 작은 책 한 권 분량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결국 어떻게 되었냐면 여러분……


그래서 결국 어떻게 되었냐면, 우리는 그 책을 읽을 수 있다. 그 책은 바로 한유리가 쓴 『불멸의 인절미』와 동일한 책이다. 이 소설의 가장 깊은 심연에 지어진 인간이, 삼중으로 된 가상의 겹을 찢고 탈출하여 우리 앞에 선다. 책 한 권을 들고. 소설을 참을 수 없는 사람의 소설이자 신을 믿지 않는 사람의 기도문인 이 책의 표지에는 이런 문장이 박혀있다. “내 소설 속에서 너는-”. 그러나 책의 제목이 적힌 띠지가 둘러져 있어, 문장의 나머지가 보이지 않는다. 나는 하는 수 없이 반쪽 짜리 문장과 책의 제목을 붙여서 읽는다. “내 소설 속에서 너는 / 불멸의 인절미.” 마치 주문과도 같은 이 문장 뒤에 나의 소원을 덧붙인다. 내 사랑이 죽었는데 지어낸 이야기 같은 게 다 무슨 소용이냐고 노려보는 한유리에게 자신의 소설이 가장 곤란하고 찬란한 반례가 되게 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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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담(작가)

1992년 서울 서대문에서 태어났다. 봉고 차를 타고 전국을 떠돌다가 강원도 평창에서 긴 시간 자랐다. 미학을 전공했으나 졸업 후에는 예술의 언저리에서만 서성였다. 2021년부터 ‘무늬글방’을 열어 쓰고 읽고 말하는 일로 돈을 벌기 시작했다. 2023년에 활동가들을 초대해 식탁에서 나눈 대화를 담은 첫 책 《엄살원》을 함께 썼다. 가끔 연극을 한다. 우스운 것은 무대에서, 슬픈 것은 글에서 다룬다. 그러나 우스운 것은 대개 슬프다고 생각한다. 정상성의 틈새, 제도의 사각지대로 숨어드는 섹슈얼리티 이야기에 이끌린다. 존재보다는 존재 아닌 것들의, 주체보다는 비체의, 말보다는 소리를 내는 것들의 연대를 독학하는 데 시간을 쓴다. 주력 상품은 우정과 관점. 얼룩개 무늬와 함께 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