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부턴가 기분이 좋으면 눈치가 보인다. 누구의 눈치를 보는 것일까? 우선은 내 눈치다. 할 일이 많은데 기분이 좋다면 할 일을 하나도 하고 있지 않아서는 아닌지 점검해 보아야 하기 때문이다. 걷다가 문득 콧노래가 나온다면 답장을 까먹은 메일이나 마감 시한을 넘긴 원고가 없는지, 누구와의 약속 시간을 착각하지는 않았는지 살펴야 한다. 다음으로는 남의 눈치다. 기분 좋은 뉴스를 찾아보기가 어려운 세상에서 싱글 또는 벙글의 순간을 누린다는 게 고통으로 일그러진 얼굴들을 향한 배신이나 잘못은 아닌지, 제일 너그럽게 봐주어도 공교로운 일은 아닌지 살피는 습관이 든 것이다. 어느 쪽이든 좋은 기분은 대가를 치를 것만 같은 기분이다. 기분이 조크든요, 기분이 째져, 앤 암 필링 굿……밈이나 노래 속에서 온전히 보존된 좋은 기분을 발견할 때면 어떻게? 대체 무엇이? 그런 질문을 던지고 싶은 마음이 들고 그때 난 내가 좀 어른이라고 느낀다. 그게 그렇게 기분 좋은 일은 아니지만.
그런데 공교롭게도 1년 전부터 일주일에 하루는 확실하게 기분이 좋다. 소울 댄스를 배우러 가는 날이 그렇다. 장르의 역사를 제대로 모르므로 소울이 무슨 춤이라고 확언할 수는 없지만, 무슨 춤인지 잘 모르겠다는 점까지가 소울의 영혼이라고는 생각하고 있다. 60년대의 예스러운 소울 음악을 바탕으로, 장르에 구애받지 않고 자유와 흥을 표현하면 된다. 무엇에든 구애받고 싶은 어른에게 자유만큼 난감한 주문도 없어서 수업은 꽤 어렵다. 한 친구는 나에게 소울 댄스를 전혀 모르지만, 영상을 보면 어쩐지 ‘두둠칫’이라는 추임새가 떠오른다고, 엉덩이를 씰룩거리는 농담곰 스티커를 붙이는 게 어울리는 춤이라고 말했다. 놀랍도록 정확한 관찰이라고 생각했다. 소울은 정말 ‘Feel good 기분 째짐’의 장르인 것 같다고.
춤 선생님은 운동화나 편한 옷만큼이나 '자귀맘'을 가져오길 부탁한다. 자귀맘이란 자기를 귀여워하는 마음이다. 춤을 배우러 가기 위해 옷장 속에서 아차차 이 조그만 자귀맘이 어디갔는지 찾아볼 때면 내가 자주 하는 말을 떠올린다. “누구나 실은 자기를 귀여워하고 가여워하지. 그렇다고 해도 내가 나를 귀여워한다는 사실을 들키지 말아야 할 때가 있잖아?” 잘못을 인정하고 사과해야 하는 일 앞에서조차 자기 머리를 콩 때리며 웃는 사람이 되고 싶지는 않다고 생각했지만, 춤 연습실에서 나는 자주 이마를 때리며 웃는다. 잘한 것은 없고 틀리기만 했는데도 한 번만 더 기회를 달라고 비는 시늉을 하고, 다른 사람의 영상을 찍어주겠다고 선뜻 나서며, 통성명도 하지 않은 사람의 움직임에 대고 환호성을 지른다. 그곳에서 나는 나를…꽤나 즐긴다.
춤 보기를 좋아한지는 오래 되었고, 종종 춤을 배우기도 했지만, 춤 앞에서는 주눅이 든 기억이 더 많다. 라틴, 탱고, 힙합, 왁킹 등의 다양한 장르를 찍어 먹어보고서 늘 몸이 아쉬워 그만두었다. 힐을 신고 곧은 자세를 유지해야 하는 라틴이나 탱고 수업에서는 극도로 평평한 발과 과하게 펴진 오금이 유감이었고, 관절을 많이 써야 하는 힙합이나 왁킹 수업에서는 어깨와 팔에 자꾸 염증이 생겨 그만두었다. 어떤 문제는 살아있기 전부터 함께였고, 어떤 문제는 살아있은 지 꽤 되어서 생겼다. 입시생이 많은 한 학원에 찾아갔을 때는 학부모로 오해를 받기도 했는데, 그 뒤로는 기를 쓰고 ‘젊게’ 입고 다녀보았지만, 글쎄, 기분이 좋다는 이유로 4옥타브 이상의 비명을 아무렇지 않게 지를 수 있는 학생들 사이에서 이 몸은 이만 빠져주어야겠다고 생각하지 않기란 어려운 법이다.
웨이브를 시도하다 어깨 통증을 느낄 때면 댄서 허니제이가 생각난다. 한국 힙합의 대모로 불리는 허니제이를 전보다 더 좋아하게 된 건 그가 유퀴즈에 나와서 어릴 때의 춤에는 천식이 없었는데 지금의 춤에는 천식이 있다고 표현하는 걸 보고서였다. 아직 엄마와 아이로 분리되기 전, 한 무대에 오른 허니제이는 뱃속의 아이를 데리고 춤췄다. 리버스크루의 25주년을 기념하는 저지쇼에서였다. 그가 고른 곡은 Nao의 Antidote. 가볍고 빠르게 뛰거나 박자를 여럿으로 분절하며 무리하는 대신, 그는 무겁고 둥근 배를 느리게 어루만지고 하늘을 향해 천천히 팔을 들어올린다. 아이의 무게를 고스란히 느끼며 바닥 쪽으로 깊게 내려가는 그에게 화답하듯이, 노래는 말한다.
“넌 내가 다르게 보게 해. 넌 내가 다르게 느끼게 해. 네가 느껴져, 내 안 깊고 깊은 곳에. 너의 힘이, 힘이 느껴져. 넌 나의 해독제야.”
그는 병을 극복한다고 말하는 대신 병을 넣어 춤춘다. 병과 함께 춤춘다. 병을 낫게 하는 독이 피에 흐르도록 한다. 그가 자신의 몸과 싸우거나 몸을 윽박지르지 않고 몸과 같이 춤추는 모습을 보는 게 좋았다. 그의 춤이 그를 추방하거나 소외시키지 않아서 좋았다. 그리고 소울 수업에서 나는 이따금 내 경직되고 엉뚱한 상체가 말하려는 바가 좋다. 의도와는 다르게 어색하게 꺾이거나 뻗친 어깨, 팔, 손을 보면 그렇게 티가 난다. 신경쓰고 있다는 것이. 몰두하고 있다는 것이. 좋아하고 있다는 것이. 그걸 누군가에게 들키는 일까지를 좋아하게 된다.
23년 여름 이후로 한 번도 춤 수업을 그만두지 않았다. 소울을 찾으러 가다가 해를 보고 비를 피하고 눈을 맞았다. 매주 수업에 가면서 나는 이만큼 재밌는 일을 잘 해야만 하는, 이토록 자유로운 일에 매여 있어야 하는 누군가를 생각한다. 그는 아마도 취미로 글을 쓰려나. 글을 쓰면 기분이 좋더라고요, 말한다면 축하해주고 싶다. 그것참 좋은 일이라고. 모쪼록 여러분도 종종 기분이 좋으시기를 바란다.
안담(작가)
1992년 서울 서대문에서 태어났다. 봉고 차를 타고 전국을 떠돌다가 강원도 평창에서 긴 시간 자랐다. 미학을 전공했으나 졸업 후에는 예술의 언저리에서만 서성였다. 2021년부터 ‘무늬글방’을 열어 쓰고 읽고 말하는 일로 돈을 벌기 시작했다. 2023년에 활동가들을 초대해 식탁에서 나눈 대화를 담은 첫 책 《엄살원》을 함께 썼다. 가끔 연극을 한다. 우스운 것은 무대에서, 슬픈 것은 글에서 다룬다. 그러나 우스운 것은 대개 슬프다고 생각한다. 정상성의 틈새, 제도의 사각지대로 숨어드는 섹슈얼리티 이야기에 이끌린다. 존재보다는 존재 아닌 것들의, 주체보다는 비체의, 말보다는 소리를 내는 것들의 연대를 독학하는 데 시간을 쓴다. 주력 상품은 우정과 관점. 얼룩개 무늬와 함께 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