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시 종로구에 있는 <아이들극장>에 가면 아이들이 미래라는 말이 얼마나 틀린 표현인지 알게 된다. 아이들은 알 수도 느낄 수도 없는 미래에 있지 않다. 아이들은 현재에 있고, 그중 어떤 아이들은 극장에 있다. 오돌토돌하고 왁자지껄하게 존재를 표현하며. 시네마 음악극 <빨간풍선> 같은 멋진 공연을 기다리면서.
내가 이 공연을 좋아하게 된 시점은 공연이 시작하기 한참 전이다. 낮아서 익숙지 않은 계단을 올라, 자리와 자리를 분리하는 장치가 없는 객석에 앉았을 때 내 몸은 약간 놀랐다. 이렇게 많은 어린이와 같은 시공간에 같은 목적으로 있어본 적이 없다는 사실이 체감되었기 때문이다. 스스로가 어린이였을 때를 제외하고는. 보호자를 가로막는 사물이 없는, 그래서 자신의 동행과 원하는 만큼 몸을 붙이고 앉은 어린 사람으로 가득한 객석, 나도 앉아 있는 그 부드러운 객석을 쓸어보자, 얼굴에서 물이 쏟아졌다. 그런 어른이 되고만 것인가. 많은 어린이를 보면 울고 마는 어른이. 공연과 상관없이 눈물을 터뜨리는 관객도, 공연의 훌륭함을 얼마나 많이 울었는지로 측정하려는 관객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데. 그런 해명을 할 새도 없이, 어느새 내 옆으로 다가와 앉은 이 공연의 연출가가 말했다. 이렇게 많은 어린이하고 있어서, 그래서 좋아요? 네, 좋아요. 요즘 어린이들은 좋겠다. 다행이다.
공연 <빨간풍선>의 토대가 된 작품은 1956년 알베르 라모리스가 만든 단편영화 <빨간풍선>이다. 사실 이 영화는 명랑한 제목이 야속하다는 느낌이 들 정도로 음울하다. 당신은 아주 우연히 아름답고 좋은 것을 가져볼 수 있다. 그런 우연의 가능성은 모두에게 평등하지만, 그 가능성이 다른 누구도 아닌 당신에게만 실현되었다는 이유로 사람들은 당신을 괴롭힌다. 마침내 당신이 그 귀한 것을 손에서 놓칠 때까지 괴롭힘은 계속된다. 당신이 사랑하던 것은 아주 흉하게 죽는다. 그것을 사랑함으로써 형성되었던 영혼의 한 부분도 죽는다. 초조하고 고단했던 삶을 위로할 마법 같은 결말이 기다린대도, 마법은 마법인 한 당신이 사랑과 상실을 겪었던 그 땅과 같은 차원에서 일어날 수는 없다. 당신과 당신의 마법은 다른 세계로 가야 한다. 멀고도 높은 곳으로. 영화는 그렇게 끝난다.
이런 이야기를…아이들에게 그대로 보여주어도 되는 걸까? 아마 이 공연을 만든 사람들도 걱정했을 것이다. 그런 일은 현실에서 일어나지 않으니 안심하라는 성의 없는 거짓말을 덧붙일 수도 없는 노릇이다. 게다가 사람들이 무엇을 느끼고 무엇을 느끼지 말아야 하는지 정하여 떠먹여 줄 거라면 음악과 연극이라는 예술을 동원할 필요도 없을 테다.
<빨간풍선>의 음악과 연극은 이 영화를 향한 하나의 해석을 조심스럽게, 그러나 최선을 다하여 보여준다. 밴드 ‘신나는섬’이 직접 창작했다는 음악은 시차와 국적이 무색하게도 50년대의 프랑스 영화 속에서 곧장 흘러나오는 것처럼 느껴질 만큼이나 적절하고 아름답다. 이미라 배우의 움직임과 동기화된 악기 소리가 서서히 규칙을 수립해 가고, 그 규칙을 이해할수록 음악을 듣는 즐거움도 커진다. 영화의 테마를 이루는 색깔인 빨강을 여러 사물과 빛으로 변주하여 보여주는 연극적 장치들도 마찬가지다. 관객의 감정은 영화의 서사보다는 음악과 이미지의 서정에 더 큰 영향을 받아 오르고 내린다. 이야기의 의미를 우악스럽게 고정하지 않으면서도, 주인공 파스칼이 처한 상황에 깊이 몰입할 수 있도록 공연은 있는 힘껏 돕는다.
이 공연에서 유일하게 무대로 ‘등장’하는 인물, 이미라 배우의 역할도 그런 것이다. 영화 속에서 파스칼은 수많은 사람을 마주친다. 그 많은 인물 중에서 단 한 명만을 무대로 직접 소환해야 한다면 그게 누구여야 할까? 선택은 다양하겠지만, 다른 공연이 아닌 이 공연에서 중요했을 기준을 짐작해 본다. 시종일관 맘을 졸이게 하는 영화 속에서, 관객은 어떤 인물에게 가장 마음을 의지하게 될까? 이 이야기를 들려주는 사람이 누구라고 생각할 때 이 공연이 가장 미더울까? 이야기를 방해하지도 않지만 방치하지도 않는, 그토록 적절하고도 오묘한 존재감을 가진 이가 누굴까? 공연은 그렇게 영화 속 한 명의 어른, 파스칼의 풍선을 잠시 맡아주었던 청소부를 이미라 배우를 통해 불러낸다.
그러므로 이 공연을 설명하는 중요한 키워드는 바로 ‘정밀함’이다. 문제는 이야기가 슬퍼도 되는지가 아니다. 이야기는 슬퍼도 되고, 때로 슬퍼야만 한다. 그런데 과연 ‘얼마나’ 슬퍼도 되는가? 100만큼 슬프다면 한창 자라는 마음이 똑 부러질지도 모른다. 그렇다고 30만큼만 슬프다면 싱싱한 영혼에 기별도 안 갈 것이다. 어떻게 하면 딱 64만큼만, 확실히 상처를 입지만 분명히 회복할 수 있을 만큼만, 그토록 정밀하게 슬프게 할 수 있는가? 이 공연은 마지막까지 그 질문에 성실히 대답한다. 영화가 끝나도 공연은 끝나지 않는다. 아직 관객에게 들려줄 말이 남았기 때문이다. 잃어버린 줄로만 알았던 것은 돌아올 거야. 너무 많이 기다리지 않아도 될 거야. 기억하던 모습 그대로는 아니겠지만, 그래서 더 좋을지도 모르지. 객석의 아이들은 돌아온 것을 향해 손을 뻗어본다. 힘주어 펼친 손들이 극장의 조명을 받아 반짝 빛난다.
나는 어린 사람의 몫으로서만 주어져야 하는 좋은 것이 분명히 있으며, 그것을 함부로 탐내거나 시기하는 어른을 강력하게 비판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렇다고 해서 어린이가 하는 경험을 어른이 공유할 수 없는 특수하고 임시적인 경험으로 분리해서도 안 될 것이다. 그러니 조심스럽게, 한정적으로, 중요한 조건들을 분명히 달아두면서 이렇게 말해보자. 이 공연이 어린이를 대하듯 대해지기를 싫어할 사람은 없을 것 같다고. 내 몸에서 나는 소리와 체액에 섬세한 관심을 받는 일, 아픈지 행복한지 둘 다인지 누군가 알아차려 주는 일, 물어보면 응답이 돌아오는 일, 자기표현을 금지당하지 않는 일, 느끼는 것이, 허락되는 일, 다 느끼는 동안 혼자 남겨지지 않는 일. 돌보는 이의 편의를 위해 고통을 중지하는 방식이 아니라, 섬세하고 복잡하고 어려운 경험과 감정을 원천적으로 차단하는 방식이 아니라, 바로 <빨간풍선>의 방식으로 잘 해주는 일. 그런 걸 마다할 사람은 없을 것 같다고.
그러니 당신에게 이번 주에 시간이 좀 있을까? 시간이 없다면 시간을 만들어서 <빨간풍선>을 보러 가자. 공연은 9월 1일까지니까 조금 서두르는 게 좋겠다.
안담(작가)
1992년 서울 서대문에서 태어났다. 봉고 차를 타고 전국을 떠돌다가 강원도 평창에서 긴 시간 자랐다. 미학을 전공했으나 졸업 후에는 예술의 언저리에서만 서성였다. 2021년부터 ‘무늬글방’을 열어 쓰고 읽고 말하는 일로 돈을 벌기 시작했다. 2023년에 활동가들을 초대해 식탁에서 나눈 대화를 담은 첫 책 《엄살원》을 함께 썼다. 가끔 연극을 한다. 우스운 것은 무대에서, 슬픈 것은 글에서 다룬다. 그러나 우스운 것은 대개 슬프다고 생각한다. 정상성의 틈새, 제도의 사각지대로 숨어드는 섹슈얼리티 이야기에 이끌린다. 존재보다는 존재 아닌 것들의, 주체보다는 비체의, 말보다는 소리를 내는 것들의 연대를 독학하는 데 시간을 쓴다. 주력 상품은 우정과 관점. 얼룩개 무늬와 함께 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