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하나 “고전, 읽으려고 너무 용을 쓸 필요는 없어요”
고전이 아직 어렵다고 생각한다면, 길잡이 책으로 먼저 시작해보는 건 어떨까? <책읽아웃> 전 진행자였던 김하나 작가와 함께하는 고전 산책의 즐거움.
카를로스 푸엔테스의 『아우라』, 이디스 워튼의 『순수의 시대』, 마르그리트 유르스나르의 『하드리아누스 황제의 회상록』, 셰익스피어의 『맥베스』, 프란츠 카프카의 『변신·시골의사』. 김하나 작가가 『금빛 종소리』에서 소개한 고전의 목록이다. 예스24 팟캐스트 <책읽아웃>에서 책을 읽고 싶게 만드는 기술을 선보였던 작가는 사람들이 어려워하는 고전마저 자기 스타일로 ‘맛깔나게’ 풀어놓는다. 고전의 줄거리와 내용은 그저 ‘곁다리’일 뿐이다. 김하나 작가와 고전을 산책할 때 중요한 건 읽는 즐거움이다. 언제든 읽다 잠들더라도 덮어 버리지 않고 ‘아우라’를 즐기는 것. 그리고 무엇보다 고전은 누군가 정해 놓는 게 아니라 늘 새롭게 변화한다는 걸 알아차리는 것.
이 책에서 나는 내가 좋아하는 몇몇 골목길을 여러분과 함께 걸어가 볼 것이다. 산책 안내자로서 가끔씩 도움이 될 만한 작고 단순한 도구들을 건네기도 할 것이다. 책으로 가득한 이 도시의 모습은 매시간 변하고 있으며, 어느 불 켜진 창문 안에서 지금도 새로운 고전이 쓰이고 있다.
(『금빛 종소리』 , 28쪽)
고전을 읽고 소개하는 작업을 한다고 꽤 오래전 들었어요.
2020년에 민음사 편집자님이 책을 내보자고 제안했어요. 민음사 세계문학 전집을 사람들에게 친근하게 소개할 수 있는 가이드를 써주셨으면 좋겠다, 써보실 의향이 있는지 물어보셨죠.
제안을 받고 어떠셨나요?
두 가지였는데, ‘올 것이 왔다’, ‘내가 감히 어떻게 이걸’이 동시에 왔어요. 많이 갈등했죠. 동거인 황선우 작가한테도 해내기만 하면 내 커리어가 점프할 기회인데, 내가 점프할 능력이 있는지 모르겠다고 말했었어요. 그랬더니 황선우 작가가 “김하나, 네가 안 하면 50대 남자 평론가가 하겠지.” 하는데 그 이야기를 듣는 순간 제가 해야겠다 싶더라고요.
속칭 ‘버튼이 눌린’ 상태였네요. 구체적으로 설명하자면 어떤 느낌이었을까요?
우리에게 고전이라고 계속해서 내려오는 리스트는 이전 천 년의 방식으로 정해졌잖아요. 새 천 년이 시작 됐는데도 그 이전 헤게모니를 가진 사람들의 시선으로 정한 세계 문학 전집에 걸린 작품이 많아요. 남성의 자아실현을 위해 여성을 도구로 쓰는데 거리낌이 없는 작품을 고전 문학으로 다시 소개하는 걸 보면 제가 땅을 치면서 후회하지 않을까 싶었어요. 새 천 년에 맞는 새로운 리스트를 21세기형으로 써보고 싶다는 생각이었던 거죠. 또 다른 작은 계기도 있었어요. 다른 출판사에서 고전 여성 캐릭터에 대한 에세이 제안이 온 적이 있는데, 그 순간 머릿속에 떠오른 캐릭터가 『순수의 시대』의 엘렌 올렌스카였어요. 엘렌 올렌스카에 관해 쓴다면 무슨 이야기를 할지 고민하다 제가 그 캐릭터를 굉장히 중요하게 여긴다는 걸 깨달았어요. 고전을 이야기한다면 『순수의 시대』는 꼭 소개해야겠다고 생각했죠.
수락 이후 집필 과정에서 ‘내가 왜 이걸 한다고 했을까?’ 하고 후회하는 순간도 분명히 있었을 것 같은데요.
당연히 있었죠. (웃음)
언제였을까요?
이정화 차장님이 되게 직관의 편집자예요. 독자 타깃이나 작가의 강점을 분석하기보다는 ‘이 사람은 어떻게든 잘해. 던져보자!’ 하는 스타일이에요. 한 꼭지를 써서 보내면 어떤 편집자님들은 피드백이 오죠. 좋다, 나쁘다, 이 부분은 수정했으면 좋겠다. 그런데 편집자님이 한마디도 없는 거예요. 뭘 써서 드리든 인자하게 웃으면서 끄덕끄덕하세요. 잘 가고 있는지 아닌지 모르는 채로 계속 갔는데, 결과적으로는 너무 좋았어요. 어쨌건 해보자고 썼더니 제가 걸어간 것만큼 힘을 얻어서 결국 끝까지 마친 것 같아요.
고전 선택도 완전히 열어놨던 건가요?
네, 잔인하지 않나요?
지금 민음사 세계문학 전집이 몇 권까지 나왔죠?
443권입니다. (편집자 답변)
443권 중 몇 권을 다뤄야 한다는 기준도 없었어요?
없었어요. 아무것도 없었어요. 제가 좀 떠보기도 했거든요. “한…10권 쓰면 될까요?” 물어봤을 때도 불교 염화미소처럼 아무 말 없이 끄덕끄덕하시더라고요.
민음사 세계문학 전집 외에도 여러 판본을 찾아보셨을 것 같아요.
여러 판본을 읽으면서 번역이 진짜 다르다는 걸 새롭게 깨달았어요. 좋게 읽었던 문장이 다른 번역으로는 말맛이 다르기도 하고요. 그전보다 더 입체적으로 번역 문학을 바라보는 관점이 생겼던 것 같아요. 다른 출판사에서 나온 고전을 다뤄도 괜찮다고 하셨는데, 되도록 민음사 세계문학 전집 안에서 골랐어요. 특정 전집으로 울타리를 만들어 둔 게 더 퍼즐 맞추는 것처럼 재밌어요. 제한 안에서 다른 것들이 더 깊이 있게 내려갈 수도 있고요.
최종으로 정해지기 전 책에 싣지 못한 작품도 있었을까요?
있죠. 다음 권을 쓰게 된다면 넣으면 좋겠는데, 저 설레발쳐도 되나요? 요새 계속 다음 권 생각을 하고 있어요. 지금은 단테의 『신곡』과 제인 오스틴의 작품 중 하나를 다루고 싶어요.
책 안에서 언급한 작품 수가 매우 다양하고 많아요. 비슷한 류의 작품이나, 해설을 위한 레퍼런스를 찾기 어려웠겠다 싶었어요.
글에 넣을 소재를 찾았다기보다는, 떠오른 것들을 확인하는 과정이었어요. 예전에는 하고 싶은 대로 삼천포로 이야기가 빠지면 독자들이 책을 덮을 거라는 공포가 있었어요. 그리고 저는 카피라이터 출신이기 때문에, 제품을 이야기 할 때는 절대 삼천포로 빠지면 안 되거든요. 그런데 이 책은 작품에 대한 이야기라기보다 제가 책을 어떻게 읽느냐에 대한 시연 같은 거라서요. 옛날 책과 요즘 책, 책과 뮤직비디오와 애니메이션을 딱히 구분하지 않고 제 안에 들어온 수많은 것들이 책에 들어갔어요. 책을 읽을 때는 이제까지 제가 받아들인 수많은 것들이 겹쳐 보이거든요. 한 권의 책을 읽을 때 얼마나 풍성한 작용이 일어나는지를 보여주고 싶었어요.
도서 팟캐스트 <책읽아웃>에서도 ‘삼천포책방’이라는 이름으로 책 소개 코너를 진행했었죠.
<책읽아웃> 처음 진행할 때도 겁이 났었거든요. 제가 책을 그렇게까지 많이 읽는 사람도 아니고, 다른 사람들에 비해 소양이 훨씬 더 뛰어나다고도 할 수 없어요. 하지만 ‘하면 는다’ 정신으로 하다 보니 청취자와 작가님들 모두 좋아해 주시더라고요. 제가 책을 읽는 방식이 잘못되지 않았고 많은 사람에게 효용이 있다는 걸 확인하는 과정이었던 것 같아요. 그래서 이 책을 쓸 때는 문학 사조나 이론을 소개한다기보다, 내가 책을 어떻게 읽는지 소개한다는 생각이었어요.
마인드맵 같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어요.
맞아요. 정확해요. 쓰면서도 마인드맵을 많이 작성했어요.
수록 순서에 따라 앞서 소개된 작품이 그 뒤에 다시 나오기도 하더라고요. 지금 책에 실린 순서대로 집필했었나요?
이디스 워튼을 ‘덕질’한 부분을 제일 처음 썼어요. 자다가 엉뚱한 새벽 시간에 깰 때가 있잖아요. 그러면 보통 다시 자려고 노력하는데, 이디스 워튼에 관해 쓸 때는 깬 김에 갑자기 문장이 떠올라서 어둠 속에서 쓰고 그랬어요. 우리나라에 이디스 워튼 붐이 아직 제대로 오지 않았다고 생각해요. 번역되는 작품들도 이제서야 점점 늘어나고 있고요. 그전까지 영어 페이지도 찾아보고 잡히는 대로 번역된 것들을 다 읽고 그랬더니 할 이야기가 너무 많아진 거죠.
『아우라』를 첫 번째로 소개하고 있어요. 누가 ‘본편보다 긴 설득’이라고 표현했는데, 저는 책의 시작이어서 이렇게 힘을 준 건가 싶었어요.
분량이 짧은, 하지만 신화적인 요소를 가진 책을 앞에 배치해서 쉽게 읽어볼 수 있도록 하고 싶었어요. 100페이지의 법칙이나 상징, 디스프루타르 등 저의 독서 기법이나 모토 같은 걸 처음에 이야기하기도 쉬웠고, 신비감을 앞쪽에 드리우고 싶기도 했고요. 동시대 소설과 비교하면 이전 시대 이야기에는 신비성이 있다고 생각해요. 고전 문학은 어떻게 이 시절에 이렇게 했지, 싶은 희한한 분위기가 서려 있잖아요. 그게 아우라라는 제목과도 너무 잘 어울려서 앞부분에 배치하고 싶었어요.
생각해 보니 최근 현대 소설 중 신비성이 있는 작품이 별로 없네요.
신비감이 없진 않은데, 좀 다르죠. 최근 <여자 둘이 토크하고 있습니다> 팟캐스트에서 정서경 작가님이 요즘은 사람이 사라질 수 있는 여지가 적다고 이야기한 적이 있어요. 25년 전만 하더라도 친구에게 연락이 안 닿으면 기다리고 집에 전화해 보고 하는데 요즘은 휴대폰으로 연락하고 카톡 남길 수 있으니까요. 이디스 워튼의 책을 보면 주인공이 어느 기차역에 도착했는데 사람도 없고 눈보라는 치고, 돌아가야 하나, 있는 돈을 다 모아서 여인숙에 묵어야 하나 갈등하는 장면이 있어요. 지금과는 너무 다른 속도잖아요. 가닿지 못함, 안타까움, 알 수 없음이 더 컸던 시대이고 그 시대에 쓰인 이야기가 신비성을 간직하는 경우가 더 많은 것 같아요.
고전 읽기의 매력 중에 하나로 시간성이 남다르다는 표현을 해주셨는데, 사실 독서 자체가 다른 시공간의 체험이잖아요. 고전의 ‘남다름’은 무엇일까요?
서울 안에서 창덕궁 후원에만 가더라도 너무 기분이 이상해요. 바깥은 최첨단 빌딩이 둘러싸고 있는데 궁에 들어가면 그 시대의 생활상과 정신세계, 기법, 소재가 총집합 되어 목조 건물을 이루고 있어요. 그 안에 들어갔다 오면 아주 남다른 시간성을 체험하게 되죠. 설명하기는 어렵지만 그건 총체적인 경험이에요. 여행을 가서도 몇백 년 전 지어진 성당 안에 들어가면 말로 설명할 수 없는 성스러움을 느끼잖아요. 고전의 문장 속에서도 비슷해요. 저는 그게 아주 먼 시대의 정신세계를 체험하고 오는 거라고 생각하거든요. 하나하나 인간이 쌓아 올리고 칠하고 깎아서 만든 것들을 볼 때, 이게 만들어지던 당시 인간의 마음은 어땠을까, 종교, 신심은 어떤 거였을까, 이 장인의 정신세계는 어땠을까, 이런 것들이 다 합쳐져서 우리에게 총체적으로 어떤 장을 열어주는 것 같아요. 그것을 제가 말로 설명할 수 없기 때문에 계속 체험이라고 이야기하는 거죠. 마냥 느리다고만 이야기하는 것과는 다른 것 같아요.
체험을 위해서는 시간이 필요한데, 독자들에게 어떻게 그 시간을 내게 할 것이냐가 출판계가 풀어야 할 문제라고 생각해요. 시간성을 경험할 수 있도록 시간을 내는 일이 지금 가장 큰 숙제이자 걸림돌인 거죠.
그 생각을 요새 자주 해요. 사람들이 책을 읽고 싶어 하지만 사실 못 읽고 있는 것이 아닌가? 시간이 없기 때문이 아닌가? 그래서 책에서도 걷기에 대한 비유를 썼는데, 어딘가로 이동하는 효용의 가치로 따지자면 걷기는 효율성이 떨어지는 행위예요. 차 타고 가서 사진 찍고, 다시 차를 타고 이동하는 것보다 오랜 시간을 들여 목적지까지 걸어가는 것은 효율적이지 않아요. 하지만 다른 즐거움이 있잖아요. 그 경험은 대체되지 않고 내 안에서 계속 영향을 미쳐요. 빨리 이동하는 것보다 훨씬 더 오래 영향을 미칠 경험을 나에게 준다고 생각하면, 사람들은 기꺼이 걷는 시간을 내겠죠.
…라고 사람들에게 책을 읽으라고 어필해야 하는 거겠죠?
또 하나는, <책읽아웃>에서 책 수다를 즐겁게 떨고 있는 걸 사람들이 들으면 읽고 싶은 책이 생기고 옆에서 같이 수다 떨고 싶은 마음이 생기는 것처럼, ‘책을 읽으세요’ 보다는 ‘책 읽기는 이렇게 즐거워요’를 느끼게 하는 게 더 좋은 홍보라고 생각해요. 책을 읽으며 우리 안에 쌓여가는 걸 직접 느껴보는 게 중요하죠. 요새 사람들이 한복 많이 입잖아요. 만약 우리에게 조상님들의 얼이 담겨 있으니 한복을 입어야 된다고 강제로 ‘한복 입기의 날’ 같은 걸 정하면 사람들은 다른 옷을 입고 다니겠죠. 하지만 아무도 강제하지 않으니 한복 입기가 점점 놀이가 되더니 사람들이 너도나도 한복을 한 번쯤 입어보고 싶어 한단 말이죠. 사람들이 어떤 즐거움을 발견하기 시작하면, 오래된 지혜와 얼이 담겨 있든 말든 계속 놀이로 즐기고, 놀이의 즐거움을 발견한 사람들은 계속 그 즐거움을 찾아나갈 거라고 저는 믿고 있어요.
고등학교에서의 일화로 책이 시작돼요. 시간이 많고 모든 것을 마른 스펀지처럼 빨아들이는 10대, 20대 시절에 고전이 훨씬 체화될 기회가 많겠다는 생각도 들어요.
그런 것도 있고, 아닌 것도 있어요. 아닌 예시로는 『맥베스』. 저는 어렸을 때 『맥베스』를 줄거리 파악하려고 읽었던 것 같아요. 맥베스라는 캐릭터가 살인하고 왕이 된 뒤 파멸한다. 끝. 40살이 넘어서 다시 읽어봤더니 무시무시한 파멸의 분위기와 그것으로부터 비롯되는 허무, 인생의 의미 없음, 그런 게 너무 잘 표현되어 있어서 옛날에 읽었을 때 결코 알 수 없었던 감정이 느껴지더라고요. 나이 든 세대에게, 예전 사람과 새로운 사람들에게 계속해서 어필하는 매력이 있다고 느꼈어요.
그리고 위스키를 마시며 『맥베스』를 추천하는 중년이 되는 거죠. (웃음)
스펀지처럼 빨아들일 때 너무 막 많이 읽는 것도 별로 좋지는 않은 것 같아요. 하지만 예전에 읽은 내용이 하나도 기억나지 않을지라도 느낌은 남아있잖아요. 이를테면 『폭풍의 언덕』을 처음 읽을 때, 무슨 말인지 모르겠고 기억도 남지 않지만 히스 언덕 황무지에 바람이 막 불고 먹구름이 있고 미친 연인들이 돌아다니는 인상은 남아 있어요. 저는 그거면 되었다고 생각하거든요. 여행을 다녀온 뒤에도 뭘 먹었는지, 어느 거리를 갔는지, 무슨 성당을 방문했는지 다 까먹더라도 아일랜드에서는 어둡고 짙은 느낌이었다, 이탈리아에서는 노출이 과다한 것처럼 밝은 느낌이었다, 이런 것만 남아도 내 인생의 내면이 굉장히 다채로워지지 않을까요?
고전의 두 번째 재미로 세계를 여행할 때 고전을 토대로 사람들과 이야기할 수 있다는 점을 꼽았는데, 그걸 읽고 좀 웃었어요. 저라면 여행 가서 만난 사람들과 고전을 이야기하진 않을 것 같아요.
그래서 덧붙여 놨어요. 평생 그런 얘기를 할 일이 없었는데 정말 드문 경험이었다고. (웃음) 요즘은 온 세계의 책이 번역되어 한국어로 읽잖아요. 그런데 아르헨티나 사람이 쓴 책에 『제인 에어』에 대한 얘기가 나온다, 『폭풍의 언덕』에 대한 얘기가 나온다, 그러면 내가 알 수 없는 아르헨티나에 관해서만 이야기했을 때보다 더 이해하기 쉬운 징검돌이 돼요. 책을 읽는 것도 다 대화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꼭 여행에서 누군가와 대화를 나눌 뿐 아니라 텍스트를 읽을 때도 고전이 징검돌이 될 때가 많다고 이야기하고 싶었어요.
그렇죠, 해리포터 시리즈 같은 거죠. 전 세계적으로 다들 어떤 이야기를 공통 기억으로 간직하고 있는 거죠.
그렇죠. 해리포터는 고전이죠. 아무리 조앤 롤링이 이상한 말을 하더라도, 고전이죠.
여행지에 가서 사람들과 보르헤스 이야기는 하지 않겠지만, 해리포터 이야기는 할 수 있겠네요. 그 차이는 뭘까요? 해리포터는 고전이라고 생각하지 않는 걸까요?
머릿속에 이전 천 년의 기준이 다들 남아있는 거죠.
어렸을 때, 책을 읽는 아이였나요?
많이 읽는 편은 아니었는데, 추리 소설에 빠져서 아가사 크리스티를 좋아했었어요. 엄마가 책을 많이 읽는 분이었고요. 추리 소설을 사면 무조건 제가 제일 먼저 읽어서 범인을 알고 있었어요. 엄마가 설거지를 하는데 옆에 책이 엎어진 채로 있어요. 그럼 옆에 서서 ‘엄마, 누가 죽였을 것 같아요?’ 물어보기 시작하는 거죠. 엄마도 설거지하다 말고 ‘나는 금마가 쎄하더라’ ‘근데 갸는 알리바이가 있잖아요’ ‘근데 그 여자랑 공범일 수도 있어’ 이러면서 짝짜꿍이 맞았어요. 생각해 보니 그때 이미 도서 팟캐스트를 하고 있었네요.
그렇네요.
책을 읽고 수다 떠는 걸 엄마랑 많이 했었고, 학창 시절은 노느라 바빠서 책을 많이 안 읽었죠. 대학생이 되면서 책을 많이 읽었어요. 국문과에 들어갔는데 주위 친구들이 너무 똑똑해 보이는 거예요. 어려운 말도 많이 쓰고, 내가 모르는 개념도 너무 잘 알고 있는 것 같아서 작아지는 거죠. 뭐라도 좀 해야 할까 싶어서 도서관을 얼쩡거렸는데, 그럴 때 더듬어서 갈 수 있는 게 고전인 것 같아요. 이미 검증되었고 유명한 책들. 당시 전예원 출판사에서 나온 셰익스피어 전집이 권당 두께가 얇았어요. 도서관에서 그걸 뽑아서, 쪼그라진 내가 조금은 펴지지 않을까 하는 바람으로 시리즈를 다 읽었어요. 막연히 다 읽으면 적어도 제 안에 어떤 단단한 것이 생겨 있을 거라고 기대했는데 전혀 그렇지 않더라고요. 오히려 제대로 이해한 게 맞는지, 어디 가서 읽었다고 말할 수 있을지 여전히 불안했어요. 하지만 그게 두고두고 온갖 곳에서 반복, 변주되는 거예요. 잡지에 나오기도 하고, 연극이 계속해서 올라오고, 영화나 극에 대한 리뷰를 읽어보면 기억나는 부분도 있고요. 고전의 힘이 거기에 있을 것 같기도 해요. 사람들이 언급하면 그게 나에게 징검돌이 되어 더 멀리 가줄 수 있는 느낌.
직장을 다닐 때의 읽기 경험도 팟캐스트에서 이야기한 적이 있어요. 그때는 뒤쳐지고 싶지 않다는 호승심보다는, 마음의 헛헛함을 달래기 위해 읽었던 것 같아요.
맞아요. 내가 없어지는 느낌이었죠. 너무 속도가 빠른 광고업에서 일했고 새로 나온 서비스나 브랜드를 사랑받게 하기 위한 글을 쓰는데, 소비 사회 속에서만 내 문장이 쓰이니까 어떤 갈급함 같은 게 생겨났어요. 내가 계속 잔물결처럼 소비되는 산업이 아니라 샘물처럼 깊은 곳에서 나오는, 여기와 상관없는 저 깊은 곳에 가고 싶다는 욕망. 좀 더 저변에 흐르는 물결을 나에게 알려줄 책을 읽고 싶다는 갈급함이 있었어요. 문장을 읽는 시간을 사수했다는 사실 자체에서 오는 안도감도 있었고요. 『디 에센셜: 프란츠 카프카』 리뷰를 쓰기도 했는데, 카프카가 말하길, 자기가 일하는 보험국 사무실은 너무 삶의 위쪽에 있다는 거예요. 글쓰기는 삶의 너무 아래쪽에 있기 때문에 매일 사무실과 글을 왔다 갔다 하면서 요동치고 있다고 한 적이 있어요. 그런 것을 나도 모르게 하고 있었던 것 같아요. 지금 생각해 보면 그런 산업군에 있었기 때문에 오히려 더 깊은 곳에 뭔가를 붙들지 않으면 부표가 끊어진 것처럼 흘러가 버릴 것 같은 불안감이 있었죠.
요새 나오는 책들은 깊이가 없고 오로지 고전이 진정한 책이라고 하는 사람들이 있잖아요. 그렇게 고전을 좋아하는 것과, 내가 표상적이고 가벼워졌다고 생각할 때 고전의 상대적인 무거움을 찾아가는 것과는 차이가 있을 것 같거든요.
저는 고전을 계속해서 이어져 온 무엇이라고 생각하지, 뚝 떼어 ‘이것만이’ 고전이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우리는 계속해서 현시대로만 살아갈 것 같지만, 언젠가는 옛날 사람이 될 거잖아요. 이후 사람들이 지금을 돌아보며 참 달랐다고 느낄 수는 있어도 우리가 다른 인류인 것은 아니고요. 누가 언제부터 고전이라고 기준을 정할 수 있을까요? 『아우라』도 1962년에 쓰였고 오래되긴 했지만 그렇게까지 오래된 것은 또 아니잖아요. 고전도 어떤 흐름의 일종이고 위에 있는 잔물결도 해류와 다 같은 바다로 이어져 있어요. 정의하기 나름이라고 생각해요.
책에 소개된 작품을 즐겁게 맛보는 기쁨과 다르게, 이게 왜 이렇게 맛있는지 설명하는 건 뱉어놓고 한참을 들여다봐야 하는 일이라고 생각하거든요. 고전에서 느낀 즐거움을 표현하기 위해 괴로웠던 점은 없나요?
제가 저 스스로 파악한 게 있어요. 저는, 설명충이에요. 제가 읽는 행위에서 어떤 것들이 벌어지고 뭐가 연상되는지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과정을 차례차례 최대한 꺼내놓자는 마음으로 썼기 때문에 그 과정이 읽기와 분리되진 않았던 것 같아요. 설명충의 세계는 그렇습니다.
다행이네요. 첫맛이 그래도 계속되는 거잖아요.
그렇죠. 그리고 그것도 달라지죠. 저에게는 『아우라』가 젊고 감정이 요동칠 때 읽은 작품이어서 너무 강렬하게 다가왔는데, 그때는 제가 요동치는 힘으로 이걸 읽었던 것 같아요. 읽는 당시 역량을 발휘해서 그 작품을 읽는 거고, 내 역량이 되지 않았든 작품을 읽을 만한 시기가 아니든, 운이 맞지 않으면 나중에 내가 좋은 작품이라고 생각할지언정 그때는 흘러가 버릴 수도 있죠. 모든 것, 내가 가지고 있는 감정의 역량, 지적인 역량, 작품의 운때가 맞을 때 시너지가 확 일어나는 것 같아요.
모든 것은 타이밍이다.
지금 안 맞으면 그냥 인연과 타이밍이 아닌 거죠. 읽으려고 너무 용을 쓸 필요는 없어요.
책을 쓰느라 책을 못 읽는 상황은 없었나요?
있었죠. 쓰는 동안 신간은 거의 못 읽었어요. 출판사에서 신간을 엄청나게 보내주세요. 테이블에 책이 수백 권이 쌓여 있는데 한 권을 못 읽고 계속 예전 책들, 여러 가지 연관된 책들을 읽게 되는 거죠. 심지어 가까운 분이 보내준 책이어도 못 읽겠더라고요. 영화도 잘 못 보는 기간이 오래 있었어요.
책이 나오고 나서 곳곳에서 책 읽는 사진을 SNS에 올려주셨어요. 장소마다 애착이 생겼을 것 같기도 하거든요. 쓰고 읽은 기억이 장소와 중첩되기도 하고요.
집, 작업실, 부산 작업실 세 군데 정도를 돌아다녔는데, 『맥베스』를 쓰던 때가 기억나요. 맥더프가 자기 아내와 아이들이 살해됐다는 소식을 타국에서 전해 듣고 반응하지 못 하는 장면이 있어요. 12시 넘어서까지 『맥베스』의 비장미 세계에 빠져 울다가 그날 쓸 분량을 다 쓰고 눈물도 닦고 스탠드 조명을 끄고 나가려는데, 나가려다가 작업실을 돌아봤을 때 이 공간과 내가 오늘 이걸 쓴 기억은 정말 오래 가겠다고 생각했어요.
무대의 마지막 불을 끄고 가는 느낌이죠.
맞아요. 그런 느낌이었어요. 이디스 워튼이 “그 한 시간이 (자신의) 전 생애를 밝게 비추어 주었음에 틀림없다.”라고 쓴 문장이 있는데(『금빛 종소리』, 109쪽 재인용), 저는 이 책을 쓴 게 앞으로 읽고 쓰는 인생 후반기 등불을 밝혀주는 작업이겠다고 생각했어요. 소중한 기억이죠.
2권에 대한 독자들의 요구가 있었어요.
가끔 있죠. 저도 더했으면 좋겠어요. 만약 이걸 단권으로 끝내려고 했으면 더 많은 작품을 다루려고 욕심을 냈을 것 같은데, 기회가 주어진다면 그때 실컷 하고 싶은 이야기 다 하지 뭐, 이런 생각을 하니까 오히려 5권에서 멈출 수 있게 되더라고요.
준비하고 있는 게 있나요?
실제 진행하고 있는 건 없어요. 2권에 실릴 만한 작품을 다시 읽어보고 지금 21세기에 얘기할 만한 게 있을지 다시 검토해 봐야겠죠. 그 검토 과정이 되게 아슬아슬하면서 재밌어요. 나이 들어서 예전에 읽었던 이미지를 가지고 책을 다시 읽을 때, 그사이 쌓인 경험으로 더 많은 이미지를 키워내는 과정이 저에게는 또 미지의 세계거든요. 인상이 좋았던 나라를 오랜 세월이 흘러 다시 가면 이 나라에서 읽을 수 있는 게 더 많아지고 경험이 풍성해지는 것처럼요.
바로 준비하시지는 못할 것 같아요. 이미 불을 끈 거잖아요. 끄자마자 다시 들어가서 쓸 수는 없죠.
한동안은 안 되겠죠. 머릿속으로 약간 돌아가고 있긴 해요. 재밌거든요. 전집 시리즈가 한 600권쯤 되면 제가 울면서 뭘 쓰고 있지 않을까요.
* 필자|김하나
읽고 쓰고 듣고 말하는 사람. 대학에서 국문학을 전공했고 오랜 기간 카피라이터로 일했다. 『당신과 나의 아이디어』, 『힘 빼기의 기술』, 『여자 둘이 살고 있습니다』(공저), 『빅토리 노트』(공저) 등의 책을 썼다. 2017년부터 2021년까지 예스24 팟캐스트 〈책읽아웃: 김하나의 측면돌파〉를 진행하며 수많은 책과 작가를 소개했으며, 2022년부터 동거인 황선우 작가와 함께 팟캐스트 [여둘톡: 여자 둘이 토크하고 있습니다]를 만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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