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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담의 추천사] 이웃의 안부를 묻, 지 않기

안담의 추천사 14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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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날도 그다음 날도 여자에게서는 전화가 오지 않았다. 그날과 가까운 어떤 날들이 그의 안부를 묻지 않은 덕에 흘러갔다. 시간이 조금 더 흐르자 나의 안부는 그의 안부와는 무관해졌다. 이웃과 무관하게 사는 일은 얼마든지 가능하니까. (2024.07.31)

pexels.

6월 어느 날, 그러니까 이 여름이 본격적으로 더워지기 전의 일이다. 나와 개와 남자는 심야 산책을 마치고 귀가 중이었다. 자정이 가까운 시각이었음에도 개의 체력은 충분했고, 개가 이끄는 대로 걷다 보니 계획보다 먼 곳까지 걸었고, 산책이 길어질 줄 모르고 낡은 슬리퍼를 꺼내 신은 남자의 발에는 상처가 여러 개 났다. 날카로운 슬리퍼 모서리에 생살이 까져 절뚝거리는 남자를 위해서 나는 편의점으로 달려가 연고와 밴드를 샀다. 가로등 아래로 남자를 데려가 그 앞에 무릎을 꿇었다. 상처를 치료하는 동안 남자의 두툼한 발가락이 따가움과 부끄러움에 들썩거리는 모습이 보기 좋았다. 밴드 두 개를 더 써서 슬리퍼의 갈라진 부분에도 붙였다. 임시로 수리한 슬리퍼를 신기자, 남자의 걸음걸이가 한결 편안해졌다. 이제 집에 가서 이 슬리퍼를 제발 버리는 거야, 약속하고 우리는 집을 향해 출발했다.

얼마 못 가서 나와 개와 남자는 다시 멈추어 섰다. 도와주세요, 아무나 좀 도와주실 분 안 계세요? 어둑한 골목의 저 앞쪽에서 도움을 요청하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목소리의 주인공은 대나무처럼 홀쭉하고 키가 컸으며 얼굴이 아주 어렸다. 중학생이나 되었을까. 그는 아스팔트 바닥에 누워있는 여자의 뒤편에 서서 땀을 뻘뻘 흘리고 있었다.

술에 많이 취하신 것 같은데, 오토바이가 이 여자분을 스치고 지나가서 넘어지셨어요. 너무 아프시대요. 번호판이라도 기억하고 싶었는데 너무 빨리 지나갔어요. 집이 이 근처라고 하시는데 저 혼자서는 일으킬 수가 없어요.

소년의 힘은 충분해 보였지만, 그의 오갈 데 없는 손짓을 보자 너무 아프다는 여자를 더 아프게 할까 봐 두렵다는 뜻임을 알 수 있었다. 끙끙 앓는 여자에게 경찰을 불러드릴지, 앰뷸런스를 불러드릴지 여러 차례 물었으나 여자는 집이 가깝다고 말할 뿐이었다. 일어나실 수 있겠어요? 여자가 그렇다고 대답하기에 나는 개를 남자에게 맡기고 여자의 겨드랑이로 팔을 깊숙이 넣어 여자를 안아 올렸다. 그의 가벼운 뼈와 무른 살이 어깻죽지를 통해 고스란히 느껴졌다. 그의 집은 다행히 서른 걸음도 채 되지 않는 곳에 있었다.

여자가 알려준 건물 현관 비밀번호는 정확하지 않았다. 소년이 울먹였고, 나는 경비실 호출을 통해 들어갈 수 있을 거라고 소년에게 말했다. 건물 안으로 들어서서 여자가 산다는 층으로 갔다. 여자와 나와 남자와 개와 소년은 이 문 앞에도, 저 문 앞에도 서보며 여자가 집을 기억해 내길 기다렸다. 한참을 돌다가 어떤 집 앞에 멈춰 선 여자는 문을 두드리지도, 도어락을 만지지도 않았다. 이 집은 친구 집인데 그런데 친구가 지금은 잘 것 같아. 하지만 작업실이 있는데, 작업실은 어디 있냐면…… 여자의 말은 끊겼지만, 문득 지하로 내려가 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1층이라고 부르지만 반지하인 곳. 그곳은 꽤 밝았는데, 왜냐하면 한 집의 문이 많이 열려있었기 때문이다. 들어가기 위해 비밀번호를 기억해 낼 필요가 없는 그 집 앞에서 여자는 말했다. 여기예요. 여기가 내 집이에요.

소년과 남자가 여자를 부축하도록 두고, 처음 보는 공간을 탐색하고 싶어 신이 난 개를 타이르고, 여자의 집 또는 작업실로 들어가 집을 조금 치웠다. 행주를 찾아서 바닥에 쏟아져 있던 술과 물을 닦아내고 쓰레기를 정리했다. 여자가 그러시지 않아도 된다고 말했으므로 지나치게 치우지 않도록 조심할 필요가 있었다. 설거지를 하고 싶었지만 그러면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깨끗하게 만들어서는 안 된다. 집 안에서 다시 미끄러지지 않을 정도면 된다. 짧은 청소를 끝낸 뒤에 다시 한번 여자를 안고 천천히 걸었다. 그의 신발을 벗기고 침대에 눕혔다. 그의 팔과 다리에는 아스팔트에 갈려 까진 상처가 여럿 있었다. 남자의 발가락을 수리하고 남은 연고와 밴드를 꺼내 그의 상처에 발랐다. 내일 꼭 병원에 가셔야 해요, 내가 말하자 여자는 이미 다니고 있어요, 대답하며 팔에 있는 주사 자국을 보여주었다. 어떤 병원 다니시는데요? 그냥. 아파. 여기저기가. 어지러워. 어지러우시죠. 누우셔야 해요. 술을 조금 먹었어. 조금 드셨죠. 그러니까 누우셔야 해요.

여자가 눕고, 나는 여자의 핸드폰으로 내 핸드폰에 전화를 걸었다. 이제 번호가 남았어요. 내일 이 번호로 전화하세요. 병원 가셨는지 확인할 거예요. 그러자 여자가 내 팔을 꼭 잡았다. 아가씨가 누군지도 알려주어야지. 이름을, 적어주어야지. 나는 그의 핸드폰에 안, 담, 이라고 적고 번호를 저장했다. 여자가 몸을 일으켰다. 틴트가 들어간 안경 때문에 보이지 않던 여자의 눈이 처음으로 눈에 들어왔다. 여자가 말했다. 안, 담, 내가 전화하면 받을 거예요? 입이 닫히려고 하기 전에 재빨리 그럼요, 대답했다. 말을 뱉고는 쇠공이 지나가듯 목울대가 아팠다. 내가 어떤 질문에 그렇다고 대답했는지를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내가 전화하면 받을 거냐고 묻는 거라면 사실이었다. 내가 전화하면 받고 싶냐고 묻는 거라면 거짓말이었다. 이제 정말로 누우셔야 한다니까요. 내 손을 틀어쥔 여자의 손을 풀어냈다. 여자가 제대로 누워 잠을 청했다. 나는 불을 끄고 그 집에서 나왔다. 무엇보다 그 집의 현관문이 단단히 닫혔는지 두어 번 확인했다.

소년과 남자와 개는 계단참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소년이 우물쭈물 말했다. 저 이제는 가봐야 해서, 할 일이 있어서. 오늘 정말 잘하셨어요, 남자와 내가 그렇게 말하자 소년은 술래에서 벗어난 듯 편안한 표정으로 뻐끔 인사를 건네고는 어두운 골목으로 걸어갔다. 길고 검고 아름다운, 그럼에도 아직 한참은 더 길어질 수 있을 듯한 팔다리를 휘적휘적 저으면서 가로등 밑 계단에 앉아 있던 친구들에게 합류했다. 담배를 피우고 침을 뱉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 그의 무리에게로. 저렇게 중요한 할 일을 두고 누군가를 돕는 데 시간을 썼던 그의 뒷모습을 보자 가슴이 미어졌다. 저 친구들을 다 두고, 저 비행을 다 두고. 소년들을 뒤로하고 나와 개와 남자도 집으로 걸었다. 다음날도 그다음 날도 여자에게서는 전화가 오지 않았다. 그날과 가까운 어떤 날들이 그의 안부를 묻지 않은 덕에 흘러갔다. 시간이 조금 더 흐르자 나의 안부는 그의 안부와는 무관해졌다. 이웃과 무관하게 사는 일은 얼마든지 가능하니까. 그러나 그가 생각날 이유가 하나도 없는 어떤 날에 불현듯 이런 일도 또한 가능하다는 속삭임이 들렸다. 내 핸드폰에서 6월의 통화 기록을 검색하는 일, 그의 번호를 알아보는 일, 그리고 마침내 이웃의 안부를 묻는 일. 만일 그가 전화를 받는다면, 이렇게 말하는 일. 내가 전화하면 받는지 궁금해서, 그래서 걸어보았다고. 나는 아직 그에게 전화하지 않았고, 이제는 그에게 전화할 생각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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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안담(작가)

1992년 서울 서대문에서 태어났다. 봉고 차를 타고 전국을 떠돌다가 강원도 평창에서 긴 시간 자랐다. 미학을 전공했으나 졸업 후에는 예술의 언저리에서만 서성였다. 2021년부터 ‘무늬글방’을 열어 쓰고 읽고 말하는 일로 돈을 벌기 시작했다. 2023년에 활동가들을 초대해 식탁에서 나눈 대화를 담은 첫 책 《엄살원》을 함께 썼다. 가끔 연극을 한다. 우스운 것은 무대에서, 슬픈 것은 글에서 다룬다. 그러나 우스운 것은 대개 슬프다고 생각한다. 정상성의 틈새, 제도의 사각지대로 숨어드는 섹슈얼리티 이야기에 이끌린다. 존재보다는 존재 아닌 것들의, 주체보다는 비체의, 말보다는 소리를 내는 것들의 연대를 독학하는 데 시간을 쓴다. 주력 상품은 우정과 관점. 얼룩개 무늬와 함께 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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