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유수 “나는 그저 이동하는 인간일 뿐이다”
『겨울 데자뷔』 최유수 작가 서면 인터뷰
지난 모든 겨울이 실은 하나의 겨울인 거고, 우리를 불쑥 찾아오는 기시감들이 그걸 무한히 연결해주고 있달까요. 공간보다는 시간, 그곳이 실제로 어디인지보다는 끝없이 이어지는 겨울 속을 이동하는 여정이었다는 사실이 중요했어요. (2024.03.21)
거칠고 황량한 시베리아로, 겨울이라는 관념 속으로 떠난 최유수 작가의 여행기를 담은 에세이 『겨울 데자뷔』가 출간 되었다. 항공권과 열차표의 값을 치른 몸이 근질거리고 들뜨는 기다림의 순간부터 무사히 여정을 마치고 귀가하는 순간까지의 겨울, 설원, ‘이동하는 인간’의 내면에 대한 모든 사유를 최유수 작가 특유의 아름다운 문장들에 담았다. 겨울의 끝을 잡고 저자가 여행자의 시선으로 한장의 사진처럼 담아낸 여행지의 풍경을 만끽해보길 추천한다.
안녕하세요, 작가님! 겨울의 정취가 느껴지는 여행 에세이 『겨울 데자뷔』로 돌아오셨습니다. 출간 이후에 어떻게 지내고 계셨나요?
안녕하세요. 5년이라는 시간 동안 붙들고 작업한 책이라서 그런지 꽤 시원섭섭한 기분으로 겨울의 끝자락을 보냈습니다. 겨울이 지나가고 있음을 아쉬워하면서요. 3월 초에는 일주일 정도 도쿄 여행을 다녀왔어요. 구름 한 점 없는 어느 맑은 일요일에는 친구들과 함께 후지산을 바라볼 수 있는 도쿄 근교의 어느 마을에도 다녀왔습니다. 있는 줄도 몰랐던 놀이공원에 들러 다같이 기네스북에 오른 롤러코스터를 타기도 했어요. 호숫가의 케이블 카를 타고 높은 곳에 올라가니 슈톨렌처럼 하얀 눈에 덮인 후지산 봉우리가 바로 눈앞에 있는 풍경처럼 깨끗하게 보였습니다. 시력이 좋아진 듯한 착각이 들었어요. 서울로 돌아와 꽃가루 알러지가 슬슬 고개를 내미는 걸 보니 마침내 봄이 왔구나 싶습니다. 며칠 뒤에는 연남동에 위치한 아름다운 서점 어쩌다책방에서 작은 출간 기념회를 가질 예정입니다.
다양한 에세이로 독자분들께 인사드렸지만 여행 에세이는 처음인것 같습니다, 이전의 집필과정들과 비교 했을 때 ‘여행 에세이’라서 더 신경쓰신 부분이 있으실까요?
출간 계약을 제안받았을 당시 때마침 바이칼 호수와 시베리아 여행을 다녀온 지가 얼마 되지 않았을 때였습니다. 그리 긴 여정은 아니었지만, 답답한 일상으로부터 도망치듯이 떠난 한겨울의 시베리아에서 많은 걸 느끼고 비우며 돌아왔기에 잘 정리해 매듭을 지어야 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집필을 시작하면서 가장 먼저 고민했던 점은 단순히 ‘여행 에세이’로 읽히고 싶지 않다는 것이었습니다. 에피소드를 중심으로 하는 ‘일기’를 쓰고 싶지 않았어요. 여행에서 무슨무슨 일이 있었는지 나열하기보다는 조금 더 시적인 이미지에 가깝도록, ‘홀로/이동하는/시간’에 관한 여러 가지 사유와 감각을 책으로 남기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누구보다도 나 자신이 먼저 펼쳐 읽고 싶은 책이길 바랐어요. 서점에서는 ‘여행 에세이’로 분류되겠지만, 저에게 이 책은 시이기도 하고 소설이기도 하고 에세이이기도 하고 자유로운 중얼거림이기도 합니다.
여행지보다 계절이 주인공인 제목이 눈에 띕니다. 제목의 배경에 관해 들려주세요.
처음 원고 파일의 가제는 『시간 너머의 시간』이었는데 여러 번의 퇴고를 거치면서 제목을 수정했어요. ‘겨울’이라는 단어를 앞에 두니 책 제목을 말할 때 부드러운 발음으로 입을 떼는 느낌이 좋았어요. 거대한 바이칼 호수와 시베리아의 황량한 풍경, 그리고 시간이라는 관념에 관한 여러 가지 생각들이 책 내용의 대부분을 차지하곤 있지만, 항상 그 너머에는 시제 없이 쌓여온 겨울의 이미지가 배경처럼 존재했기 때문에 『겨울 데자뷔』라는 제목이 만들어졌어요. 지난 모든 겨울이 실은 하나의 겨울인 거고, 우리를 불쑥 찾아오는 기시감들이 그걸 무한히 연결해주고 있달까요. 공간보다는 시간, 그곳이 실제로 어디인지보다는 끝없이 이어지는 겨울 속을 이동하는 여정이었다는 사실이 중요했어요.
에세이를 열자마자 눈길을 끄는 직접 여행지에서 찍으신 사진들이 인상깊습니다. 여행을 사진과 글 두가지 방식으로 기록하신 셈인데 두가지가 어떻게 다르다고 느끼시는지 궁금합니다.
사진은 보통 직접적이고 구체적으로 대상을 보여주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사진이 글보다 더 간접적이고 추상적으로 대상을 보여준다고 생각합니다. (단순히 어떤 사물의 정면을 기록하기 위한 목적으로 촬영한 것이 아니라면요.) 그걸 촬영한 사람이 셔터를 막 눌렀을 때 그 순간의 마음을 사진만으로는 우리가 알 수 있는 게 별로 없기 때문입니다. 느낌과 추측에 불과하죠. 사진에 의도가 있거나 없거나 늘 그 너머에 숨겨져 있어요. 심지어 나 자신조차도 내가 셔터를 막 눌렀을 때의 마음을 일일이 다 기억하지 못해요. 필름의 경우에는 간극이 생기기 때문에 더욱더 그럴 수밖에 없고요. 대부분의 경우에 사진보다는 글이 더 친절하고 설명적인 편이라고 생각합니다. 가끔 어떤 사진들은 시보다 더 시적이기까지 해요. 포착된 순간인 채로 머무는 영원의 단면 같아요. 그 안에서 뭔가를 발견하기라도 한 듯이 한 장의 사진을 꽤 오랫동안 들여다보게 만들죠. 글은 흐르고, 사진은 반짝이는 것 같아요.
매번 에세이마다 시적인 아름다움이 있는 문장들로 독자들에게 즐거움을 선물하고 계신데요, 이번 에세이에서 독자들에게 선물하고 싶은 한문장을 꼽아주실 수 있을까요?
Everything comes full circle. 모든 시작은, 제자리로 되돌아오는 여정의 시작이다. 시작이라 여기던 지점이 끝일 수도 있고 끝이라 여기던 지점이 시작일 수도 있다. 돌고 돌아서 결국 우리는 원점으로 되돌아온다. 사랑하는 섬을 떠나지 못하고 빙빙 도는 한 마리 새처럼, 마음의 나이테를 그리면서, 부유해졌다가 가난해졌다가…… 그런 것들에 잠시 초연해진다. (149쪽)
이번 에세이는 여행 에세이이기도 하지만 시간에 대한 작가님의 사유를 담은 에세이라고도 읽었습니다. 독자들이 이번 에세이를 어떤 마음으로 읽기를 바라시나요?
꼭 처음부터 읽지 않아도 좋겠습니다. 랜덤하게 아무 페이지나 펼쳐 읽어도 좋겠고, 기분에 따라 읽히는 만큼 단 몇 페이지만 읽고 덮어도 좋겠고, 적당히 건너뛰어가며 발췌해 읽어도 좋겠고, 역순으로 읽어도 좋겠고, 깊은 밤에 수면 유도제처럼 읽어도 좋겠고, 끝까지 완독하지 않아도 좋겠습니다. 황량한 겨울 속에 있고 싶을 때, 어느 쪽으로도 나아갈 수 없을 것만 같을 때, 시간 밖으로 홀연히 사라지고 싶을 때, 아끼는 돌 하나를 매만지듯 꺼내 읽어주면 좋겠습니다. 홀로 낭독하듯이 읽어주면 더 좋겠습니다.
사랑, 관계, 시간, 여행. 지금까지 다양한 주제의 에세이들을 출간해오셨는데요, 다음은 또 어떤 주제에 대한 이야기를 작가님의 목소리로 들을 수 있을지 기대가 됩니다. 계획하고 계신 새로운 작품이 있으실까요?
작년 11월 한 달 간의 덴마크 여행에서 찍은 디지털 사진들을 추려 가벼운 사진집 한 권을 구상하고 있습니다. 텍스트 없이 사진들만으로 엮은 한 편의 시 같은 책이 될 듯합니다. 그리고 평소의 단편적인 감상들을 모아 엮은 에세이 한 권이 또 다른 출판사에서 올해 안으로 출간될 예정입니다. 초기에 1인 출판으로 직접 출간했던 것들과 유사한 성격의 책이 될 듯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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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그저 이동하는 인간일 뿐이다 그렇게 생각하면 어느 때보다도 발걸음이 가벼워진다 하루의 대부분을 오직 이동하기 위해서 보낸다. 이곳에서 그곳으로, 그곳에서 또 다른 곳으로. 일정 시간이 지나고 나면 그곳이 이곳이 되는 일의 반복. 나는 거의 가만히 있고, 비행기나 열차나 자동차가 움직이는 것이지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