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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담의 추천사] 유선 청소기 사는 이야기

안담의 추천사 4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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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아무래도 강력한 발차기에는 뜻이 없어서 얼마 전부터 청소기를 찾아다녔다. 내가 원하는 건 한 독일 브랜드의 유선 청소기다. (2024.03.07)


옷에 동물털을 붙인 채로 돌아다니는 사람을 만나면 반갑다. 동물과 함께 사는 삶의 의미와 모양이야 각자에게 다를 테니까 감히 이해한다고 하긴 어려워도, 그 사람 또한 원하는 만큼 깔끔하게 하고 다닐 수는 없을 거라는 점이 마음 쓰인다. 지각이나 실언처럼 일견 털과는 관련 없어 보이는 실수를 하더라도 헤아릴 수 있다. 번듯한 인간으로 위장해야 할 결정적인 순간마다 끈질기게 따라붙는 지리한 생활감을 아는 사람. 내가 좋아하는 어떤 이는 남들 앞에서는 음식을 섭취하는 모습조차 보여주지 않으려는 천상계의 존재인데, 그 또한 땅에 붙박인 인간이라는 사실이 반려동물의 털 때문에 폭로될 때면 야속하단 생각이 든다. 그도 나도 문득 타인의 시선이 신경 쓰여 옷소매에서 두어 가닥의 털을 떼거나 털어보는 시늉을 할 때가 있다. 그게 무슨 소용이나 있다는 듯이. 아직 우리에게 일상의 통제력이라고 부를만한 게 남아있다는 듯이. 그러다 눈이 마주치면 우리는 웃는다. 무용한 손짓을 관두고 서로 다른 색의 털을 공기 중에 뿜으면서 각자 하던 일을 마저 한다.

나의 개에게서는 흰 털과 검은 털이 난다. 털의 길이는 아주 짧은 편이다. 민들레 홀씨처럼 둥실 날아다니기보다는 쌀겨처럼 우수수 떨어지고, 물체의 표면에 달라붙기보다는 박혀버린다. 개털은 어디든 간다. 개는 들어갈 수 없는 곳에도 간다. 접시에, 수건에, 신발에, 그리고 사람의 코와 입과 속옷 속에도. 집을 며칠만 방치해도 곳곳에서 자연 발생한 회색의 털뭉치를 볼 수 있다. 그 텁텁한 빛깔의 덩어리를 볼 때마다 새삼 배치의 중요성을 느낀다. 정확하게 똑같은 털을 배치해서 빚은 나의 개는 선명한 흑백 얼룩을 가진 아름다운 생명체이기 때문이다.

바닥에 주저앉아 개털을 모으고 있자면 곧잘 아빠 생각이 난다. 공간을 쓸고 닦는 일과 마음을 쓸고 닦는 일이 하나라고 그는 가르쳤다. 청소는 깨끗할 때 하는 것이다. 매일 닦은 바닥에는 닦을 게 없다. 그런 사람의 걸레는 더러워질 이유도 필요도 없다. 그의 철학 속에서 먼지란 앞서 존재한다기보다 사람이 한눈을 팔 때, 사람의 마음이 산란할 때 비로소 탄생하는 무엇처럼 느껴졌다. 어린이가 할 수 있는 즐거운 일을 다 제치고 나는 그저 바닥이 닦고 싶어서 꼭두새벽에 일어나보곤 했다. 밀대나 청소기는 쓰지 않았다. 손걸레를 들고 네발로 기는 일만이 정직하다. 무협 영화를 보면 경지에 오른 스님들은 무릎을 바닥에 대지도 않고 걸레질을 한다. 그런 영화에는 주로 무공을 전수받으러 왔는데 왜 청소 같은 허드렛일을 해야 하냐며 투덜대는 주인공이 나온다. 스승은 알고 주인공은 모른다. 그의 코어가 무수한 걸레질 속에서 차원이 다르게 강해지고 있음을… 나무처럼 뿌리 깊은 발차기의 비밀이 바로 하찮은 걸레질에 있음을….

나는 아무래도 강력한 발차기에는 뜻이 없어서 얼마 전부터 청소기를 찾아다녔다. 내가 원하는 건 한 독일 브랜드의 유선 청소기다. 동물을 키우는 사람이라면 제발 이 청소기를 구매해서 광명을 찾으라는 후기를 접한 이후로 쭉 그 청소기를 흠모해 왔다. 장판이 번쩍번쩍 들릴 정도의 흡입력에 맛을 들이면 다이슨을 필두로 한 대-무선 청소기의 시대적 흐름 따위에는 두 번 다시 휩쓸리지 않게 된다고 했다. 미감이 좋은 사람에게는 약간 괴로울 정도로 못생겼다는 후기도 크게 맘에 걸리지 않는다. 내 눈에는 가전제품이 예뻐지려고 노력할 때가 더 괴롭기 때문이다. 차라리 일 하나는 확실히 할 것 같은 투박한 모양새에 마음이 간다. 내가 생각하는 이 청소기의 유일한 단점이라면 유선 청소기치고는 눈물 나게 비싸다는 것뿐이다. 그래도 내가 가진 청소기를 계속 쓸 수는 없다. 나도 광명이란 걸 찾고 싶기 때문에.

지금 내 집을 지키는 낡은 무선 청소기는 수년 전 당곡사거리에서 동생과 같이 살 때 당근마켓으로 구한 것이다. 현재는 바닥에 개털을 고르게 펴는 기능만을 가지고 있다. 충전기를 떠나는 순간 배터리가 모자란다고 말하는 놀라운 끈기. 미약한 정전기에도 져버리는 딱한 흡입력. 내가 입으로 빨아들이는 편이 낫겠다는 확신을 주는 민망한 퍼포먼스. 그러나 이 기계가 집의 보물이던 시절도 있었다. 청소기를 직거래하던 날 판매자 쪽도 자매인 걸 보곤 기뻐했던 기억이 난다. 꼭 새것같이 깨끗하고 저렴했던 그 청소기는 우리집에 오고 나서 하루 동안 전혀 작동하지 않았다. 어느 콘센트에 전원 코드를 꽂아도 묵묵부답이었다. 우리에게 넘기기 직전까지도 작동 여부를 확인했다며 어쩔 줄 모르는 판매자에게 일단 기다려보겠다고 했지만, 기계를 기다린다는 말에 어떤 의미가 있는지는 알 수 없었다. 다음날부터 청소기는 그냥 잘 되기 시작했다. 물갈이를 했던 모양이야, 동생과 나는 말했다. 동생의 머리카락은 가늘고 길었고 내 머리카락은 두껍고 짧았지만, 그런 건 문제도 아니었다. 청소기에는 브러쉬에 말려들어 간 머리카락을 잘라주는 칼날이 내장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신통한 기계였다.

그토록 일을 잘할 거면서 새집에서 딱 하루를 파업했던 청소기의 사정을 따로 생각해 본 적은 없다. 내가 이해할 수 있는 것은 자연스러운 변화들뿐이다. 동생이 떠났다. 개가 왔다. 청소기가 낡았다. 이런 변화들은 자연스럽다. 어느 정도는 준비할 수도, 대처할 수도 있다. 고민 끝에 나는 새 청소기를 샀다. 광과 명을 얻기 위해 내가 무엇까지 버려도 되는지는 조금도 생각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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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ㆍ사진 | 안담(작가)

1992년 서울 서대문에서 태어났다. 봉고 차를 타고 전국을 떠돌다가 강원도 평창에서 긴 시간 자랐다. 미학을 전공했으나 졸업 후에는 예술의 언저리에서만 서성였다. 2021년부터 ‘무늬글방’을 열어 쓰고 읽고 말하는 일로 돈을 벌기 시작했다. 2023년에 활동가들을 초대해 식탁에서 나눈 대화를 담은 첫 책 《엄살원》을 함께 썼다. 가끔 연극을 한다. 우스운 것은 무대에서, 슬픈 것은 글에서 다룬다. 그러나 우스운 것은 대개 슬프다고 생각한다. 정상성의 틈새, 제도의 사각지대로 숨어드는 섹슈얼리티 이야기에 이끌린다. 존재보다는 존재 아닌 것들의, 주체보다는 비체의, 말보다는 소리를 내는 것들의 연대를 독학하는 데 시간을 쓴다. 주력 상품은 우정과 관점. 얼룩개 무늬와 함께 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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