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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완선의 살다보니 SF] 다음 중 올바른 마감은?
안… 늦을 수도 있지 않을까…?
한때는 나도 마감 하나는 잘 지킨다고 자부했다. 정말이지 화무십일홍이고 권불십년이었다. 아니, 10년이 뭐야, 5년이라도 권세를 누렸으면 좋았을 텐데…
심완선 SF 칼럼니스트가 일상에서 벗어난 딴생각을 풀어내는 칼럼을 연재합니다. 격주 화요일 연재. |
“아무래도 마감일에 늦는 분이 많이 계시죠. 저는 이해하지 못하겠지만.”
북토크 사회를 끝내고 집에 가는 길이었다. 어쩌다 보니 배명훈 작가와 마감 이야기를 했다. 업계 평판을 논하자면 배명훈은 마감을 잘 지키기로 이름을 쌓았다. 그는 정말로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어조로 말을 이었다. 출판계는 호흡이 느린 편이다. 예를 들어 직장인의 감각으로 보면 마감일에 몇 달씩 늦는 건 이상하다. 맞는 말이다. 하지만 그런 일이 일어난다. 아주 자주 일어나고야 만다. 나도 남 일인 줄만 알았는데 단행본이 차일피일 늦는 중이다. 마음이 쿡쿡 쑤셨다. 나는 찔리고 분한 마음에 눈물을 흘리며(과장법이다) 그 말을 꼭 인용해버리겠다고 큰소리를 쳤다(이건 진짜다). 작가들이 행하는 치졸한 앙갚음이다. 작가라는 직업의 장점은 경험을 글로 전환한다는 것 아니던가. 배명훈의 에세이집 『SF 작가입니다』에도 나오는 말이다. 좋아하는 책이라 첨언하면, 재미있으면서도 배울 점이 많다.
한때는 나도 마감 하나는 잘 지킨다고 자부했다. 정말이지 화무십일홍이고 권불십년이었다. 아니, 10년이 뭐야, 5년이라도 권세를 누렸으면 좋았을 텐데…. 재작년쯤 최지인 편집자를 만났을 때까지만 해도 분명 나는 자부심이 있었다. 내가 마감 자부심을 말하자 그날 최지인이 했던 말이 기억난다. “신인 중에 마감 못 지키는 사람 없어. 마감이 쌓이고 쌓여도 관리가 되어야 정말 잘 지키는 거지.” 편집자 경력 10년을 넘긴 사람다운, 현명하고도 경험이 우러나는 답이었다. 참고로 지난 연재 중 “자다가 보험에 들었더라고”에서 마지막_최종_막바지_진짜_마감에 간신히 원고를 보낸 이야기를 했는데, 그때 내 원고를 기다리던 편집자가 최지인이었다. 그 뒤로 최지인이 나의 마감 자부심을 언급한 적은 따로 없다. 그래도 내가 알고 하늘과 땅이 안다. 내가 부끄러운 소리를 했다는 것을…. 나는 역시나 눈물을 흘리며 최지인의 말도 인용하기로 했다.
인용을 이어보자면 금정연 작가의 말도 빼놓을 수 없다. 마감 자부심이 사라진 후로 나는 다음 단계에 들어섰다. 늦을 듯하면 미리 연락하는 사람이 된 것이다. 송구하게도 마감일보다 원고가 늦어질 듯한데 언제까지는 보내드리겠다고 메일을 쓴다. 그러다 보니 사과 메일 잘 쓰는 방법이 궁금해졌다. 어쩐지 마감에 허덕이는 데 일가견이 있어 보이는 금정연에게 요령이 있는지 물었더니 즉각 음울한 답변이 돌아왔다. “아뇨, 없어요….” 그저 진정성을 가득 담을수록, 죄송하다는 말을 아끼지 않을수록 좋다고 한다. 역시나 현명하고도 경험이 우러나오는 말이었다.
하지만 진정성이란 무엇일까. 인스타그램에서 서효인 시인이 한탄하는 동영상을 보았다. 그는 출판사 ‘안온북스’ 대표이기도 하다. 동영상에서 서효인은 ‘맨날 늦는 작가’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날이면 날마다 늦는데, 늦을 때마다 진심으로 미안해하는 거예요. 너무 죄송하다. 이건 그냥 습관적으로 하는 얘기가 아니라 너무 진심이야. 진심은 받아들일 수밖에 없잖아요. 그래서 생각했죠. 이렇게 진심이면 안 늦을 수도 있지 않을까?”
안… 늦을 수도 있지 않을까…? 정말 진짜 너무 진심이라면…? 마음속에서 메아리가 울리는 듯했다. 다행히 황예인 평론가 겸 편집자 겸 출판사 ‘스위밍꿀’ 대표가 위안을 주었다. “여러 가지 진심이 있는 거죠. 이것도 진심이고 저것도 진심인 거지.”
잠깐, 여기서 문제. 당신이 편집자에게 원고를 보내야 한다고 가정해보자. 당신은 언제까지 메일(혹은 우편)을 보내야 할까? 다음 중 올바른 마감 시한은?
① 마감일 오전
② 마감일 업무시간 내
③ 마감일 자정
④ 마감일 다음날 출근시간 전
⑤ 마감일 전날 밤
천선란 작가는 ① 오전에 보낸다고 답했다. 그래야 담당 편집자가 당일에 원고를 검토하니까. 간혹 원고를 일찌감치 완성해두었다가 마감일 전에 한 번 더 검토해서 보내는 사람도 있다. 앞서 언급한 배명훈이다. 그리고 내가 수군대는 어조로 배명훈의 이야기를 꺼냈더니 이경희 작가가 말했다. “저도 그런데.” 공조자를 원했던 나는 충격을 받았다. 그런 사람이 하나가 아니었단 말이야? 업계 평균을 상향평준화하는 위험한, 아니, 바람직한 사람이?
그러나 MBTI를 해도 성격 유형이 갈린다. 마감 유형도 다르다. 마지막에 몰아치듯 일할 때 효율이 급상승하는 사람이 있다. 미리 조금씩 일하면 효율이 나쁜 데다 결과물도 아쉽다. 주간지 마감을 20년쯤 하고 있는 이다혜 기자의 말이었다. 물론 그렇게 살면 나처럼 자꾸 울게 된다. 나는 솔직히 ④ 다음날 아침까지 보내는 경우가 압도적으로 많았다. 작가란 인간들은 금요일이 마감일이면 월요일 아침에 메일을 쓰곤 한다. 슬프지만 일어나고야 마는 일이다. 이런 자들이 마감을 준수하는 것보단 타임머신을 만드는 쪽이 빠를지도 모른다.
타임머신을 타면 사건이 벌어지기 전으로 돌아갈 수 있다. 세계 멸망을 막고, 치명적인 사고를 방지하고, 더불어 어쩌면 마감에 늦지 않을지도 모른다…. 『타임머신』을 쓴 H. G. 웰즈를 비롯해 SF 작가들은 내게 희망을 심어주었다. 또한 많은 SF 작가들이 내게 정직하게 진리를 일깨워주었다. 일어날 일은 일어나기 마련이다. 코니 윌리스의 『개는 말할 것도 없고』를 포함한 옥스퍼드 시간여행 시리즈에 따르면 시간은 회복탄력성이 강하다. 과거로 돌아가 역사를 수정한다 해도 어떻게든 일어날 일은 일어나고야 만다.
이경희의 『그날, 그곳에서』도 비슷하다. 주인공은 엄마가 죽기 직전으로 ‘다이브’하다 보면 엄마를 살릴 수 있으리라는 희망을 품는다. 재난이 일어났던 그 순간에 엄마가 달려가는 방향을 바꾸기만 하면 된다. 그러나 몇 번을 시도해도 다른 요인이 끼어들어 엄마는 원래 방향으로 달려가고 만다. 오히려 과거를 수정하려는 행위가 파국을 초래한다. 아이작 아시모프의 『영원의 끝』에서는 인류를 위해 역사를 손보는 작업이 인류 멸망을 부른다는 사실이 밝혀진다. 그러니까 멸망으로 치닫지 않으려면 수정을 멈춰야 한다. 일어날 일은 그대로 일어나게 두고, 미지의 미래로 나아가야 한다. 모든 사건을 통제할 순 없다는 사실을 겸허히 받아들여야 한다.
사실 마감 이야기에 눈물을 흘려봤자 다 유난이고 엄살이다. 마감일은 작가들 자신이 합의한 사항이다. 그날까지 원고를 완성하겠다고, 앞으로 일어날 일로 만들겠다고 스스로 정한 내용이다. 그럼 시간여행을 계획할 시간에 차라리 성실하게 일해야 한다. SF 작가인 옥타비아 버틀러는 마감에 대해 단호하게 말한다.
“일을 하는 것뿐 아니라 일을 완성하는 게 정말 중요해요. 계약서에는 마감일이 적혀 있고 그건 내 마감일이니까요. 제가 언제 그 책을 내놓을 수 있을지 정하고, 그 날짜를 상대방이 계약서에 적게 하거나 내가 직접 적는단 말이죠. 당연히 그 마감을 맞추는 건 중요해요. 그러지 못한다면, 작가로서 뭘 할 수 있겠어요? 그러니까 제 모든 단점과 기벽 등등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그건 일을 완성하는 문제예요.”(『옥타비아 버틀러의 말』, 127쪽.)
맞는 말을 보니 왜 또 눈물이 날까(과장법이다). 변명할 말은 많다. 마감을 지키기 힘든 이유 하나는 지킬 마감이 많기 때문이다. 마감이 많은 이유는 그래야 작가의 생계가 유지되기 때문이다. 원고료가 올라가면 숨 가쁘게 마감을 치르거나 다른 직업을 병행할 필요가 줄어든다. 글을 읽는 수요가 늘어나면 원고료가 올라간다. 다시 말해, 사람들이 책을 많이 사면 작가들의 마감을 방해하는 요소가 하나 사라진다. 나도 눈물을 덜 흘릴 수 있다.
마감 호들갑은 어떤 관점에서는 배부른 투정이다. 한국 예술인의 평균 수입은 처참하게 슬픈 액수다. 작년 말에 나온 예술인실태조사에 따르면, 1년간 예술활동 수입이 0원인 사람이 43%, 5백만 원 미만은 30%였다. 예술인으로 활동하는 대다수가 마감에 시달릴 기회조차 얻지 못한다. 문학으로 최저임금 이상을 받는다면 그 사람은 상위 10% 내에 들어간다. 진짜로 울 뻔했다. 송승언 시인은 전업 작가가 되는 일에 관해 이렇게 썼다. “운이 따라줄 때까지 열심히 해라. 아니면 그냥 그 운을 복권에 쓰든가.”(『먹고 살고 글쓰고』, 67쪽.) 하지만 송승언은 “문학이라는 십자가”에 대해서도 언급했다. 사랑하는 마음으로 고난의 길을 걷는 일에 대해서. 그러니까 사랑에 눈먼 나는 송승언의 말을 취사선택해서 받아들이기로 했다. 다 걸러내면 이렇게 된다. “열심히 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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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F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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