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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아랑 칼럼] 절대로 개인적인 2023년의 추념 (上)

윤아랑의 써야지 뭐 어떡해 6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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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으론 즐겁게, 한편으론 괴롭게 올해 읽은 올해 출간된 책들의 목록을 들여다보기 시작했다. (2023.12.01)


지지난 주 <채널예스> 측에서 메일이 왔다. 주워 담지 못할 생각을 흩뿌리느라 마감을 번번이 어기는 나로선 이젠 랩탑에 메일 알람이 뜨는 순간 죄책감에 얼굴을 싸매 쥐고 만다. 다행히도, 메일은 독촉이나 컴플레인 대신 ‘올해의 책’ 결산에 대한 제안을 담고 있었다. 2023년 국내 출간된 책 중 가장 좋았던 한 권을 꼽아달라는 것이다. 한 3초 동안 안도의 한숨을 내쉰 후, 나는 금방 다시 이마를 짚으며 고민에 빠졌다. 그 걸출한 책들 중 단 하나만 얘기해야 한다니, 나 같은 오타쿠한테 그건 너무 힘든 이미지잖아… 이런 선택의 제안은 언제나 달콤한 동시에 곤란하다. 그렇게 나는 한편으론 즐겁게, 한편으론 괴롭게 올해 읽은 올해 출간된 책들의 목록을 들여다보기 시작했다. 그러다 문득 든 생각, ‘어차피 이것도 채널예스의 기획인데, 거론할 수 없는 책들은 <써야지 뭐 어떡해>로 간단히 얘기해 봐도 되지 않을까? 그리고 그 김에 약간 이른 2023년 결산을 주제로 잡아도 되지 않을까?’ 이번 회차를 위해 쓰고 있던 원래의 글은 잠시 덮어두기로 했다. 그리고 이 때문에, 여러분은 지금 이 글을 읽게 된 것이다.

약간 쉬어가는 느낌으로 편히 얘기해 보겠다. 내게 올해는 정말 다시없으리라 단언할 수 있을 만큼 고단하고 고단한 해였다. 무엇보다 엄마가 돌아가셨다. 넓게 보면 6년, 좁게 보면 1년 동안 암으로 인한 투병 생활을 이어가고 계셨는데, 그 고통스러운 과정에 많이 지치셨는지 결국 올해를 넘기지 않고 떠나셨다. 마지막 1년의 거의 대부분을 나는 엄마의 간병에 할애했다. 그 과정을 채운 고된 경험들은 나에게 영혼에 대해, 장애에 대해, 살의에 대해, 돌봄에 대해 처음부터 다시 생각하기를 강경히 요구했다. 죽음 자체에 대해선 (남들이 좀 이상하게 볼 만큼) 덤덤했지만, 그건 엄마가 당장 내일이라도 죽을 수 있다고 1년 내내 각오를 되새기며 생활했기 때문이었다. (이 외에도 이런저런 골치 아픈 사건들이 틈틈이 터졌지만 여기서 편히 얘기할 거리는 아니다) 내게 2023년을 돌아보는 건 결국 이렇게 죽음에 얽힌 문제들을 마주하는 일일 수밖에 없다.

변명하려는 건 아니지만, 이런 사정이 크게 작용해 올해는 영화나 전시를 거의 보러 다니지 않았다. 보러 다니는 것 자체가 여러모로 어려운 나날이기도 했고, 간병으로 병원에 상주하는 김에 책을 읽거나 사회복지사 자격증 공부를 하는 데 열중하기도 했으니 말이다. 그래서 그런지, 지독한 병렬 독서 습관에도 불구하고 완독한 책의 수는 2020년 이래 가장 높았다. 불행 중 그나마 다행이었단 생각이 든다. 한편으론 짬이 날 때마다 최대한 많은 일을 해치웠는데, 타이밍 (안) 좋게도 올해는 내가 비평가 딱지를 단 첫 3년 중 가장 바쁜 해이기도 했다. 2권의 책에 공저자로 참여했고, 출판사 쪽프레스와 함께 만화 비평에 관한 2번의 모임을 진행했으며, 여러분이 지금 읽고 계신 칼럼 기획 <써야지 뭐 어떡해>를 연재하고 있고, 내일인 12월 2일엔 MBC의 옴부즈맨 프로그램 〈탐나는 TV〉에 패널 중 하나로 출연한다. (여기엔 각각 발표한 평론이나 대외 일정은 셈하지 않았다. 솔직히 말하면 기억이 잘 안 난다…) 돼지 목에 진주목걸이라는 오랜 비유가 생각나지 않을 수 없지만, 하여튼 이 부족한 사람에게 좋은 기회를 나눠들 주셨으니 그에 보답하고자 나름 최선을 다했(다고 혼자 생각한)다. 마감을 제때 지킬 수 있는 능력만 더해지면 좋으련만, 그건 내 노력으로 어떻게든 충당해야 할 부분이리라…

만약 올해 출간된 책이라는 조건이 없었다면 나는 『김우창 전집 완간 세트』를 가장 먼저 언급했을 것이다. 작년 12월 도서관에서 별생각 없이 『문학과 그 너머』를 집어 들었다가 받은 충격엔 벼락의 비유도 충분치 않다. 내가 하고는 싶으나 모든 면에서 한참 부족하여 할 수 없던 얘기들을 그는 훨씬 앞서서, 훨씬 영민하고도 우둔하게 풀어내고 있었다. 아니, 이런 비교조차 그의 사유 앞에선 부끄러워진다. 약간 과장을 더해, 내가 ‘주체성’이란 문제계에 여전히 몰두할 수 있는 데엔 뒤늦게라도 김우창을 읽기 시작한 덕이 크다. 물론 그의 (양가적인 의미에서) 선비 같은 면모는 내가 따라할 수 없으며 실은 따라할 생각도 없다. 반대로 나는 이런 생각을 갖고 있다; 어쩌면 김우창의 체계 안에서, 다름 아닌 김우창의 언어를 통해, 김우창의 사유를 퀴어링할 수 있지 않을까? 김우창이 ‘실은’ 불온했다고 말하는 것 말고, 잠재적인 것으로 남은 김우창의 불온한 ‘표면’을 활성화하는 것 말이다. 아직은 막연한 수준이지만, 나는 이 생각을 계속 붙잡아보고 싶다. 김우창을 읽고 있다는 말에 전집 전부를 선물로 보내주신 신새벽 편집자 덕분에 더더욱 그런 의지가 생긴다. 이 친애하는 동료에게 이 자리를 빌려 거듭 감사를 전한다. 



슬슬 주어진 조건으로 돌아가야겠다. 올해 나의 결정적인 책은 단연코 빌 워터슨의 『완전판 캘빈과 홉스 세트』다. 이 전설적인 ‘미국 최후의 카툰’을 드디어 제대로 된 모습의 한국어 판본으로 만날 수 있게 됐다는 건 정말 (아쉬운 부분이 아예 없는 건 아니지만 그럼에도) 축복이 아닐 수 없다. 인식론적 방법론에 있어 상상력과 사유가 서로 별개가 아니며 그 사이에 우열이 있는 건 더더욱 아니라는 도발적인 통찰을 대범하고도 천진난만하게 소화해 내는 이 걸작은 지금보다 더 다양한 독자들에게 더 다양한 방식으로 소개되어 마땅하다. 하지만 이와 별개로, 내가 가장 애정을 갖고 대한 책이라면 물론 크리스 웨어의 『러스티 브라운』일 수밖에 없다. 상반기를 여기에 ‘꼴아 박았다’고 할 만큼 이 만화는 올해 활동에서 큰 비중을 차지했다. 이미 다양한 창구를 통해 말을 늘어놓았으니 여기선 말을 아끼겠으나, 아직 『러스티 브라운』을 알지 못하는 당신께는 이 만화가 현재진행형인 예술가의 최고의 작품 중 하나라는 것만큼은 말씀드리고 싶다.

최현숙은 올해 (공저를 포함해) 서로 다른 장르의 책 3권을 연달아 내놓았다. 그 책들의 맥락 안에서 읽은 『두려움은 소문일 뿐이다』엔 인상깊다는 말로도 형언하기 어려운 감동이 있었다. 호쾌한 솔직함과 단호한 사려 깊음으로 자신의 삶을 향수 없이 되돌아보는 그의 태도는 요즈음의 이미지 생태계에서 정말이지 급진적으로 다가온다. 안희제의 『망설이는 사랑』은 이미 본 기획에서 한 번 다룬 적이 있지만, 『두려움은 소문일 뿐이다』와 비슷한 맥락에서 ‘정치성’이란 말을 재고하게끔 한다는 점에서 잠시라도 한 번 더 거론할 만하다. 안 읽었다면 지금이라도 구매하시도록. 지독하고 중독성 있는 유머로 가득 찬 안드레아 롱 추의 『피메일스』에는 개인적으로 고개가 격하게 끄덕여지는 부분과 고개가 격하게 돌아가는 부분이 각각 절반씩 있었는데, 돌아보니 독자를 그런 격렬한 독서로 이끌길 주저하지 않는 대범함이 ‘글쟁이’로서 참 본받을 만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올해 조지 손더스의 책이 두 권이나 번역 출간되었다는 건 꽤나 신기한 일이다. 하지만 손더스의 열렬한 독자인 나에겐 그 이전에 몹시 즐거운 일이기도 했다. 단편집인 『패스토럴리아』와 ‘강의록’인 『작가는 어떻게 읽는가』에는 동시대 미국의 최전선에 있는 이 소설가가 어떤 소설관을 갖고서 세계를 더듬는지가 각자의 방식으로 뚜렷하게, 또 강렬하게 나타나 있다. 언젠가 한국에도 손더스 붐이 올 거라고 기대를 걸어본다. 

마찬가지로 (한참 편집 후반 작업 중이었던) 욘 포세의 『멜랑콜리아 I-II』가 기막힌 타이밍으로 노벨문학상 특수를 맞은 것 역시 신기한 일이다. 출간을 기획한 유상훈 편집자께서 직접 책을 보내주셨는데, 장례식장에서 밤 새면서 읽기 참 좋은 책이었다. 많은 이들이 <르몽드>의 평을 따라 포세를 “21세기의 사무엘 베케트”라고 부르고 있지만 나는 좀 다른 생각이 있다. 그를 읽기 시작한 지 아직 2년도 안 됐고, 소설가이자 극작가라는 장르적 공통점만 두고 평자들이 간단하게 그런 비유를 쓰는 건 아니란 것도 알긴 하지만, 나는 욘 포세의 언어가 90년대 이스트 코스트 힙합의 선율과 비슷한 성질을 가졌다고 ‘감히’ 느낀다. 노토리어스 B.I.G.나 우탱 클랜 같은 이들이 들려준, 시간의 이음새를 총체적으로 뒤틀어버리는 기묘한 리듬과 어지러운 플로우. ‘현자’라는 퀘퀘한 수사를 버려야 나타나는 진면목이 이 세상엔 분명 있다고, 나는 여기서도 생각하고 만다. 

그런데 아뿔싸, 본격적인 책 얘기는 이제 막 도입을 넘어간 수준인데 글이 너무 길어져 버렸다! 이은용의 『우리는 농담이(아니)야』나 클라우스 뮐한의 『현대 중국의 탄생』은 아직 언급도 못 했는데 이럴 수가. 역시 “이런 선택의 제안은 언제나 달콤한 동시에 곤란하다.” 간단히 애기를 하려고 해도 간단한 수준에서 끝나지 않으니… 그대들은 쓰고 있는 글이 당장 안 끝날 것 같을 때 어떡할 것인가. 나라면 억지로라도 상편과 하편으로 나누는 걸 택하겠다. 그러니 여러분이 인내심을 발휘해주시길 부탁드리며, 나머지 결산은 하편에서 풀어놓으려 한다. 4주 말고 2주 후에 뵙겠습니다… 욕심이 많아 죄송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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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윤아랑(평론가)

비평가. 대중문화와 시각예술을 주로 다루며, 주체성과 현실 감각을 문제 삼는 문화비평에 관심이 있다. 지은 책으로 『뭔가 배 속에서 부글거리는 기분』(2022), 『영화 카페, 카페 크리틱』(공저, 2023), 『악인의 서사』(공저, 2023)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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