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아랑 칼럼] 적극적인 물러남 –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
아마도, 2023년을 통틀어 가장 오해받고 있는 예술작품은 바로 미야자키 하야오의 신작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일 것이다.
글ㆍ사진 윤아랑(평론가)
2023.1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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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도, 2023년을 통틀어 가장 오해받고 있는 예술작품은 바로 미야자키 하야오의 신작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일 것이다. 누군가는 전쟁의 폐해와 책임을 외면한 채 우화의 영역에 틀어박혔다며 비난하고, 누군가는 작품의 결정적인 메시지를 “나는 이렇게 살아왔다. 그럼 이 이후의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라 요약하며 자신의 세계관을 직접 정리하려는 미야자키의 태도가 감동적이라고 상찬한다. 안타깝게도 둘 모두 쓰레기통에 내던져도 무방한 생각들이다. 전자는 ‘옳은 재현의 형식’을 미리 상정한 채 작품을 논하는 과장된 목적론적 태도라는 점에서, 후자는 작가의 삶 혹은 진행된 역사를 전적으로 반영하는 모종의 ‘여담(Trivia)’으로나 작품을 대하는 그릇된 맥락중심적 태도라는 점에서 그러하다.


내 생각에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하여 가장 통렬하고 적확한 평을 남긴 사람은 오시이 마모루인데, 그는 〈시끌별 녀석들〉과 〈공각기동대〉 애니메이션판의 창작자로도 유명하나 한편으론 미야자키의 오랜 악우요 (타카하타 이사오와 비슷할 만큼) 창작자로서의 그에 대한 예민하고 집요한 평자로도 유명하다. 미야자키가 새 작품을 내놓을 때마다 부속행사 마냥 오시이의 단독 인터뷰가 마련될 정도이니 굳이 더 부연할 필요는 없으리라. 그리고 역시나 이번에도, 오시이는 그렇게 마련된 인터뷰를 통해 작품에 대한 평을 공적으로 남긴 것이다. 인터뷰의 시작부터 거침없는 단언이 튀어나온다.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는 영감의 10년 묵은 망상영화, 다른 누군가가 아닌 전적으로 자신만을 위한 영화다!’ 물론 오시이 특유의 사캐즘으로 치부하고 넘어갈 수도 있겠으나, 여기에 이어지는 것이 무자비한 희롱이 아닌 애정 어린 기롱(譏弄)임을 염두에 두면 이런 단언은 섣불리 예상된 바와는 좀 달리 이해될 필요가 있을 것 같다.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를 옹호하고자 한다면 바로 그런 성격을 깔고 들어가는 한에서 옹호해야 한다는, 강경한 요청의 아포리즘으로 말이다.


이 작품이 유독 낯설고 난해한 애니메이션으로 느껴지는 건, 물론 ‘말이 되게’ 잘 짜인 서사도 없고 나중에 굿즈로 나온다면 사고 싶어질 만큼 매력적인 캐릭터도 거의 없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독특한 리듬의 시공간 구성이 작품 전반을 가로지르며 ‘반복’되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말하자면 상상적 3D랄까, 캐릭터가 나아갈 좌표의 레이어, 그 캐릭터가 행동하고 있는 레이어, 그리고 그 캐릭터가 모르게 그 레이어로 침투하려는 또 다른 캐릭터들의 레이어가 함께 역동적으로 움직이며 장면을 이루는 것이다. 시종 할멈들과 함께 복도를 걷는 장면에서 불쑥 나타난 사이 공간에 조용히 앉아있는 할아범, 어떤 전조도 없이 독자적인 숏이 먼저 나와서 뜬금없다는 느낌을 주는 키리코와 히미의 첫 등장, 마히토와 왜가리 남자의 뒤에 몰래 따라붙어 서스펜스를 자아내는 펠리컨과 앵무새 대왕 등. 전체적인 조망이 허용되지 않는 파편화된 공간들 속에서 ―우리는 저택의 전반적인 모습도, 큰할아버지의 공간이 분할되어있는 구체적인 양상도 보지 못했다― 이런 구성은 입체감을 넘어 기묘한 불안의 감각을 자아낸다. 미지의 영역에서 무언가가 내 쪽으로 엄습하고 침투할 수 있다는 불안.


한편 이런 구성의 연장선에서, 하나의 프레임 혹은 숏에 속한 사건들은 서로에게서 거의 찢어진 채로 동시에 펼쳐지곤 한다. 마히토가 불이 난 병원으로 달려갈 때엔 주변 풍경은 문자 그대로 일그러진 익명성을 띄고 있으며, 우츠노미야시에 막 도착했을 때에도 수채화처럼 그려진 배경은 캐릭터들의 신체와 자연스럽게 공존하지 못한다. 탑 너머 이세계에서 펼쳐지는 자연풍광도 〈바람계곡의 나우시카〉나 〈모노노케 히메〉의 그것과는 달리, 생명과 죽음이 뒤섞인 역동적인 '힘'이 아니라 생기 없고 (일본 영화사상 최대의 제작비가 들어갔다는 화려하고 세밀한 작화에도 불구하고) 어딘가 황량해보이는 빈약한 미장센에 불과하다. 큰할아버지의 정원에 들어선 앵무새들이 아름답다며 눈물을 흘리는 것은 거꾸로 말해 자신들이 이 장소를 본 적도 없고 소유한 적도 없었다는 탄식일 게다.


허면 이렇게 말해보면 어떨까. 전쟁 중인 일본의 세계이든 돌 속의 이세계든 둘 다 존재자들을 온전히 품고 유지되는 데에 실패했으며, 마히토를 비롯한 캐릭터들은 그 실패를 절대 자기 힘만으론 만회할 수 없을 거라고 말이다. 히미의 불길에 치명상을 입은 펠리컨은 마히토에게 말한다. '우리가 이 세계에서 먹을 수 있는 건 와라와라 밖에 없다, 그것 말고는 먹을 수 있는 것도 할 수 있는 것도 없다. 여기는 저주받은 바다다.' 이세계가 초현실적인 곳으로 묘사됐다고 해서 많은 이들이 착각하지만, 이세계 역시 전쟁 중인 일본과 다를 바 없이 내재적으로 완전히 일그러진 세계일 뿐이다. 그리고 이세계를 지금처럼 구축한 큰할아버지의 욕심과 한계는 분명 그런 일그러짐에 일조했을 것이다. 요컨대, 마히토에게는 서로 다른 방식으로 몰락하고 있는 세계들만이 선택지로 주어져있다.



주어진 세계들의 몰락이란 모티프 자체는 하야오에게 있어 전혀 새로운 게 아니다. 여기서 중요한 건 그 세계들이 ‘다른’ 회복의 가능성도 없이 쭉 몰락을 향하고 있다는 사실이며 또한 그런 현상이 시각적 기호와 몸짓에 이미 기입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돌이켜보자, 마히토는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의 치히로나 〈하울의 움직이는 성〉의 소피처럼 세계에 근본적인 변화(를 위한 의지)를 이끌어낸 캐릭터인가? 아니, 사실 그는 영화 내내 무력한 '여행자'일 뿐이다. 이세계를 순식간에 붕괴시킨 것도 결론적으론 앵무새 대왕의 욕심과 경솔함이지 않았는가? 심지어 마히토가 방을 나서는 영화의 마지막 장면, 아마도 애니메이션 사상 가장 시시한 엔딩이라도 해도 좋을 그 장면은 마히토 역시 이세계에서의 모험을 모두 잊어버렸을지 모른다는 생각을 불러일으킨다. '성장서사'의 외양을 두르고 있긴 하나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는 철저한 '안티-성장소설'의 프로세스를 갖고 있는 것이다. (사실 〈마녀 배달부 키키〉 이후 하야오는 쭉 어느 정도의 안티-성장서사 내지는 메타-성장서사를 만들어왔다 해도 무방하다)


앞서 상상적 3D라 표현한 기묘한 침투의 감각을 이런 맥락에서 생각할 수 있을 터인데, 미지의 영역에서 무언가가 엄습한다는 불안은 곧 자신의 행위성의 한계를 자각하는 것과 맞닿아있기 때문이다. 〈바람이 분다〉에서 자기 주변의 세계에 도통 집중하지 않는, 마치 칸트적 악한을 연상시키는 무시무시한 자제의 인간인 지로를 통해 세계의 필연적인 몰락을 반어적으로 보여줬던 하야오는, 이제 캐릭터와 세계가 서로 영향을 긴밀히 주고받을 수 없을 만큼 몰락한 지경을 자신의 "망상" 안에서 직시한다는 과제를 스스로에게 부여하고 수행한다. (그러니 과대망상적이라 할 수밖에 없는 이세계를 굳이 수년에 걸쳐 그리고야만 괴벽 정도는 이해해주도록 하자)


그렇기에, 하야오가 르네 마그리트나 에도가와 란포처럼 영향을 받은 예술작품들과 자신의 전작들을 이번 작품에서 인용했다고 말하는 건 기껏해야 절반의 정답에 그친다. 그는 '내 경험이 여전히 예전처럼 유효하긴 한 걸까'하는 회의감과 함께 그것들을 변주하고 있는 것이다. 숲 속으로 들어가는 <이웃집 토토로>의 장면은 기대감 대신 긴장감으로, 죽은 자들의 행렬이 이어지는 <붉은 돼지>의 장면은 슬픔 대신 신비함으로, 위험을 벗어난 남녀가 힘껏 껴안는 <하울의 움직이는 성>의 장면은 사랑 대신 작별의 예감으로 변주된다. 외설적인 '이면'이 앞서는 장면들 사이에는 이런 불안이 통주저음으로써 흐르고 있다. 세계와 캐릭터 사이의 관계가 찢어졌듯, 기존의 장면과 몸짓은 전혀 다른 감각을 발산한다.


하지만 섣불리 암울한 결론으로 향하지는 말자. 무엇보다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가 그런 작품이 아니니 말이다. 몰락하긴 매한가지인 두 세계 사이에서 마히토는 전쟁 중인 일본을 선택한다. 자신은 악의를 갖고 있기 때문에 큰할아버지의 '이상적인' 이세계를 유지할 수 없으며, 대신 일본에 돌아가 친구를 만들겠다는 것이다. 방점은 이런 적극적인 물러남이 (회피나 ‘대일본제국’에 대한 충성이 아닌) 책임감의 발로라는 사실에 찍혀야 한다. 살아가라는 말은 "당신은 아름다워"(〈모노노케 히메〉)서 하는 말이 아니며, 오히려 당신의 모든 경험을 감내하고 책임지되 포기하지 말고 할 수 있는 것을 하라는, 차라리 저주에 가까운 요청이다. 바로 그 요청을 마히토는 힘껏 받아들이고 있다. 내가 어쩌지 못할 곧 몰락할 세계라고 해도 내가 책임질 수 있는 게 조금이라도 있다면 거기로 가겠다는 용기, 탈정치적 비관을 넘어선 정치적 낙관의 용기. 이 작품에서 아름다운 게 있다면 바로 그 용기일 터이다.


1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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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11.18

좋은 칼럼 잘 읽었습니다. 그런데 초입에서 언급하신 '안타깝게도 둘 모두 쓰레기통에 내던져도 무방한 생각들이다.' 같은 강한 비판이 뒤의 내용들을 감상하는 데 방해가 되는 것 같아요. 저도 별로 그런 감상들을 좋아하지는 않지만, 하야오 본인도 관객 반응에 크게 신경 쓰지 않을 것 같은데 우리도 그냥 그런 반응이 있겠거니 하고 넘기면 어떨까 싶습니다^^ 칼럼 마지막 단락이 특히 인상적입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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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아랑(평론가)

비평가. 대중문화와 시각예술을 주로 다루며, 주체성과 현실 감각을 문제 삼는 문화비평에 관심이 있다. 지은 책으로 『뭔가 배 속에서 부글거리는 기분』(2022), 『영화 카페, 카페 크리틱』(공저, 2023), 『악인의 서사』(공저, 2023)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