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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중혁의 북커버러버] 거대한 언어의 세계로 들어가는 작은 출입구 - 『문학의 공간』

마지막 화 - 『문학의 공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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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머릿속에선 금속의 빛과 금속에서 느껴지는 빛과 드라이포인트의 무미건조한 날카로운 검은 선이 충돌했지. 그 책을 집을 이유는 그것만으로 충분했어." (2023.10.05)


격주 목요일, 소설가 김중혁이 좋아하는 북커버를 소개하는 칼럼
'김중혁의 북커버러버'를 연재합니다.





히로세 나나코 감독의 다큐멘터리 영화 <책 종이 가위>는 일본의 ‘명장’ 북디자이너 기쿠치 노부요시의 작업 현장을 다루고 있다. 제목에서 알 수 있듯 컴퓨터 프로그램으로 북커버를 디자인하는 사람이 아니다. 기쿠치 노부요시는 종이를 손으로 구기고 가위로 자르고 풀로 붙이면서 1만 5천여 권의 책표지를 만들었다. 서체를 고르고 미세하게 위치를 옮기고 조금씩 다듬어 가는 작업 과정을 보면 ‘저렇게까지 할 일인가’ 싶다가도 ‘저렇게 섬세하게 작업을 했으니 장인인 거겠지’ 하는 마음이 든다.

책을 대하는 기쿠치 노부요시만의 다양한 의견이 재미있는데 그중에서도 ‘こしらえる(코시라에루; 차린다)’라는 표현의 해석이 인상적이었다. 할머니가 자주 쓰던 에도 사투리인데, 책을 디자인하는 것은 ‘차리는 행위’와 가깝다는 얘기다.

“할머니가 썼던 말이야. ‘엄마가 없으니까 대신 할미가 점심 차려줄게. 간식 차려줄게’ 식으로, 내 안에 스며든 말이지. …… (중략)…… 누군가를 위해 하는 행위니까, 만드는 건 내가 하지만 타인 없이는 성립이 안 돼. 디자인도 타인을 위한 거야.”

기쿠치 노부요시 디자이너가 종이를 자르고 붙이면서 표지를 만드는 방식은 밥상을 차리는 것과 비슷하다는 생각도 든다. 책 앞에서 발길을 멈추고 ‘책을 읽어볼까?’라는 생각을 하게 만들고, 최대한 맛있게 책을 읽을 수 있도록 북커버를 만드는 것이다. ‘차린다’는 것은 상대에게 내가 줄 수 있는 것들을 다 꺼내 놓는 일이고, 정신적이든 육체적이든 배부르게 해주고픈 소망을 담는 일이다.

‘차린다’라는 단어를 떠올리며 서점에 있는 책의 표지들을 보니 이상한 상상을 하게 된다. 음식 관련 서적도 아닌데, 꺼내 놓은 책들이 모두 밥상으로 보인다. 미니멀하게 제목만 커다랗게 적힌 표지는 원푸드 다이어트를 추구하는 독자를 위한 밥상 같고, 다양한 요소를 어지러울 정도로 욱여넣은 표지는 비빔밥을 닮은 것 같고, 다양한 색을 뒤섞은 표지는 아이스크림이 놓인 디저트 밥상 같다. 서점에 있는 수많은 책은 거대한 차림표와 같은 거였다.

기쿠치 노부요시의 삶에는 중요한 작가가 한 명 있다. 그는 프랑스의 소설가이자 철학자인 모리스 블랑쇼의 책 『문학의 공간』을 읽고 북디자이너를 꿈꾸게 되었다. 서점에서 구경을 하고 있는데 멀리 있는 책표지의 제목에 입힌 금박이 반짝였고, 책을 집어 드는 순간 인생이 바뀌었다.

“내 머릿속에선 금속의 빛과 금속에서 느껴지는 빛과 드라이포인트의 무미건조한 날카로운 검은 선이 충돌했지. 그 책을 집을 이유는 그것만으로 충분했어.”

기쿠치 노부요시는 (『문학의 공간』 표지를 만든) 코마이 테츠로 디자이너가 정성껏 차린 금박 음식에 매료되어 그 책을 맛나게 섭취한 다음 평생 북디자이너로 살게 되었다. 70대가 된 기쿠치 노부요시는 모리스 블랑쇼의 책을 처음 만난 지 50년 만에 『끝없는 대화』의 일본어 초판을 작업하게 됐다.

“이번에 이 글과 대화함으로써 디자인을 출발점으로 되돌릴 수 있어요.”

기쿠치 노부요시에게 모리스 블랑쇼는 터닝 포인트인 셈이다. 인생의 방향을 바꾸게 해주었고, 반환점을 마련해주었다. 모리스 블랑쇼의 철학에서 언어의 의미를 인용하기도 한다. 말은 작가의 무의식에서 퍼져 나오는 것이기 때문에 작가의 것도 아니고, 독자의 것도 아니며, 작가의 말을 독자가 읽는 순간 그 말을 새롭게 해석하게 되므로, 말은 그 자체의 생명력을 가지고 있다는 생각을 이야기할 때 기쿠치 노부요시는 행복해 보였다. 몰두하던 책표지 작품이 자신의 손을 떠나 독자에게 다가갈 때 새로운 생명을 얻게 되길 바라기 때문에 그런 표정을 짓는 게 아닐까. 어쩌면 모리스 블랑쇼의 아래와 같은 문장에 밑줄을 그었을지도 모르겠다.

내가 홀로 있을 때, 난 홀로이지 않다. 그러나 이 현재 속에서 나는 이미 어느 누구의 형태로 나에게 되돌아온다. 누군가가 있다. 내가 홀로 있는 곳에. 홀로 있다는 사실, 그것은 나의 시간이 아닌, 너의 시간이 아닌, 공동의 시간이 아닌, 하지만 어느 누구의 시간인 죽어 버린 시간에 내가 속해 있다는 것을 말한다. 어느 누구는 아무도 없을 때에 여전히 현전하는 자이다. 내가 홀로 있는 곳, 그곳에 나는 있지 않다. 그곳에는 아무도 없다. ( 『문학의 공간』 이달승 옮김, 그린비)

작가는 문자를 조합하여 책을 쓰고 이야기를 만들고, 북디자이너는 책표지를 잘 차려서 서점에 내보내고, 책을 사랑하는 독자는 먹음직스러운 표지에 홀려서 책을 읽고, 그 속에 들어 있는 의미를 사랑하여 여러 사람에게 이야기하고, 책에 대해서 말하고, 거듭 말하는 순간에, 우리는 어디에 있을까. 우리는 어디에도 없고, 보이지도 않으며, 아주 작고 작은, 우리는 그저 거대한 언어들의 일부일 뿐인지도 모르겠다. 북커버는 거대한 언어의 세계로 들어가는 작은 출입구일 것이다. 


문학의 공간
문학의 공간
모리스 블랑쇼 저 | 이달승 역
그린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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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김중혁(소설가)

소설 쓰고 산문도 쓰고 칼럼도 쓴다. 『스마일』, 『좀비들』, 『미스터 모노레일』,『뭐라도 되겠지』, 『메이드 인 공장』 등을 썼다.

문학의 공간

<모리스 블랑쇼> 저/<이달승> 역20,700원(10% +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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