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상 특집] 오늘의 판권 문의가 도착했습니다
<월간 채널예스> 2023년 9월호
‘출간 전 영상화 확정!’ ‘드라마 의 원작 소설!’이라는 말들이 쓰여 있는 책의 띠지 문구를 본 적이 있는지? 출판사가 이런 소개 문구를 만들기까지 다양한 콘텐츠 전문가들 사이에서는 어떤 일들이 벌어지고 있을까.
〈반지의 제왕〉 영화파 vs 『반지의 제왕』 소설파. 이 세상 사람들을 두 부류로 나눈다면 당신은 어디에 속하는가? 어느 쪽에 더 이끌리는지 답하기 위해 영화를 재생하고 책장을 넘기며 시간을 보낸다. 그러는 동안 우리는 이야기와 또 한 번 사랑에 빠지고, 애초에 답을 찾고 싶었던 질문이 무엇이었는지는 자연스레 잊게 된다. 매력적인 캐릭터, 독특한 설정, 결말까지 내달리는 몰입력을 가진 문학 작품들이 부지런히 드라마화·영화화되고 있는 요즘, 우리에게 필요한 건 경계를 넘나들며 이야기를 즐길 마음가짐 하나뿐이다. |
출판사는 작가의 책을 펴내고 홍보할 뿐 아니라, 틈틈이 이야기의 영상화 가능성을 검토한다. 어떤 이야기는 영화, 드라마, 웹툰, 게임 등 2차 콘텐츠로 가공되어 더 많은 감상자들을 만날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책이 2차 콘텐츠로 가공될 수 있다는 출판사의 계약 조건에 작가가 동의한 경우에 한해서다. 책 속에 담겨 있고 다른 방식으로 뻗어나갈 수 있는 이야기를 ‘원천 IP(지식 재산권)’라고 부른다. 그런데 모든 출판사에 IP나 2차 저작권을 전담하는 팀이 있는 것은 아니며 혹 있다고 해도 팀 이름이 다르듯 업무 범위 또한 저마다 다르다. 이를테면 동아시아는 콘텐츠개발팀, 문학동네는 IP개발팀이 관련 업무를 담당하며, 은행나무는 저작권팀과 총괄 이사가 공동으로 IP를 검토하고 관리한다.
요즘 출판사들은 좋은 이야기가 다양한 매체로 확장될 가능성을 방송사나 영상 제작사 PD가 알아봐 주기만을 기다리지 않는다. 책을 만드는 순간부터 영상화를 염두에 두는 것이다. 동아시아는 장르 문학 브랜드 ‘스토리존’을 론칭해 ‘시네마틱 노블’ 시리즈를 기획했다. 이 시리즈에서 처음으로 공개한 중·단편 SF 앤솔러지 소설집 『인류애가 제로가 되었다』에 수록된 총 다섯 작품 중 네 작품이 출간 전 영상화를 확정했다. 작품을 영상으로 만드는 단계에서, 동아시아의 경우 스토리 IP 전문 회사 21스튜디오가 IP 개발을 위해 함께 머리를 맞댄다.
또한 문학동네는 2023년 6월, “다양한 매체를 통해 ‘재생’함으로써 오감을 통해 구체적으로 체험하는 문학을 선보이고자 한다.”는 취지로 ‘플레이’ 시리즈의 출발을 알렸다. 김인숙의 『더 게임』, 김사과의 『바캉스 소설』, 정한아의 『달의 바다』 동시 출간을 시작으로 앞으로도 영상을 보는 듯한 몰입감을 느낄 수 있는 장르 소설들을 독자에게 소개할 예정이다. 이렇게 출판계는 새로운 길을 만들어가고 있다.
Q 이야기를 알릴 때 어떤 점에 가장 중점을 두나요?
A 글이 가진 힘과 다양한 가능성을 제시하고자 합니다. 때로는 ‘피칭(pitching)’을 위한 자료에 출판사와 원작 작가가 떠올리는 주요 등장인물의 가상 캐스팅을 포함하는데요. 이것이 제작자의 상상을 돕는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한민세 | 동아시아 | 콘텐츠개발팀 매니저)
활발히 집필 활동을 하는 작가들에게는 도움이 필요하다. 작가 에이전시는 전속 계약을 맺은 작가의 다양한 창작 활동을 지원하는 곳이다. 이들은 소속 작가가 쓴 원고를 출판사에 소개해 책으로 나올 수 있도록 하고, 강연이나 인터뷰 등 작가가 참여하는 행사 일정을 조율하고 관리한다. 동시에 작가의 IP 관련 계약서 작성과 법률 검토까지 모든 과정을 대신한다.
그린북 에이전시는 김보영, 박서련, 정보라 작가 등이 소속된 장르·SF 작가 전문 대행사다. 이곳에서는 소속 작가의 작품이 영상으로 가공되기 위한 계약을 할 때, 자체적으로 만든 표준 계약서 양식을 사용하고 있다. ‘2차적 저작물 이용 허락 계약서’의 공통 양식을 정부에서 제공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린북 에이전시 개발매니지먼트팀 임채원 매니저에 따르면, “작가들은 계약서 내 필수 조항과 독소 조항에 관한 정보를 얻을 수 있는 방법이 매우 제한적”이라고 한다. 작가는 2차적 저작물 계약 조건에 관한 궁금증을 에이전시를 통해 해소할 수 있다.
한편 작가 에이전시와 종합 콘텐츠 기업이 함께 프로젝트를 진행하기도 한다. 김영하, 김금희, 장류진 등이 소속된 작가 에이전시 블러썸크리에이티브가 CJ ENM과 함께 선보인 프로젝트 ‘Untold Originals(언톨드 오리지널스)’가 좋은 예시다.
이들은 작가가 영상화를 고려하며 쓴 이야기를 먼저 문학 전문 출판사 자이언트북스를 통해 단행본으로 출간한다. 배명훈의 『우주섬 사비의 기묘한 탄도학』을 시작으로 김중혁의 『딜리터』, 천선란의 『이끼숲』이 독자들을 만나고 있으며, 일부 작품은 영상화 작업을 진행 중이다.
Q 작가 에이전시에서는 작가에게 어떤 식으로 도움을 주고 있나요?
A 2차적 저작물 이용 허락 계약은 콘텐츠 산업의 발전에 따라 매우 빠르게 그 형태가 바뀝니다. 영상화 계약이 OTT를 상정하는 쪽으로 대세가 바뀐 것이 그 대표적인 예시입니다. 정확히 관객 수를 집계할 수 있는 영화와 달리, OTT에 작품이 공개된 이후에는 제작사에 추가적인 수익이 돌아오지 않아 원작의 저자에게 흥행에 따른 인센티브를 보장하기도 어렵습니다. 이렇듯 플랫폼과 산업 형태에 따라 달라지는 계약 내용을 면밀하게 살피고, 저자에게 불공정 계약이 되지 않도록 꾸준히 산업 동향을 파악합니다. (임채원 | 그린북 에이전시 | 개발매니지먼트팀 매니저)
매년 가을 부산에서는 ‘부산국제영화제’만 열리는 게 아니다. 같은 기간 IP 산업에 관심 있는 이들을 위해 ‘부산스토리마켓’이 열린다. 원천 IP를 가지고 있는 출판사, 이를 밀접하게 관리하는 작가 에이전시, 영상으로 확장될 이야기의 씨앗을 찾고 있는 전 세계의 영상 제작사가 한데 모이는 장소다. 이 기간 동안 원천 IP의 영상화 가능성을 설득하는 피칭과 다양한 미팅 프로그램이 진행된다. 한국콘텐츠진흥원에서도 정기적으로 ‘콘텐츠 IP 사업화 상담회’를 연다. 이 상담회는 2차 콘텐츠가 될 수 있는 출판, 웹툰, 게임, 방송, 캐릭터 등 원천 IP를 가진 이들을 대상으로 열려 있다.
최근에는 공모전을 후원하는 콘텐츠 제작사가 소설 수상작의 영상화 가능성을 동시에 검토하기도 한다. 주영하의 『행복배틀』은 밀리의서재와 고즈넉이엔티가 함께 주최한 ‘제1회 K스릴러 작가 공모전’의 당선작을 드라마화한 경우다. 출간과 동시에 영화사, 방송사, 드라마 제작사에서 판권 문의가 줄을 이었던 작품으로 전해진다. 쌤앤파커스와 리디북스가 공동 주최한 ‘제3회 K-스토리 공모전’의 수상작 또한 도서 출간 이후 쇼박스, 아크미디어 같은 제작사와의 협의를 통해 영상화 계약이 진행될 수 있음을 알렸다. 시공사×에이스토리가 주최한 ‘제1회 장르 소설 공모전’에서 2023년 11월 중 발표되는 수상작에도 드라마 제작사 에이스토리의 영상화 심사 기회가 주어질 예정이다. 출판사이자 스토리 프로덕션인 안전가옥은 영화 투자 배급사 플러스엠 엔터테인먼트, 콘텐츠 스트리밍 서비스 왓챠 등과 스토리 공모전을 열어 꾸준히 이야기를 발굴하고 영상화 가능성을 검토한다.
Q 출판사의 작품 마케팅이 영상화로 이어진 사례가 있나요?
A 서사 중심의 소설을 출간할 때, 캐릭터를 일러스트로 소개하거나 북트레일러 영상을 제작해 마케팅 요소로 활용합니다. 원작의 캐릭터가 얼마나 매력적인지 알리고자 하는 활동들인데요. 북트레일러 영상을 보고 제작사에서 영상화 문의를 주기도 합니다. 정진영의 『젠가』, 손현주의 『도로나 이별 사무실』이 그런 식으로 영상화 계약이 이루어진 경우입니다. (이혜명 | 은행나무 | 저작권팀 팀장)
요즘 시청률과 화제성 두 마리 토끼를 다 잡는 드라마와 영화는 몇몇 영상 제작사를 통해 만들어진다. 최근 디즈니 에서 공개된 오리지널 시리즈 〈무빙〉은 드라마 제작사 스튜디오앤뉴의 작품이다. 그 외 대표적인 드라마 제작사로는 넷플릭스 오리지널 시리즈 〈더 글로리〉를 작업한 스튜디오드래곤, ENA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의 에이스토리 등이 있다. 최근 영상 제작사 PD들은 웹툰, 웹 소설, 소설 등 다양한 원작에서 보석을 찾으려는 노력을 기울인다. 특히 우리나라 시청자들이 애플 TV , 디즈니 같은 해외 OTT 서비스를 이용할 수 있게 되면서, 제작사에서는 드라마와 영화가 될 수 있는 원천 IP를 더욱 활발하게 검토하고 있다.
원천 IP를 찾는 곳은 국내뿐 아니라 해외로도 확장되고 있다. 이혜명 은행나무 저작권장 팀장은 “한국 문학 수출이 크게 늘면서 해외 출판에서 다양한 성과가 이어지고 있고, 이를 바탕으로 해외 영상 제작사와 영상화 계약을 맺는 사례도 늘고 있다.”고 전한다. 국내 영상 제작사가 해외 TV 시리즈의 기획과 개발에 나서는 경우도 있다. 2019년, 스튜디오드래곤은 미국 인터내셔널 지사를 설립하고 미국 제작사 스카이댄스 텔레비전과 글로벌 콘텐츠를 공동 제작하기 시작했다. 그 결과 M. O. 월시의 원작 소설 『빅 도어 프라이즈』를 영상화한 애플 TV 드라마 〈운명을 읽는 기계(The Big Door Prize)〉를 선보였다. 이 작품은 한국 제작사인 스튜디오드래곤이 만든 첫 미국 드라마다.
그러면 제작사가 출판물 IP를 구매한 후 가장 먼저 하는 일은 무엇일까? 영상화를 위한 대본 작업이다. 드라마를 예로 들자면 이 과정은 전적으로 드라마 제작사 PD와 드라마 작가의 몫이다. 이들은 원작의 설정을 어느 정도로 유지할지, 각색을 통해 어떤 점을 강조하고 싶은지 함께 고민하며 소통한다. 최근에는 원작자가 영상 시나리오를 직접 쓰는 사례도 늘어나고 있다. 『보건교사 안은영』은 정세랑 작가와 이경미 감독의 시나리오 공동 집필을 거쳐 드라마로 완성되었으며, 박상영의 『대도시의 사랑법』, 이슬아의 『가녀장의 시대』 또한 원작자가 직접 대본을 쓰고 있다고 알려져 있다. 소설, 드라마 대본, 영화 시나리오 등 매체를 가리지 않고 활약하는 작가들도 눈에 띈다. 『나의 미친 페미니스트 여자친구』의 민지형 작가는 TV조선 드라마 〈레버리지: 사기조작단〉의 대본을 썼고, 『아몬드』의 손원평 작가는 영화 〈침입자〉의 각본을 만들었다.
이렇듯 일부 소설가들은 시청자와 관객을 만날 이야기의 시나리오 혹은 그 뼈대가 되는 트리트먼트 작업을 병행한다. 이렇게 만들어진 대본은 캐스팅을 위해 배우에게, 편성을 위해 방송사·OTT 플랫폼에 각각 전달된다. 주요 배우 캐스팅과 편성이 결정되면 비로소 드라마 제작이 확정된다고 말할 수 있다. 한 명의 소설가가 쓴 원고가 다양한 사람들 사이의 소통을 거쳐 더 많은 시청자와 관객들을 만날 준비를 마치게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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