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현우X정희원 칼럼] 생활의 맥락 속 기후의 자리
전현우 정희원의 거대 도시에서 이동하기 14화
좋은 차는 결국 누군가의 평가 덕에 좋다. 이 평가는 삶의 맥락에 비추어, 생활의 맥락에 맞게 차량을 사용하는 누군가의 평가이다. 그런데 삶과 생활의 맥락 속에서, 기후의 자리는 단언컨대 없다. (2023.09.01)
기후 위기 시대, 도시의 이동을 탐구하는 교통, 철학 연구자 전현우와 도시인의 이동성 문제에 관심이 많은 노년내과 의사 정희원의 크로스 에세이. 매주 금요일 연재됩니다. |
13화를 본다. 어쩐지 앞 부분과 공방이 뒤바뀐 느낌이다. 앞서 자동차, 철도, 걷기를 거치며 사람들의 선택을 비판했던 건 나였다면, 사람들이 바보가 아니라고 주로 지적했던 건 정희원이었던 거 같은데.. 수단에 대해 주목하는 부분을 지나, 행동의 주체에 조명을 비추는 부분이라서 그럴까? 아니면 단순히 순서를 바꿔서 그런 것일까? 아무튼 “모두들 바보가 된 것만 같”은 기분 속에서도, 무언가 실마리를 찾지 않을 수는 없다. 위기 속에서 손을 놓고 있을 수야 없지 않은가?
이렇게 고민하던 차에 바로 얼마 전에 술자리에서 귀를 트이게 하는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운전면허조차 없는 40대 여성이 드디어 차를 사기로 결심했다는 이야기. 시흥시에서 서울 강서구로 이어지는 통근이 너무나 힘들다는 것이다. 이야기 속에서는 크게 세 변수가 등장했다.
① 대중교통을 편하게 만들어야지! 그러나 결국 버스는 말할 것도 없고, 새로 생긴 철도조차도 결국에는 피곤한 경험만 주고 있었다. 서해선 역 동선은 천국으로 가는 기분을 즐길(?) 수 있는 엄청난 길이의 에스컬레이터로 이뤄져 있다. 엘리베이터로 동선을 처리하겠다는 GTX, 신안산선 등 대심도 역의 미래이기도 하다. 9호선은 지옥철이다. 외곽과 외곽을 잇는 순환 고속도로에 버스 노선이 많을 수도 없다. 시간을 조정하는 데도 한계가 있다. 게다가 서해선처럼 외곽 연결 노선은 배차 간격도 좁히기 어렵다.
② 강서는 원룸 왕국(?)인데 옮기셔도? 그러나 좁고 비싼 집으로 옮기는 건 괴로운 일이다. 짐을 버리지 않으려면 지금 아파트를 유지하는 게 낫다!
③ 상사가 운전하는 차량 자주 타봤어? 상사가 괜찮다고 해도, 상사가 인격적으로도 훌륭한 사람이라도 그게 말처럼 편하지 않아!
기후 상황을 모르는 분이 아니었지만, 결국 일상의 무게란 이렇게 무거웠다. 시간을 조절하기 편한 편이고, 같이 차를 타고 출장 갈 일도 별로 없는 일상에 있는 사람이라 내가 지금껏 편하게 이야기할 수 있었던 것이 아닐까 싶어지는 순간.
어떤 차가 지금 상황에서 좋은 지로 대화 주제가 넘어갔다. 처음 타는 차량이라면 당연히 500만원 이하의 막 타는 오래된 중고차라는 지적. 이거야 그렇다. 생각해 보니 20여 년 전, 모친이 병원 식당 야간조 일을 구하자 택시를 타고 출퇴근하기 곤란하다고 판단해 첫 차를 구매하던 때도 그랬다. 인천 모 중고차 시장에서 샀던 르망. SUV를 왜 선호하는지에 대한 이야기도 곧 테이블에 올라왔다. 경차를 잘못 타다가는 대형 사고가 나기 십상이고, 동승자를 죽이게 되는 선택을 하게 될지 모르니 SUV는 필수적이라는 것이다.
좋은 차는 결국 누군가의 평가 덕에 좋다. 이 평가는 삶의 맥락에 비추어, 생활의 맥락에 맞게 차량을 사용하는 누군가의 평가이다. 그런데 삶과 생활의 맥락 속에서, 기후의 자리는 단언컨대 없다.
그럼에도 삶의 맥락 속에서 틈새를 찾아 기후의 자리를 만드는 일, 이것이 앞으로 필요한 일일 것이다. 앞선 글에서 진행했던 공방 가운데, 조금 치사해 보이는(?) 방법이 떠오른다. 자동차가 ‘환상’의 공급자라는 것이 그 내용이다. 거기서 나는 환상이라는 말이 가진 모호성1)을 적극 활용했다. ‘환상’은 신기루 같이 허황된 믿음을 말하기도 하고, 미래에 이뤄지리라고 믿을만한 충분한 증거가 있는 믿음을 말하기도 한다. 자동차에 대한 허황된 믿음에 가까운 부분을 주로 조명하던 내 글에, 정희원은 어느 정도 증거가 있는 믿음으로 주로 받아쳤다고나 할까.
그렇지만 내가 믿는 구석이 없지는 않았다. 두 의미의 환상 사이에는 질적인 차이가 없어, 경계가 흐릿하다. 가령 박정희가 경부고속도로를 놓아서 자동차 지배는 물론 지금의 한국 경제도 이끌어 낸 만큼, 앞으로도 미래 자동차 산업과 도로를 통해 이러한 성공을 계속 반복하면 된다는 믿음에게는 지난 50년간의 성공이라는 중요한 증거가 있다. 하지만 이런 증거는 아마도 기후 위기 앞에서는 그리 견고하지 못할 것이다. 내연기관차는커녕 전기차도 문제가 있다는 건 이제 상식이니.. 이런 스케일에서는 결국 환상이라는 말이 제대로 먹힌다고 생각했다.
그렇지만 역시 50년의 성공이란 개인의 차원으로 내려오면 거의 변화시킬 수 없는 압력처럼 보인다. 대체 어떻게 하면 효과적인 그림을 만들 수 있을까? 고전에 비벼 보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이 먼저 든다. 기후 위기로 노벨경제학상을 받았던 경제학자 노드하우스의 책 제목은 『기후 카지노』. 노드하우스의 말을 들어보자.
나는 우리가 기후카지노에 들어서고 있다는 비유를 사용할 것이다. 이는 경제성장이 기후와 지구시스템에 의도하지 않았지만 위험한 변화를 양산하고 있다는 의미다. 우리는 기후라는 주사위를 굴리고 있고, 그 결과는 우리를 놀라게 할 것이며, 그중에는 위험천만한 일도 있을 것이다.
카지노의 고장이 국내에도 있다. 사북. 이 도시, 아니 한국어의 감각대로면 읍내는 태백선 주변에 있다. 이 노선은 산악 지역을 돌파하는 만큼, 피서에 좋다. 여름을 맞아 불어난 급류 소리 속에서 머리를 식히러, 기차 타고 가기 좋은 이곳에 우연히 들를 일이 있었다.
카지노에서 이길 수 있다는 사람들의 망상을 연료로 삼아, 동네를 살릴 돈을 확보한 이 동네. 이 돈은 이제 차를 타고 왔다. 주차장 말고도 다른 증거도 쉽게 목도할 수 있었다. 이곳은 문자 그대로 한집 건너 한 집이 전당포다. 이 전당포의 주요 전당물은? 바로 유럽산 외제차. 정신을 혼미하게 하는 조명 뒤로, 비싸지만 먼지가 쌓인 차량들이 즐비하게 늘어서 있었다.
탄광촌 앞을 이렇게 비싼 차량 무리가 점거한 모습을 보면, 『기술과 문명』에서 제기된 문명 비평가 멈포드의 주장도 머릿속에 떠오르지 않을 수 없다. 멈포드는 광업의 업무 특성이 이후의 산업 문명에서 확인할 수 있는 조건을 예비했다고 주장한다. 광업은 태양빛을 이용할 수 없는 땅속에서 이뤄진다. 따라서 자연 일과는 무관하게 업무 패턴을 잡는 게 필수적이다. 게다가 이런 광맥은 우연에 의해 광산업자의 손에 들어온다. ‘일확천금’은 결국 이 우연을 지시하는 말이지 않던가? 그러나 일단 이 우연을 잡고 나면, 노동 시간을 투입하면 투입할수록 생산량은 늘어난다. 태양빛의 한계 따위는 없이, 그리고 일확천금을 찾아오는 사람들을 끊임없이 밀어 넣는다면 그렇다. 조직화, 기계화 등은 이다음에 따라오는 일이다.
이런 생각이 착실하게 이어질 수도 있다. 하지만 광맥을 찾을 때의 우연은 광업이 조금 다른 방향으로 향한다는 걸 보여주기도 한다. 도박. 물론 지질학적 지식이 동원되지만, 결국 이 광맥이 경제성이 있는지, 그리고 그 판단의 조건이 미래에도 유효할지는 지금 이 순간에 불충분한 정보만 가지고 이뤄지는 일종의 도박이다. 이런 사고방식의 유사성 때문에, 사실 사람들이 함부로 접근하면 안 될 카지노가 결국 이 탄광촌에 들어선 것 아니냐는 생각까지 머릿속에 맴돈다.
카지노, 석탄광, 그리고 외제차... 모두 묘하게 기후 위기와 엮여 있다. 실제로 석탄은 기후 위기의 원천이기도 하고, 그 덕에 우리는 “기후 카지노”에 입장하게 된 상태이다. 외제차, ‘벤츠’야 덩치 크고 탄소도 많이 뿜으며 디젤 게이트라는 혁혁한(?) 실적도 있다. 이들 모두는, 사람들을 도취 상태로 밀어 넣는다. 한 번 도취를 경험하면 적어도 그 맛을 잊기는 어렵다.
산 너머 강원랜드에서는 화려한 불꽃이 펑펑 터지고 있다. 계속해서 도취되어 있으라는 권고처럼 보인다. “이제 막 기후카지노에 들어선 만큼, 충분히 뒤돌아서 걸어나갈 수도 있다”는 노드하우스의 언급이 유효한 사람들이 생각보다 많기를 바라지만…
차량에 도취된 사람들을 카지노에 도취된 사람처럼 말하는 건 아무래도 과장처럼 보일지도 모른다. 과장을 털어내기 위해, 산 아래로 내려와 보자.
곧 명절이다. 이번에도 고속도로와 유료도로 통행료는 또다시 감면될 것이다. 차가 막히면 “고속도로 기능”이 상실되니 도로 값을 받을 필요는 없다는 세간의 직관 덕이다. 사람들은 도로 통행료를 빠르게 달릴 수 있는 고급 도로 서비스에 대한 반대급부로 생각하고, 정체 발생 시 그 가치가 사라진다고 믿는다.
그렇지만 경제학자들은 도로 값을 다른 의미로 생각한다. 도로 통행료가 무료가 된 이상, 운전 비용은 떨어지게 된다. 따라서 사람들은 도로로 더 많이 몰려 나온다. 기능을 상실했다는 도로는 더 복잡해져 속도는 더더욱 곤두박질친다. 정체는 더 길어지고, 탄소는 더 격하게 나온다. 아마도 길을 더 확장해야 한다는 요구를 들어줄 돈조차 줄어들 것이다. 그럼 오히려 막힐수록 돈을 더 받아야 하는 것이 아닌가? ‘혼잡 통행료’라는 개념은 여기에 기반한다.
이 논리는 혼잡 비용이라는 개념에 기반한다. 혼잡 비용이란 각자가 다른 차량의 주행을 방해해 속도를 낮추는 상황을 말한다. 나는 혼잡 비용의 유발자이자 피해자이다. 나는 다른 사람이 지나갈 공간을 막는다. 그리고 그 때문에 길에 나선 다른 사람들을 느리게 만든다. 그렇지만 동시에, 다른 사람들 역시 내 차를 막는다. 나 역시 혼자 마음대로 달릴 때 보다 느려진다.
혼잡비용이 올해에만 몇 조 원이라는 소리를 들어본 사람은 많을 것이다.2) 그렇지만 이렇게, 모든 통행자가 양가적인 입장에 처해 있으며 어느 한 쪽만 주목하면 헛소리를 할 수밖에 없다는 원리적 설명은 거의 찾아보기 어렵다. 경험 상 이런 이야기를 처음 듣는다는 사람이 대다수였다. 여기서 개인은 분열된다. 모두의 혼잡 비용을, 모두의 탄소 배출을 줄이려면, 결국 내 주머니가 타격을 입어야 한다. 그렇다고 내 주머니만을 지키면, 막히는 도로를, 탄소 배출의 후과를 계속해서 감수해야만 한다.
방금 “경제학자”라고 언급했다. 삶의 맥락에서 기후의 자리를 찾아내는 방법을 분명 알고 있는 사람들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렇다. 방금 확인한 혼잡 통행료의 논리는 바로 이 사람들의 논리다. 게다가 이들은, 분명 적어도 10여 년 전까지는 국제 유가가 폭등해 무역 적자가 우려되면 유류 소비량을 억제해야 한다는 상식은 가지고 있었다. ‘석유 한 방울 안 나는 나라’라는 말은 엄연한 물리적 사실이다. 덕분에 IMF 시절(김대중 정부)에는 유류세가 2~4배씩 오르기도 했었다. 지금은? 유가 폭등의 대책으로 유류세를 깎아주고 있다. 23년 무역 적자만 봐도 걱정스럽지만, <조선일보>조차 유류세 감면은 아니라고 말하고 있지만 세간은 조용하다.
나는 현 상황을 이렇게 평가하고 싶다. 교통을 보면서 기후 문제를 떠올릴만한 틈새 자체는 얼마든지 있다. 교통은 제한된 공간을 나누어 쓰는 규칙에 기반한다. 공간을 공유한다는 사실로부터, 교통은 서로가 서로의 앞길을 막을 가능성을 가진 시스템이라는 결론이 금방 나온다. 서로가 서로에게 혼잡 비용을 전가하는 시스템일 수밖에 없다는 말이다. 게다가 혼잡 비용의 논리는 사실 탄소 배출 비용의 논리와 다를 것이 별로 없다(탄소 쪽은 대기 전체에 영향을 지속적으로 끼친다는 점에서 좀 더 지독하긴 하다만). 그렇지만 이런 틈새는 정책을 통해 메워져 있다. 요금 정책은 도로 혼잡이라는 현상을 나 개인의 속도 저하라는 차원에서만 해석하는 논리를 깰 틀이 되지 못하고, 오히려 명절 도로 통행료 면제를 통해 개인 차원의 서비스 손실만을 보상하는 방법이 되고 만다. 여기서 내가 다른 사람들에게 미치는 손실은 무시되고 만다.
이렇게 틈새를 메우는 방식을 나는 앞서 자동차 지배라고 불렀다. 자동차는 당연한 것이고, 그 사용을 방해하는 정책은 전혀 용납되지 않는다는 의미에서. 그럼에도 역시 이것만으로는 상황을 모두 조명하기에는 부족한 듯싶다. 자동차의 사용을 위해서는 도로 사용자들을 관리할 규칙 정도는 있어야 하고, 혼잡통행료 정도는 그 논리와 사실 상충하는 건 아니니..
아무튼 내가 도로를 공유하는 다른 사람에게 비용이 될 수 있다는 명백한 사실을 사람들이 왜 무시하게 되는지 설명하려면 추가 요소가 하나 더 있어야 한다.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 사람들은 자신을 도로 환경을 생산하는 데 기여하는 사람이 아니라 단순히 소비하는 사람들일 뿐이라고 생각하고 있지 않을까? 그렇게 보면 모든 게 매끄럽다. 이런 단순 소비자가 보기에, 혼잡이든 탄소 배출이든 그것은 도로를 생산하는 관리자가 알아서 처리해야 할 현상이지 도로 이용자가 적극 참여해서 뭔가 해야 할 사태는 아닐 것이다. 혼잡통행료가 급진적인 소리처럼 들리는 코미디가 벌어지는 건, 바로 이렇게 오늘의 도로 이용객들이 소비자 쏠림 정체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지 않을까?
이 옆에서 대중교통은 방치되어 있다는 점은 특별히 명시할만하다. 명절 요금이 단적인 사례다. 명절에도 속도가 평소와 동일한 철도는 그렇다고 치자. 그러나 명절에도 고속버스가 요금을 받는 건 정말 이상해 보인다. 고속버스도 전용차로 확보된 경부고속도로만 벗어나면 거의 모든 노선에서 승용차와 정체를 함께 겪는다. 게다가 오늘날 버스는 서민 수단 중에 서민 수단이다. 승용차 통행료가 0인데, 그보다 서민이 이용하는 수단의 비용은 그대로이다? 이건 뭔가 이상해 보인다. 게다가 버스로 승객을 유도하면 그만큼 혼잡 비용도 낮아진다. 분배 논리는 무시하더라도, 혼잡 비용의 논리만 봐도 승용차에서 돈을 걷어 버스에 지원을 하는 게 낫다는 말이다. 그럼에도 현실에서는 명절 버스 요금은 그대로이고, 명절 승용차 요금은 0이다. 시민들은 이를 결국 뒤떨어진 사람들이나 타는, 무시해도 좋은 수단이라는 뜻으로 읽을 것이다.
도박이나 환상을 언급하는 치사한(?) 방법을 쓸 수도 있고, 과장 없이 경제학자들이 할 법한 말을 써도 좋다. 분명한 것은, 개인이 늘상 진행하는 이동을 잘 살펴보면 분명 기후 문제로 향하는 틈이 숭숭 나 있다는 사실이다. 산속의 카지노에서든, 꽉 막힌 8차선 고속도로 위에서든 그렇다. 이 틈은 2023년 현재 잘 눈에 띄지 않도록 정책과 관행, 사람들의 믿음 체계 등으로 적당히 땜질되어 있다. 이 틈을 세심히 들춰보려는 시도가 좀 더 다양한 각도에서 있어야, 사람들의 생각 속에 기후의 자리가 조금씩 더 늘어나게 될 것이다.
그래서 뭘 해야 하느냐고? 지금 통하는 방법, 돈을 써야겠지. 혼잡 통행료를 팍팍 올리고, 명절 통행료 많이 받고, 유류세를 충분히 올리자. 사람들은 바보가 아니니, 충분한 범위인지 알아볼 것이다. 그리고 그 돈으로 뭘 할지에 대해 이야기를 해야 한다. 물론 이것은 이번 주제를 넘어서니, 다음 주에 다시 이야기를 하기로.
1) 언어철학에서는 모호성과 애매성(중의성)을 구분한다. 단어 A가 대상 a와 b를 서로 모호하게 지시한다는 말은, a와 b의 경계가 흐릿하므로 A의 의미도 둘을 엄격히 구별할 수 없이 흐릿하다는 말이다. 단어 C가 대상 c와 d를 애매하게 지시한다는 말은, c와 d가 완전히 구별되지만 단어 C가 c와 d를 모두 지시할 수 있어 맥락에 따라 의미를 파악해야 한다는 말이다. 2) 이 비용의 핵은 대개 그렇게 서로의 앞길을 막아 잃게 된 시간의 규모에 일정 계수(시간당 가치)를 곱해 얻은 화폐 수치 값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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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강대학교에서 분석철학을 공부하고, 동 대학원에서 자연종을 주제로 석사 학위를 받았다. 교통, 철학 연구자. 과학 철학을 연구하던 중, 대규모 자원과 에너지를 소모하면서도 사람들을 매일같이 끌어들이는 교통 시스템의 마력 덕에 본격적으로 교통을 탐구하기 시작했다. 현재 서울시립대학교 자연과학연구소에서 교통에 대한 관심을 더 발전시키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