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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현우X정희원 칼럼] 일상으로의 여행

전현우 정희원의 거대 도시에서 이동하기 12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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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의 여름 휴가는 가족과 함께 집에서 시간을 보냈다. 지난 몇 달간 무척 바쁘게 살며 잃어버렸던 것들을 되찾고 싶었다. 마음 비우기, 운동하기, 잠자기에 힘썼다. (2023.08.18)


기후 위기 시대, 도시의 이동을 탐구하는 교통, 철학 연구자 전현우와
도시인의 이동성 문제에 관심이 많은 노년내과 의사 정희원의 크로스 에세이.
매주 금요일 연재됩니다.


언스플래쉬

나의 여행

여행이라는 주제에 대해 글을 써야 하게 되었을 때, 가장 먼저 든 생각은 '나에게 글을 쓸 만한 여행 경험이 있기는 한가?'였다. 뭔가 신나게 교통편과 잠잘 곳을 예약하고 낮에는 여기저기 구경도 하고 맛있는 것을 먹기도 하고 물건도 사고 하는 행동. 대학을 졸업한 후 업무 이외의 목적으로 가장 긴 시간 동안 어딘가를 다녀온 경험이었던 신혼여행의 기간 마저도 3박 4일이었다. 큰 병원의 전공의(레지던트) 2년차 시절이었고, 우리 부부는 모두가 소위 '바이탈 과'였다. 곰곰이 생각을 해 본다. 사전을 찾아 보기도 한다. 여행(旅行). 명사. 일이나 유람을 목적으로 다른 고장이나 외국에 가는 일. 그렇다. 지금까지 항공기나 기차를 탑승하는 일은 대부분 업무에 수반되는 것이었는데, 이것도 여행에 끼워줄 수 있다면 정말 다행이다. 여기에 대해서는 할 이야기들이 있으니까.


범프의 경험

때는 박사 과정 학생이던 2016년 겨울이었다. 실험실의 연구비 사정이 썩 넉넉한 편은 아니었다. 운 좋게도, 자기 소개서와 초록을 써서 제출한 미국 노화 학회(Gerontological Society of America, GSA)에 학회가 지원해주는 여행 지원 프로그램에 뽑혔다. 최소한의 체제비 정도는 해결이 되는 상황. 뉴올리언즈까지 다녀올 수 있는 최저가의 항공권을 구해야 했다. 열심히 웹을 뒤져보니 다소 험악해 보이는 여정이지만 단돈 87만원에 인천-뉴올리언즈 왕복이 가능한 유나이티드 항공의 표가 있었다. 가는 표는 인천-샌프란시스코-뉴저지 뉴아크(노숙)-뉴올리언즈. 오는 표는 뉴올리언즈-시카고 오헤어-샌프란시스코(노숙)-인천. 지금 생각해보면 제정신이 아닌 일정이지만 당시 내 심정으로는, 편도 구간에서 한번만 환승하는 표(약 200만원)와의 가격 차이도 현저했고, 공항 노숙으로 숙박비도 아낄 수 있었기 때문에 해 봄직한 일이라는 판단이었다. 젊어서 고생은 사서도 한다지 않는가. 낡은 보잉 747-400에 몸을 싣고 인천에서 샌프란시스코로 향한다.

 여기까지는 별일이 없었지만, 샌프란시스코에서부터는 미국 국내선의 열악한 인프라를 드디어 체험하게 된다. 카운터에서 나를 부른다. 비행기는 가득 찼고, 내 표가 최저가의 항공권이라 오늘 뉴아크 공항행 비행기를 못 타게 될 수도 있다는 이야기를 한다. 이게 무슨 황당한 소리인가 싶었지만, 당시 유나이티드 항공은 비행기의 가용한 좌석보다 예약을 한참 많이 받아놓고(오버부킹), 결국 비행기가 넘치면 가장 가격이 싼 표를 가진 승객들이 항공기에 탑승하지 못하게 하거나, 또는 탑승한 후에라도 강제로 내리게 하는 관행이 있었다. 2017년에 있었던 유나이티드 익스프레스 3411편 강제 하기 사건(사실 이 사건은 돌아가는 승무원을 태우기 위한 '데드 헤딩'으로 기전 자체는 다르다)을 통해 유나이티드 항공의 오버부킹 관행은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다행히도 자리가 모자라지는 않아, 이번에는 늘씬한 757-200을 타고 새벽 두 시쯤 뉴저지 뉴아크 공항에 도착한다. 노숙을 막기 위해 의자에 금속 팔걸이를 죄다 붙여놨다. 나쁜 놈들. 어쩔 도리 없이 뜬눈으로 뉴아크 공항의 바닥에서 밤을 지새우고 뉴올리언즈행 737-800에 몸을 싣는다. 학회장엔 잘 도착했고, 예정한 발표도 순조로이 마칠 수 있었다. 몸 고생을 많이 한 만큼 더 학회에 몰입하려고 노력했던 것 같다.

문제는 돌아오는 비행기 편이었다. 이번엔 시카고로 가는 비행기의 자리가 진짜로 없단다. 이정표를 다시 들여다 보면, 오후 5:30에 뉴올리언즈를 출발, 시카고 오헤어 공항에 8:07에 도착하고, 이후 10:55에 출발하는 샌프란시스코행으로 다음날 새벽 1:37 도착하면 아침 10:40에 인천을 향해 출발하는 747-400을 타게 된다. 오늘 시카고에 못 가면 어쩌란 말인가. 내일 아침에 어쨌든 샌프란시스코에 도달해야 하는데, 초음속 항공기가 있는 것도 아니고. 어쨌든 한 개의 티켓으로 연결된 스케줄이니 책임은 유나이티드에 있다. 시카고행 비행기는 이미 출발한 뒤. 상당한 시간이 흐르고서야 대책이 마련된다. 다음날 이른 새벽 휴스턴을 거쳐 샌프란시스코를 향하는 티켓이 만들어진다. 잠도 재워주고, 상당한 금액의 금전적 보상도 해 주겠다고 한다.

개인 입장에서는 어찌할 도리도 없고, 책임지고 인천에는 제 때 도착하게 해 주겠다고 하니 넘어가는 수 밖에 없었지만, 공항 탑승구 앞에서 반나절을 마치 난민이 된 것 처럼 무작정 기다리는 이 경험은 평생 잊을 수 없을 것 같다. 근처의 크라운 플라자 호텔에서 뜬눈으로 밤을 지새우고, 새벽 세시에 공항을 향하는 셔틀버스를 탄다. 결국 인천공항에 도착하긴 했지만, 도착 후 며칠은 거의 앓아 누웠던 것 같다. 2016년 유나이티드항공의 범프, 그러니까 오버부킹으로 인한 좌석 미제공은 3,765건이 있었고, 승객 10000명당 0.43명이 경험했다고 한다. 그 낮은 확률에 걸린 셈인데, 회원 등급이 전혀 없는 유나이티드 항공사의 완전 뜨내기 고객인데다 최저가의 항공권을 선택한 탓이다. 이 여행을 위해 아이폰에 담아 간 음반 중 피아니스트 랑랑의 신보인 '뉴욕 랩소디'가 있었는데, 이 음반의 주요 곡 중 하나가 거쉰의 '랩소디 인 블루'다. 이 곡은 공교롭게도 유나이티드항공의 테마곡이기도 하다. 지금까지도 이 일을 떠올리면 이 랑랑의 음반에 저절로 손이 간다.


비행기를 조금만 타겠다는 생각

일주일간 벌어진 이 여행의 경험은 이후 항공과 여행 산업에 대해 천착하고 고민하는 계기가 되었다. 항공 산업은 사람들이 더 많이 여행하도록 장려한다. 더 많이 항공 여행을 소비해서 해당 회사의 높은 티어를 보유한 사람은 당연하게도 범프를 경험할 가능성이 거의 없을 뿐만 아니라, 전광판에서 보여지는 좌석 업그레이드 명단의 앞쪽에 위치한다. 그렇게 여행의 소비는 위치재의 특성을 지니게 된다. 여행 산업은 더 소비적이며, 비용이 많이 들며, 이국적이며 탄소 배출이 많은 활동을 더욱 멋진 것으로 포장한다. SNS는 이런 소비적 여행의 경험을 과시하기 위한 수단이 된다. 휴가 기간을 얼마나 더 멋지게 채워 넣었는지를 SNS에서 과시하거나, 사람들과 서로의 여행지를 이야기하며 이를 비교하려 한다. 이 결과, 휴가와 여행이 가지는 어떤 전형(archetype)이 사람들의 생각 속에 자리하게 되는데, 휴가 기간을 물질이나 경험을 소비하는 활동들로 빈틈없이 채워넣었을 때에 비로소 알차고 보람있는 시간의 사용이었다고 느끼는 심리가 사회를 지배하게 되는 것이다.

여행의 소비가 가지는 탄소 배출에 대해서도 고민하게 되었다. 구글 플라이트를 지금 검색해 보면, 서울에서 뉴올리언즈를 왕복하는 여정은 이코노미 승객 1인당 대략 700kg~1000kg 정도의 이산화탄소를 배출한다. 선진국 시민이 평균적으로 배출하는 이산화탄소 환산 연간 8톤 정도의 온실가스를 인도인의 연간 2톤 정도로 당장 감축할 수만 있다면, 2100년까지 전 지구의 기온 상승을 평균 섭씨 2도 정도로 방어할 수 있을 가능성이 높아진다. 평균적인 미국식 식사는 연간 2.5톤 정도의 이산화탄소 환산 온실가스를 배출하는데, 이러한 라이프 스타일을 완전 채식(비건)으로 바꾸었을 때 식생활에서 연간 1톤 정도의 절감 효과가 있다. 연간 1만 킬로미터 정도 차량을 운행할 때, 가솔린 차량을 하이브리드나 전기차로 바꾸면 얻어지는 온실가스 절감 효과가 이산화탄소 환산 1톤 정도다. 이런 효과들이 태평양을 건너는 비행 한 번이면 사라져 버리는 셈이다. 학회 발표를 하기 위해 2013년 이래로 매년 한 번 정도는 태평양을 건너고 있었던 스스로를 돌아보게 된다. 한편으로는 소형 전기차를 타고 식사에서 식물 비중을 높이려는 노력을 하지만 반대로는 항공유를 물 쓰듯 태우고 있었던 것이다. 이후, 먼 거리의 해외 학회 참석은 현재까지 그만두게 되었다. 마침 2020년 코로나19가 전 세계로 퍼지며, 온라인으로도 대부분의 학회에 참석할 수 있게 되었다. '가급적 비행기 안 타기'가 삶의 지침으로 추가되었다.


결론

올해의 여름 휴가는 가족과 함께 집에서 시간을 보냈다. 지난 몇 달간 무척 바쁘게 살며 잃어버렸던 것들을 되찾고 싶었다. 마음 비우기, 운동하기, 잠자기에 힘썼다.

미치 앨봄의 『모리와 함께한 화요일』에 다음과 같은 구절이 나온다.

24시간만 건강해질 수 있으면 (...) 아침에 운동을 하고 (...) 찾아온 친구들과 맛좋은 점심 식사를 함께하고. (...) 그런 다음 산책을 나가겠어. (...) 그런 다음 집에 와서 깊고 달콤한 잠을 자는 거야.

이렇게 했다. 매일 아들과 시간을 보냈고 가족과 함께 저녁을 먹었다. 비행기는 타지 않았지만, 놓치고 있었던 원래의 일상으로 떠났던 1주일 간의 행복한 여행이었다.



모리와 함께한 화요일
모리와 함께한 화요일
미치 앨봄 저 | 공경희 역
살림출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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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정희원(노년내과 의사)

서울대학교 의과대학을 졸업했으며, 서울대학교병원에서 전문의를 취득했다. 현재는 서울아산병원 노년내과 의사로 일하고 있다. 의과대학 시절, 호른을 연습하던 중 근육 유지의 중요성을 깨닫고 근감소증에 관심 갖기 시작했다. 이후 내과 실습을 돌며 노인의학에 완전히 매료되었으며, 내과 전공의 시절 노쇠에 대해 연구하다가 공부에 대한 갈증이 생겨 의과학대학원에 들어가 이학박사를 취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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