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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중혁의 북커버러버] 어떤 띠지는 친척 같고, 어떤 띠지는 안개 같아 - 『홍수는 내 영혼에 이르고』
9화 - 『홍수는 내 영혼에 이르고』
책과 따로 노는 띠지는 없었으면 좋겠어. 착 달라붙어서 책과 한 몸이 되는 그런 띠지를 원해. 손을 다치지 않아도 되고, 북커버를 방해하지 않는. (2023.08.24)
격주 목요일, 소설가 김중혁이 좋아하는 북커버를 소개하는 칼럼 ‘김중혁의 북커버러버’를 연재합니다. |
내가 책의 띠지를 싫어하는 이유 얘기했던가? 안 했을 거야. 처음 얘기하는 건지도 몰라. 우선, 걸리적거려. 책을 펼치는데 혼자서만 벗겨지고, 책이랑 따로 놀아. 띠지에 손 베인 적 있어? 책한테 베였으면 억울하지라도 않지. 진짜 열받게 따끔거려. 무엇보다 책 표지를 가리는 게 제일 마음에 안 들어. 북커버러버에게 띠지는 거추장스러운 장식일 뿐이야.
띠지를 좋아하는 사람도 많더라고. 고이 접어서 책갈피로 쓰는 사람도 있고, 모아두면 새로운 컬렉션이 된다는 사람도 있어. 잘 만든 띠지는 새로운 디자인의 영역을 개척한다는 의견도 있던데..., 결국 북디자이너들 일이 많아지는 거잖아. 책표지 다 만들었는데 그 위에다 또 새로운 옷을 입히는 건 패션 테러리스트나 하는 짓 아닌가? 책 표지와 띠지의 디자인을 절묘하게 어우러지게 만드는 건 쉬운 일이 아냐. 이러다가는 책표지 위에 띠지 입히고, 띠지 위에다 또 띠띠지 씌우고, 띠띠지 위에 띠띠띠지도 만들고, 결국 책은 마트료시카를 닮아가고..., 그만하자.
여기까지는 독자의 입장이고, 책을 내는 작가의 입장에서는 곤란한 점이 많아. 책을 열심히 알려보겠다는 출판사의 의지를 무시할 수가 없거든. 추가 비용을 들여가면서 띠지에다 홍보 문구를 넣겠다는데 어떻게 말려? 띠지에 내 사진이 들어간 적도 있어. 그건 좀 민망하긴 하더라. 자동차 앞 유리에 중고차 딜러 명함을 끼워 넣는 기분이랄까, '이번 주 할인 상품'을 적어넣은 슈퍼마켓 전단지를 대문에다 붙여놓는 기분이랄까. 북커버러버들이라면 내 얼굴이 인쇄된 띠지를 바로 벗겨서 착착 접은 다음에 책갈피로 쓰든가 휴지통으로 보내겠지.
띠지로 뭘 하면 좋을까, 자주 생각해. 처음부터 유용한 띠지를 만들 방법은 없을지도 생각하고. 돋보기로 변신하는 띠지도 생각했는데, 이건 노안이 온 사람에게만 좋은 거겠지. 복권으로 변신하는 띠지는? 안 돼, 서점에서 띠지만 쓸어가는 사람이 생길 거야. 띠지가 손수건으로 변신해서 책을 읽다 울음을 터뜨리는 사람의 눈물을 닦을 수 있으면? 띠지에 작은 LED가 달려 있어서 현재 읽고 있는 페이지를 알려줄 수 있으면? LED에 내가 밑줄 친 문장을 보여줘도 좋겠다. 앞으로 띠지가 어떻게 변할지 모르겠다.
출간된 것 중에도 재미난 띠지가 많긴 했어. 『주기율표를 읽는 시간』은 띠지 뒷면에다 주기율표를 깨알같이 인쇄했고, 『오만과 편견, 그리고 좀비』의 띠지는 주인공의 얼굴을 가리면서 비밀을 숨겨주는 역할을 했지. 북 커버를 보여주는 또 다른 방법으로 띠지를 사용하는 건데, 장단점이 있는 것 같아. 마케팅의 측면에서는 호기심을 불러일으킬 수 있겠지. 책을 재미난 놀잇감으로 접할 수도 있겠고. 단점은, 평면 예술로서의 책이 가진 장점을 희석시킨다는 점이야. 좋은 표지는, 평면인데도 불구하고 입체적으로 보이지. 우리는 종이라는 평면에 적힌 이야기를 읽으면서 3차원의 공간을 상상하고 우리만의 상상 세계를 건설하잖아. 표지에 적힌 글씨와 그림을 보면서 입체적인 형상을 그려나가는 거지. 가끔 표지에 있는 그림과 글씨가 따로 떨어져서 둥둥 떠다니는 것 같지 않아? 나만 그런가?
오에 겐자부로의 『홍수는 내 영혼에 이르고』는 최근에 본 것 중에서 가장 아름다운 표지였어. 표지의 그림은 쓰카사 오사무의 작품인데, 마치 반 고흐의 그림을 보는 것 같아. 가느다란 선은 바람이 되기도 하고, 물결이 되기도 하고, 나뭇가지가 되기도 해. 쓰카사 오사무는 시오노 나나미의 『콘스탄티노플의 뱃사공』에 그림을 그리기도 했는데, 『홍수는 내 영혼에 이르고』와는 완전 다른 스타일이야. 오에 겐자부로의 글에는 우주의 비밀을 풀어헤치는 듯한 자유분방한 그림을 그렸고, 시오노 나나미의 글에는 이야기를 압축하는 듯한 절제된 그림을 그렸지. 쓰카사 오사무는 소설가이기도 해서 글의 의미를 이해하는 능력이 탁월한 것 같아. 오에 겐자부로의 음악가 아들 오에 히카리의 음반 재킷 그림도 그린 걸 보면 음악을 해석하는 능력도 뛰어난가 봐. 중학교 졸업하고 영화 간판 그리는 일을 시작했다고 하던데 다양한 경력이 그림에 녹아든 것 같아.
『홍수는 내 영혼에 이르고』의 표지는 거슬리는 게 별로 없어. 서체도 단정해서 그림을 해치지 않고, 양장으로 만들어서 판판한 그림이 쭈그러들 일도 없어. 띠지도 마음에 들어. 띠지에는 중요한 정보가 하나 있는데 '1973년 초판본 디자인'이라고 적혀 있어. "자, 여기 초판본 디자인을 그대로 보여드리고, 저는 빠집니다." 사회자 역할을 하는 띠지랄까.
어떤 띠지는 홈쇼핑 호스트 같아. 수선스럽게 혼을 쏙 빼놓는데, 정신 차리고 보면 책을 구입한 다음이지.
어떤 띠지는 표지판 같아. 책을 어떻게 읽으면 좋을지 조언을 해줘. 어떤 띠지는 마스크를 쓴 사람 같기도 하고, 어떤 띠지는 중요한 부위를 가리기 위해 만든 모자이크처럼 보이고, 어떤 띠지는 나한테 좋은 걸 주고 싶어 하는 말 많은 친척 같고, 맞아, 좀 귀찮지, 어떤 띠지는 신비한 안개 같기도 하고, 맑은 하늘을 가리는 구름 같을 때도 있고..., 생각해 보니 나 띠지를 싫어하는 게 아니었네. 자신이 하고 싶은 말만 하는, 듣는 사람 배려하지 않고 떠들기만 하는 그런 띠지를 싫어했나 봐. 그래도 제발 책과 따로 노는 띠지는 없었으면 좋겠어. 착 달라붙어서 책과 한 몸이 되는 그런 띠지를 원해. 손을 다치지 않아도 되고, 북커버를 방해하지 않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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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쓰고 산문도 쓰고 칼럼도 쓴다. 『스마일』, 『좀비들』, 『미스터 모노레일』,『뭐라도 되겠지』, 『메이드 인 공장』 등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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