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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세미의 식물로 맺어진 세계] 자연의 잠언 안으로 걸어 들어갈 때

식물로 맺어진 세계 6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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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가장 위대한 잠언이 자연 속에 있음을 지금도 나는 믿는다. 그러한 믿음이 언젠가 나를 부를 것이다. 나는 따라갈 준비가 되어 있다. (2023.06.07)


"수목원이요?"

"제주도요?"

거절의 완곡한 방식을 고민하며 나간 자리였다. 회사를 다니고 있을 때였고, 주말에는 내 글을 쓰기에도 바쁜 나날이었다. 선배로부터 전달 받은 내용은 "동료 큐레이터 중에 아버지의 팔순을 맞아 자서전을 내고 싶어 하는 분이 있다"는 것이었고, 일단 만나서 자세한 이야기를 나누길 원한다는 것이었다. 큐레이터 분과 삼청동에 있는 카페에서 만나 인사를 나눌 때만 해도 할 수 있는 이야기를 해드리되, 일을 맡는 건 어렵다고 해야겠다는 생각뿐이었다. 그런데 "저희 아버지가 오래 전부터 수목원을 만들어 운영하고 계세요"라는 말을 듣는 순간 머릿속이 깨끗해지면서 느낌표 하나가, "제주도에 있어요"라는 말을 들었을 때 느낌표가 두 개가 생성되었다. 마치 나는 이미 책을 만들기로 결정한 사람처럼 떠오르는 기획 아이디어들을 마구 떠들어댔고, 전형적인 자서전이 아닌 구술과 정원의 이미지가 결합된 책의 꼴까지 제안하다가, 아차, 싶어 괜히 앞에 있던 케이크 한 조각을 입에 우겨넣었다. 

"아 그런데, 제가 이 일을 할 수 있는 상황은 아니어서요. 며칠만 더 생각해보고 다시 연락드려도 될까요?" 하고 돌아와서는, 나는 고사할 이유 대신 수락할 이유를 찾았고, 기획과 출판을 위한 인력 구성을 내가 꾸릴 수 있다면 가능하겠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렇게 나는 한 개인이 황무지에 동백나무 한 그루를 심기 시작해 6만평의 정원을 일군 이야기, 그리고 그 정원의 사계절과 면면들을 펼쳐 보일 책을 만들게 됐다.

그곳은 남쪽으로는 산방산과 송악산, 군산이 내려다보이고, 북쪽으로는 한라산이 올려다 보이는 중산간 지역에 위치한 동백 정원이었다. 기획과 편집 총괄을 맡은 나, 구술 채록과 편집을 맡은 후배 기자, 그리고 사진 작가는 한 달에 한 번씩 제주도에 내려가 2~3일 정도 머무르며 약 1년 간 인터뷰와 촬영을 밀도 있게 해나갔다. 처음에는 밀린 일에 치여 밤을 새는 와중에 비행기를 타고 제주에 간다는 사실만으로도 머릿속을 뒤집어 햇볕에 말리는 기분이 들었다. 몇 차례 오가다보니, 올 때마다 한구석도 빠짐없이 변해 있는 정원의 모습을 보게 됐다. 사진 작가는 분명 여러 번 찍은 장소를 또 찍어야 하는 곤혹을 토로했지만, 카메라에 매번 새로운 모습이 담길 때마다 나는 마냥 웃음이 났다.



어느 날은 동백나무 한 그루가 푸드득 떠는 모습을 보게 되었는데, 자세히 보니 그 안에 수십 마리는 되어 보이는 동박새가 꽃에서 꽃으로 옮겨가며 꿀을 먹고 있었다. 동백나무가 몸을 떨던 형상과 소리가 며칠 간 나를 끈질기게 따라왔고, 이 책을 만드는 동안 겪게 될 자연의 경험이 앞으로 내가 살아갈 시간의 저변에 짙게 깔리리라는 것을 나는 직감하게 되었다. 그것은 개별의 식물로부터 경험되는 미시적 세계라기보다는 땅과 바람, 식물과 동물, 그리고 인간이 어떻게 관계 맺고 어떤 순간에 서로를 덮치고 뒤집어지는가에 대한 총체적 세계의 경험이었다. 이를테면 이런 경험. 동백 정원의 북쪽으로 아직 개장하지 않은 땅을 둘러볼 기회가 있었다. 안개가 짙은 날이었고, 인간의 손을 타지 않은 숲 사이로 관리를 위한 길이 거칠게 나 있는 땅이었다. 안개 때문인지, 더욱 미지의 공간에 입장한 것처럼 느껴졌다. 두텁게 쌓인 안개 층 위로 짙은 초록의 나무 머리들이 보였고, 제주 특유의 검은 바위들이 나타났다가 사라졌다. 느리게 한 시간쯤 걸었을까? 알게 되었다. 그동안 나는 안개를 시각적인 질료로만 인식했던 것. 내 몸은 습기를 먹은 돌처럼 하나의 촉각 세포가 되고 말았다. 이 촉각은 비단 안개뿐 아니라 내가 밝고 지나온 흙과 간간히 불어온 바람과 팔뚝을 스치던 나뭇잎, 그리고 어디선가 들리는 새소리가 동시에 만들어낸 것이었다. 자연 안으로 걸어 들어가는 몸에게만 허락되는 무엇.

시인 기형도의 유일한 시집, 그 첫 장에 적힌 시작 메모를 좋아한다. 과거의 내가 밑줄 그어 놓은 문장은 이것. 

"나는 한동안 무책임한 자연의 비유를 경계하느라 거리에서 시를 만들었다. 거리의 상상력은 고통이었고 나는 그 고통을 사랑하였다."

나 역시 무책임한 자연의 비유를 경계하고 싶었고, 지금도 역시 자연과 접촉할 때 습관적인 감탄사를 남발하거나 거대한 잠언에 압도되어 개인의 시적 언어를 잃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하지만 지금의 나는 그 뒤에 이어지는 문장에 밑줄을 긋고 만다.

"그러나 가장 위대한 잠언이 자연 속에 있음을 지금도 나는 믿는다. 그러한 믿음이 언젠가 나를 부를 것이다. 나는 따라갈 준비가 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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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ㆍ사진 | 박세미

2014년 <서울신문> 신춘문예로 등단했다. 대학과 대학원에서 건축과 건축역사·이론·비평을 전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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