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룹 '오마르와 동방전력' 리더 오마르의 음악
이즘 특집
서울의 아스팔트는 어느새 사하라 사막이 되었다. 마치 오아시스를 발견한 기분이었다. 밴드 오마르와 동방전력은 그렇게 오아시스처럼 불현듯 나타나 대중에게 독특한 경험을 선사했다. (2023.06.02)
어느 무더운 여름. 썬크림 보호막을 뚫고 따갑게 내리쬐는 태양 빛을 속절없이 맞아 지쳐갈 때 이런 날씨에 잘 어울리는 음악을 우연히 들었다. 그 순간, 서울의 아스팔트는 어느새 사하라 사막이 되었다. 마치 오아시스를 발견한 기분이었다. 밴드 '오마르와 동방전력'은 그렇게 오아시스처럼 불현듯 나타나 대중에게 독특한 경험을 선사했다.
싱글 'Sunshine'을 마지막으로 소식을 접하기 어려웠던 그들과 리더 오마르의 근황이 궁금했다. 현재 제주도에서 거주 중인 그는 '시드 르 무어(Seed Le Moor)'라는 이름의 DJ로 왕성하게 활동하고 있었다. 일렉트릭 기타를 메고 노래를 부르던 모습과는 또 다른 매력이었다. 그의 다양한 음악 세계를 알고 싶었다. 한 달에 한 번, 음악 작업을 위해 서울로 올라오는 그를 만났다. 밴드 '수리수리마하수리'부터 시작해 '오마르와 동방전력'의 리더, 그리고 EDM 뮤지션 시드 르 무어가 되기까지 오마르의 삶과 음악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다.
간략하게 당신을 소개해 달라.
이름은 오마르 베나실라(Omar Benassila). 모로코의 카사블랑카 출신이다. 한국에는 2007년에 처음 왔고 16년째 살고 있다. 서울에서는 7년 반 정도 살았고 이후에는 제주도로 거처를 옮겼다.
한국인들에게 모로코는 다소 낯선 나라다. 대부분 영화 <카사블랑카>를 먼저 떠올릴 것이다. 모로코는 어떤 역사와 문화적 배경을 가졌는지 간단하게 설명한다면.
모로코는 역사적으로 '아프리카의 문'이다. 유럽, 특히 스페인과 인접해 마치 아프리카의 입구처럼 보인다. 아프리카를 오고 싶은 유럽인들이 거쳐야 하는 허브였기에 다양한 문화와 민족이 섞여 시장을 형성했다. 이러한 다문화, 다인종이라는 특징 덕분에 어릴 때부터 다양한 종류의 예술과 음악을 접할 수 있었다. 모로코가 이슬람 국가이기 때문에 대부분 무슬림이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유대인도 많다. 오래전, 많은 유대인이 이스라엘에서 넘어왔다. 안달루시아를 중심으로 스페인에서 이주해 온 사람들도 많아서 크리스천 또한 유입되었다. 이렇듯 100년 이상 다양한 문화가 섞였다.
그러한 역사적 배경이 음악을 하는 데에 어떠한 영향을 주었나.
모로코는 50년간 유럽의 근현대사와 그들의 기술에 영향을 받았다. 독립 이후에도 유럽과는 문화적으로 긴밀하게 연결되어 많은 서구 음악을 들을 수 있었다. 1970년대부터 레게 음악을 접할 수 있었고 레드 제플린은 이미 유명했다. 그들은 모로코에서 음악 작업과 공연을 하기도 했다. 이렇듯 나의 윗세대부터 다양한 음악을 접할 수 있는 환경이었다. 부모님께서 음악을 좋아하셔서 나 역시 집에서 다양한 스타일의 음악을 자주 들으면서 자랐다.
음악을 좋아하는 부모님은 어떤 일을 하셨나.
아버지는 비료의 재료인 인산염을 수출하는 대기업에 다니셨다. 어머니는 고등학교 화학 선생님이셨는데, 두 분 다 음악을 좋아하셨다. 두 분은 악기를 연주하실 줄은 몰랐지만 남다른 음악 애호가다.
부유한 집안이었나.
평범한 중산층이었다. 두 분 다 공무원이셨지만 모로코에서 공무원의 수입은 많지 않다. 난 집에서 둘째였다. 첫째 큰형과 막내 여동생 사이에서 어렵게 컸다. 어머니는 교사로서 자식의 학업에 엄격하신 분이셨으니까. 형은 열심히 공부했지만 성적은 그저 그랬다. 나는 성적이 좋은 편이었지만, 등 떠밀려 공부만 하고 싶지는 않았다. 부모님은 내가 음악을 하길 원치 않으셨기 때문에 나를 공부 쪽으로 밀어붙이셨지만 나는 음악에 대한 열정이 강했고 증명하고 싶었다.
음악을 하면서 한국에 오게 된 과정이 궁금하다. 처음 한국에 들어왔을 때 음악을 시작하기 쉽지 않았을 텐데.
중학생 시절에 아마추어 밴드의 보컬을 맡으면서 처음 음악을 시작했다. 그때 같이 밴드를 했던 형들이 있었고, 나는 거기서 노래를 불렀다. 내 음악 생활을 처음으로 지지해준 사람들이다. 대학생이 되어서도 계속 밴드를 했고 그때 음악을 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애초 부모님의 반대 때문에 모로코에서는 음악을 할 수 없기도 했고 나 스스로 시야를 넓히고 싶어 여러 나라를 돌아다녔다. 대만, 홍콩, 중국, 말레이시아를 거쳐 한국에 정착했다.
밴드를 하고 싶어서 무작정 홍대 놀이터로 가서 악기를 연주하고 사람들을 만났다. 그때 키보디스트 백정현을 알게 됐다. 함께 즉흥 연주를 하면서 함께 밴드를 만들자고 결심했고, 그렇게 첫 밴드 '수리수리마하수리'가 탄생했다. 그 당시 한국의 저렴하고, 효율적이고, 빠른 녹음 시스템에 감탄했다. '수리수리마하수리'는 2007년 당시, 월드 뮤직에 관심 있던 다섯 사람이 우연히 적절한 시기에 만나 결성한 밴드였고 꽤 순조로웠다.
이후에는 이승열, 피아니스트 노영심, 이건민과 같은 아티스트들과 같이 작업하거나 세션으로 참여하면서 많은 사람을 알게 됐고, 나를 찾아주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한국에 온 지도 얼마 안 됐고 일도 많아서 힘들었지만 한국은 낯선 땅에서 온 나를 따뜻하게 반겨줬다.
다른 나라에서는 왜 음악 작업을 하지 않았나. 환경이 여의치 않았던 것인지.
다른 곳은 여행 위주였지 정착하진 않았다. 한국은 살기에 꽤 좋은 곳이라 생각했고, 여기서 한국인 아내도 만났다. 대만이나 말레이시아에서도 음악을 했지만 대부분 즉흥 공연 위주였다. 수리수리마하수리를 결성하고 앨범을 냈더니, 그 밴드에 더 집중하고 싶어서 자연스럽게 한국에 정착했다.
가장 좋아하거나 음악을 하는 데에 영감을 받은 아티스트는?
7살에 마이클 잭슨을 처음 접했다. 그가 너무 멋있어서 공연 실황을 비디오 테이프로 녹화했던 기억이 난다. 고등학교 때는 로버트 플랜트의 고음이 멋진 레드 제플린을 많이 들었다. 이후 가장 영감을 많이 준 아티스트는 말리의 블루스 기타리스트 알리 파르카 투레다. 아프리칸 데저트 블루스의 대표적인 인물이다. 어느 영화에서 그의 음악을 처음 들었는데, 그때는 그의 음악이라는 걸 몰랐다. 알리 파르카 투레가 세상을 떠난 뒤에 그의 음악을 듣다가 예전에 본 영화에서 들은 음악이 그의 곡이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리차드 보나에게도 많은 영감을 받았다. 10년 여의 시간이 지나면서 취향도 많이 달라졌다. 지금은 일렉트로닉 음악을 많이 들으면서 영감을 받는다. 특히 독일의 아티스트 닐스 프람의 영향이 크다.
'오마르와 동방전력'은 이집트인, 모로코인, 한국인이 모인 4인조 밴드다. 언어와 문화가 다른 사람들이 한 밴드를 이뤘는데 이런 구성의 장단점은 무엇인가.
이집트 출신인 와일은 처음 만났을 때 퍼커션 연주자로 활동 중이었다. 제주도로 거처를 옮긴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나에게 밴드를 같이 하자고 제안했다. 우리는 제주도에 함께 살면서 음악 작업을 했더니 기타리스트와 베이시스트가 필요했다. 그래서 서울에 있을 때부터 알고 지냈던 오진우와 태히언을 영입했다. 특히, 오진우는 수리수리마하수리 때부터 교류가 많았던 윈디 시티의 멤버였다. 레게나 덥 같은 두 사람의 음악적 성향은 알고 있었지만, 그들이 나와 와일이 추구하는 데저트 블루스를 마음에 들어 할지 알 수 없었다.
다행히 작업물을 들어보고는 굉장히 흥미로워했다. 서로 방향성을 이해하고 있으니 음악 작업을 하는 동안 큰 어려움이나 마찰은 없었다. 아쉬운 점은 우리의 음악이 한국 음악이 아닌 해외 음악으로 여겨진다는 것이다. 그 어디에서도 들을 수 없는 독특한 스타일의 음악으로 느껴질 수 있다. 우리는 한국에 살고 있고 한국에서의 경험을 기반으로 음악을 만들지만 어느 무대나 페스티벌에 가도 국내 음악이라고 잘 받아들여지지는 않는 것 같다. 우리가 외국인이기에 그렇지 않다고 느낄 순 있지만 분명히 한국 음악이다. 그래도 많은 분이 '오마르와 동방전력'의 음악을 좋아해주니 고맙고 행복하다.
한국인들이 이국적이라고 느끼는 이유 중 하나는 가사일 수도 있지 않을까. 한국어 가사를 쓰지 않는데.
좋은 지적이다. 나도 그 점에 동의한다. 한국어를 쓰면 더 많은 사람이 흥미를 느낄 수 있을 거라 생각한다. 문제는 지금 나의 한국어가 6세 아동 수준이라 그런 실력으로 한글 가사를 쓰고 싶진 않다. 아직은 내 감정과 메시지를 표현하려면 영어를 쓸 수밖에 없다. 물론 미래에는 분명 한국어 가사로 된 음악을 만들 것이다. 또 우리는 지금 사운드에 집중하고 있다. 물론 가사도 중요하지만 우리는 소리 자체에서 나오는 감정의 전달을 중요하게 생각한다. 랩을 하거나 힙합을 시도하는 것도 아니기 때문에 가사보다는 음악 자체가 주는 감정의 완성도에 비중을 두게 되었다.
'동방전력'이라는 독특한 명칭을 쓰게 된 이유가 궁금하다.
처음에는 영어로 'Omar And The Eastern Power'라고 불렀다. 우리의 뮤직비디오와 비주얼 아트 작업을 도맡아 해준 친구가 있다. 그가 '동방전력'이라는 이름을 생각해냈다. 우리는 일렉트릭 기타 중심의 밴드라 그 단어가 잘 어울린다고 느꼈다. 이전에는 어쿠스틱 기타도 많이 썼지만, 밴드명을 확실하게 정하고 나서는 일렉트릭 기타와 이펙터가 주는 느낌에 집중했다.
'오마르와 동방전력'의 음악은 1960~70년대 서구 록 음악을 기반으로 한 레게, 블루스, 포크, 사이키델릭과 같은 여러 스타일이 떠오른다. 젊은 세대들에게는 구식으로 느껴질 수도 있을 것 같다. 2020년대에 이런 음악을 한다는 것이 위험 부담으로 오진 않았나.
그럴 수 있다. 그런데 그런 점을 굳이 신경 쓸 필요가 있을까? 우리가 최근 힙합이 유행한다고 해서 그것을 따라가기는 어렵다. 대중 앞에 서는 뮤지션이라고 해서 그들이 요구하고 필요로 하는 바를 따라가는 건 창의적이지 못하고 진실한 것도 아니라 생각한다. 모두를 만족하게 할 수는 없다. 우리가 만들 수 있는 것들이 있고 그런 점들을 좋아해 주는 사람들이 있어서 계속 음악을 한다. 우리는 첫 번째 앨범부터 다양한 장르와 스타일을 구사해 넓은 스펙트럼을 보이려고 했고 다음 작품을 낼수록 점점 진보된 사운드를 내면서 이른바 '구식'이 되지 않으려 노력했다.
'노가다 블루스'는 제목부터 인상 깊다. 이 곡의 탄생 배경이 궁금하다.
서울에서 살았을 때 영어 강사 일을 했었다. 내가 영어 강사와 음악인이라는 신분을 동시에 갖고 있으니 많은 사람이 나를 친절하게 대했다. 좋은 대접이었지만 나는 한국의 더 많은 것들을 직접 보고 느끼고 싶었다. 제주도에 내려가면서 영어 강사 일을 할 수 없게 되어 건설 노동 일을 했다. 하루 일과가 끝나고 녹초가 된 상태에서 바로 현금을 받아 손에 쥐었을 때 느꼈던 희열은 영어 강사로 편하게 돈을 벌 때는 느끼지 못한 감정이었다. 건설 노동 일을 하는 동안 한국어도 많이 늘었고 한국을 다양하게 이해하는데 좋은 경험이 됐다. 한국이 빨리 발전한 밑바탕에는 저렇게 열심히 일하는 노동자들이 있다는 걸 알았다. 그런 것들을 느끼고 만든 곡이 '노가다 블루스'다.
막노동을 하면서 한국 사회의 계층간 불합리와 인종 차별도 느꼈나?
느꼈다. 특히 백인과 백인이 아닌 인종을 구분 지어 바라본다는 느낌을 많이 받았다. 영어 강사 시절과 달리, 건설 노동을 하는 동안 나에 대한 대우가 그렇게 좋지는 않았다. 서울에서 살던 시절의 나는 그저 순진한 외국인이었다. 그래도 내가 찾던 한국의 다양한 모습을 볼 수 있어서 좋았다. 막노동이 끝나면 다른 노동자들과 함께 어울려 술도 자주 마셨는데, 그건 아주 좋은 경험이었다.
솔로 프로젝트 '시드르 무어(Seed Le Moor)'는 전자 음악이다. 완전히 상반된 스타일의 음악을 하게 된 이유는 무엇인가.
악기만 달라져도 곡의 분위기를 완전히 바꿀 수 있고, 나는 그런 방법으로 새로운 사운드를 탐색한다. '오마르와 동방전력'에서도 일렉트릭 기타와 많은 이펙터를 다루다 보니, 어느 순간부터는 오로지 기계로만 가능한 음악을 해보고 싶었다. 기계는 영원히 리듬을 간직한다. 작업 속도도 빠르고 색다른 사운드를 많이 낼 수 있다.
나는 정식으로 음악을 배우지 않았기 때문에 내 귀와 느낌으로 곡을 만든다. 분명 한계가 있는 작업 방식이지만 그 안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모색하는 것이 좋다. 컴퓨터 프로그램을 다루는 것 또한 마찬가지고. 오히려 기존 음악 작업보다 더 어려웠다. 그러다가 작년부터 전자 음악과 관련된 좋은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시드 르 무어는 그렇게 시작했다. 두 개의 곡을 자유롭게 믹싱하는 DJ처럼 작업했고 결과물이 마음에 들었다. 기계를 다루는 동안 즉흥적으로 내 생각을 표현할 수 있다는 점이 제일 좋았다.
2015년, 제주도로 거처를 옮겼다. 제주살이가 본인의 음악에 많은 영향을 준 것 같다.
서울에서의 마지막 해는 나의 침체기였다. 대도시의 삶을 감당하기 어려웠다. 모두가 나를 지켜보고 있는 기분이라 환기가 필요했다. 수리수리마하수리 활동을 하면서 공연 일로 종종 제주도에 갔는데, 같은 한국이지만 매우 다른 환경인 것이 인상 깊었다. 당시 홍대 등지의 많은 아티스트 친구들이 제주도로 거처를 옮겼고 나도 그 흐름에 합류했다. 제주도에서의 경험은 모두 새로웠다. 시골이라 사람도 많지 않고 생활방식도 식사, 노동, 음악으로만 이루어져 단순했다. 서울은 한 곳에 편의점이 너무 많아서 정신 없었는데. 제주도의 마을은 마트도 빵집도 하나뿐이다. 이런 단순한 삶이 내 마음을 달래 주었다. '오마르와 동방전력'의 거의 모든 음악은 제주도에서 완성된 것이다. 제주도에서 태어난 밴드나 다름없다.
제주도의 단순한 생활 방식이 모로코의 생활과 닮아 있어서 안정감을 느낀 것인가.
카사블랑카는 모로코에서 가장 큰 도시지만 서울만큼 붐비는 곳은 아니다. 카사블랑카는 항구도시라 오히려 부산에 더 가깝다. 그래서 바다가 그리웠나 보다. 제주도는 나의 삶의 방식부터 시작해 나 자체를 바꿨다.
앞으로 다른 아티스트들과 작업할 기회가 생길 것이다. 희망하는 아티스트가 있는가.
한국 국악에 관심이 많다. 거문고, 대금 같은 악기 소리가 마음에 들었다. 단순한 협업보다는 이들을 모로코의 음악과 직접 합쳐보고 싶다. 국악뿐만 아니라 다른 아티스트들에게도 언제나 열려 있지만 지금 당장은 내가 하지 못하는 음악들을 새롭게 시도해보고 싶다.
본인이 음악을 하는 가장 근본적인 이유가 궁금하다.
가장 잘할 수 있는 일이니까. 영어 강사 활동이나 건설 노동보다 훨씬 잘하는 일이 음악이다. 그만큼 음악은 나에게 자연스러운 삶의 일부다. 음악이 아닌 새로운 경험을 하는 것도 좋아하지만, 그 경험들은 전부 음악으로 표현된다. 내 삶은 곧 음악이다. 물론, 음악은 언제나 한 자리에만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영감이 떠오르지 않아서 나 스스로 뮤지션이라는 정체성을 부정할 때도 있지만 그러다가도 머릿속에 음악이 다시 스친다. 그래서 음악을 계속 이어 나가고 이에 집중하는 것이 최선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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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즘(www.izm.co.kr)은 음악 평론가 임진모를 주축으로 운영되는 대중음악 웹진이다. 2001년 8월에 오픈한 이래로 매주 가요, 팝, 영화음악에 대한 리뷰를 게재해 오고 있다. 초기에는 한국의 ‘올뮤직가이드’를 목표로 데이터베이스 구축에 힘썼으나 지금은 인터뷰와 리뷰 중심의 웹진에 비중을 두고 있다. 풍부한 자료가 구비된 음악 라이브러리와 필자 개개인의 관점이 살아 있는 비평 사이트를 동시에 추구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