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고등학교를 다닐 적에, 나는 종종 학교에 만화책을 들고 가 이를 급우들과 함께 돌려보곤 했다. 집 근처에 꽤 규모가 되는 비디오·만화책 대여점이 있었고, 영화광이었던 어머니가 이 대여점의 단골손님이었던 지라 나와 대여점 사장님 사이에도 나름 친분이 생겨서, 원하는 만화책을 빌려 보는 건 아주 수월한 일이었다. 하지만 흔한 오타쿠 답게 혼자서 만화를 읽고 마는 것은 영 탐탁지 않았고, 그래서 빌린 만화책을 친구들에게 중간업체 마냥 빌려주며 반강제적으로 이를 대화거리로 만들었던 것이다. 그때 이미 내 취향은 『진격의 거인』이나 『니세코이』 같은 당대의 유행작들과 적잖이 거리를 두어서, 『H2』, 『기생수』, 『킹덤』처럼 좋게 말하면 앞선 세대에 의해 명작 판별을 받은, 나쁘게 말하면 젠체하는 아저씨들의 정전(Canon)에 안정적으로 등재된 작품들을 주로 빌려 갔다. (물론 이제와 돌아보면 잘난 체하고 싶은 마음도 아주 컸다) 이에 불평하는 친구들도 조금은 있었지만, 나는 조금도 신경 쓰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우라사와 나오키의 『몬스터』를 몇 권 빌려 친구들에게 보여줬는데, 그 중 한 녀석이 한 권을 집어 몇 장 들춰보더니 이런 말을 했다. "야 근데 이거 그림체가 너무 구린데? (작가한테) 사람 그리는 재주가 없는 것 같아." 순간 나는 녀석의 뺨을 갈기고 싶은 마음을 필사적으로 참아야 했다. 친구와 싸우는 게 문제가 아니라, 만화책을 학교에 가져왔다는 걸 들켜 압수당할 수 있다는 게 문제였기 때문이었다. 녀석에게서 책을 뺏으며 (지나치게 ‘남성 청소년’ 답게) 욕설과 농담을 섞어 가볍게 핀잔을 주긴 했으나, 그때 생긴 화와 뒤끝은 쉬이 가라앉지 않았다. 지금이야 우라사와 나오키를 싫어하고, 우라사와의 극화체가 그 어린 독자에게 곧장 설득력을 얻기는 어려웠으리란 생각도 들지만, ‘이런 녀석이 함부로 나대게 놔두면 안 된다’라는 (유치하고도 비장한) 복수심이 문자 자체로는 참으로 오래 갔다. 심지어 한참 시간이 지나 비평가로 활동하고 있는 지금의 내 태도에 있어서도 지속될 만큼 말이다.
2023년 7월부터 지금까지 약 1년 동안 나는 출판사 쪽프레스와 함께 5번의 만화비평모임을 기획 및 진행했다. 처음엔 워크숍으로, 나중엔 북클럽과 작가 스터디 등으로 부르곤 했지만 이제는 그냥 만화비평모임이라고 통칭하는 이 모임에서 ‘우리’는 한국에 소개는 됐으나 구체적이고 지속적인 논의의 대상이 되지는 못한 만화들을 함께 읽고 의견을 나누었다. 사실 원래는 크리스 웨어의 『러스티 브라운』이 번역 출간된 것과 더불어 기획된 홍보 행사에 더 가까웠으나, 오카자키 쿄코, 쓰게 요시하루, 하기오 모토 등의 만화가들을 다루고 또 나와 쪽프레스 그리고 참여자들의 열의가 갈수록 고양되면서 그 성격이 점점 바뀐 것이다. 또한 “만화비평모임”이라고 부르긴 하나 꼭 정형화된 비평을 참여자들에게 요구하진 않아서, 작품을 달리 보게끔 하는 비평성을 지닌 리뷰라면 형식과 내용에 상관없이 진지하게 ‘보고’ 의견을 나누기도 했다.
무엇이든 쉽게 빠졌다가 쉽게 싫증을 내는 나로 하여금 예외적으로 이 모임을 지속하게 한 원동력이 대체 뭘까? 이리 자문해 보면, 역시 복수심이 제일 크다는 결론에 이른다. 만화에 있어 나는 2000년대 이글루스·진보넷 등지의 마이너한 만화 블로거들에게서 취향의 세례를 받았는데, 특히 (훗날 북스토리의 그래픽 노블 편집자가 되는) 블로그 ‘청정하수구’의 대산초어는 내게 만화에 대한 개념을 송두리째 바꿔준 ‘어깨 너머의 스승’이었다. 지금껏 만화비평모임에서 다룬 만화가 모두를 그의 블로그에서 처음 알게 되었으니 굳이 말을 더할 필요가 없으리라. 일본만화의 다양성에 있어서든 아니면 그래픽 노블이란 ‘장르’ 때문이든, 만화의 존재가 얼마나 다채롭고 기이한 지를 저 블로거들은 일찍이 내가 가르쳐주었던 것이다. 하지만 이 취향은 사람들 사이에서 순탄히 이어지지 못했다. 저 블로거들이 나이를 먹어가면서 점점 인터넷 하위문화로부터 멀어졌으며, 온라인 콘텐츠가 법적 규제 대상이 되면서 수많은 해적판 번역본 만화들이 무더기로 사라졌다. 즉 남한의 ‘블로그 에라(Blog Era)’가 닫히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면서 해적판 번역본은 ‘서로이웃’ 사이에서만 공유되거나 ‘불펌’을 일삼는 소규모 블로그들로 뿔뿔이 흩어졌으며, 그 사이 만화에 대한 몇몇 블로거들의 몹시 유익한 글은 다리가 끊긴 섬 마냥 아무도 찾지 않게 되었다. 그렇게 취향이 단절되고 작품/작가는 공허한 숭배만 받는 환경에 나(를 포함한 후속 세대 독자)는 갑자기 내던져졌다. 이런 환경은 꽤 오랫동안 이어졌는데, 타카노 후미코나 장 “뫼비우스” 지로의 만화가 정식으로 번역 출간된 이후에도, 혹은 디시인사이드의 (월간)만화 갤러리 등에서 미즈키 시게루나 panpanya같은 만화가들을 직접 (재)발굴한 이후에도 그 취향이 집단적인 것, 나아가 대문자 ‘만화’의 것으로 뿌리내리지는 못했기 때문이다. 각자의 휘발되기 쉬운 취향이 잠시 뭉쳤다가 곧 와해됐을 뿐. 취향의 뿌리가 자리를 잡고 자라게끔 하는 것이 바로 비평의 역할일 터인데, 슬프게도 비평은 여기서 거의 부재했다. 분명 그 이전에도 만화평론가들은 있었고, 2010년대 중반에는 웹툰 시장이 거대해지면서 만화비평이 ‘일단’ 부흥할 것 같은 분위기도 잠깐 있었지만, 그들은 자의로든 타의로든 이 환경을 바꾸지 못했다.
나는 비평의 부재에 어떻게든 복수를 하고 싶었다. 외로운 작품과 독자에게 각각 마땅한 개념적인 자리와 동지를 찾아주며 부재를 메우는 식으로, 즉 우정의 링크를 제공하는 식으로 말이다. (당연하지만 나 역시도 이 링크에 연결되고 싶은 마음이 없다고 할 수 없다) 설사 나중에 다시금 취향의 단절이 일어난다고 해도, 이렇게 가시적인 (임시)공동체를 만들고 또 (작품의 사회적 배경에 대해서든 특정한 표현의 맥락에 대해서든) 공적이며 구체적인 평문을 남긴다면 나중의 독자가 고독하게 취향을 영위할 가능성이 좀 더 줄어들지 않을까? 말하자면 유리병 편지로서 비평. 바로 이런 의미에서 복수심은 만화비평모임의 원동력이 되는 것이다. 물론 이 모임 자체로는 미미한 시도이긴 할 터이다. 하지만 이조차 없다면 복수의 시작도 아예 없으리라. 그래서 나는 만화비평모임을 힘 닫는 데까지 계속 하고자 한다. 줄곧 미미할 지라도, 언젠가의 미지의 독자를 위해서.
한참 글을 쓰다 보니 문득 누군가가 떠오른다. 언젠가 모 영화제에서 마련된 회식에 참여했을 때, 내가 만화비평모임을 하고 있다니까 기분 나쁜 비웃음을 터트리곤 자리를 뜨던 그 누군가. 돌아보면 그 비웃음이 나의 복수심을 보다 충만하고 더욱 지속적으로 만들어준 것 같다. 이 자리를 빌려, 그에게 얕은 감사와 깊은 저주를 표한다.
윤아랑(평론가)
비평가. 대중문화와 시각예술을 주로 다루며, 주체성과 현실 감각을 문제 삼는 문화비평에 관심이 있다. 지은 책으로 『뭔가 배 속에서 부글거리는 기분』(2022), 『영화 카페, 카페 크리틱』(공저, 2023), 『악인의 서사』(공저, 2023)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