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기의 음악 위인 해리 벨라폰테
이즘 특집
20세기 지구촌의 거의 모든 사람들은 그가 누구인지를, 무슨 일을 했는지를 알았다. 미국 최초의 흑인 스타로 불리며 세기적 사랑을 누린 인물이라는 사실도 그들 기억의 깊숙한 곳에 박혔다. (2023.05.12)
재즈 거목 마일즈 데이비스와 존 콜트레인 전기문을 펴낸 작가 애슐리 칸은 2005년 해리 벨라폰테의 컴필레이션 앨범 라이너 노트에 이렇게 썼다.
포크 뮤직 경연 붐과 흑인 공민권운동 행진이 있기 수년 전에, 그리고 월드 뮤직 붐이 도래하기 수십 년 전에 (이미 그것들을 전파한) 해리 벨라폰테가 존재했다.
그가 말한 1950년대를 강타한 모던 포크, 흑인 저항 인권 운동, 그리고 1980년대의 월드 뮤직 인베이전은 엘비스 프레슬리, 밥 딜런, 비틀스, 롤링 스톤스, 마이클 잭슨의 위상에 조금도 뒤짐이 없는 세기적 음악가 해리 벨라폰테를 이해하는데 필수 불가결한 세 가지 키워드다.
서인도 제도 출신 아버지와 자메이카 출신 어머니에서 태어난 흑인 해리 벨라폰테는 1927년 뉴욕 할렘에서 태어난 뒤 유년기를 어머니 고향 자메이카에서 보내면서 도시음악과 대중음악이 아닌 포크, 즉 민요의 고갈되지 않는 특별한 힘을 흡수하게 된다. 자연스런 애착의 결과는 트리니다드 앤 토바고에 기원을 둔 서인도 제도의 민속 음악, 이른바 '칼립소(Calypso)'로 나타난다. 애초 재즈 클럽에서 노래하다가 뉴욕 그리니치 일대에서 재래식 포크음악 즉 민속음악으로 전향해 깨치면서 자신의 DNA에 이끌린 결과였다. 1956년과 1957년 'Jamaica farewell'과 전형적인 카리브 해 노동요 'Banana boat song (day-o)'의 스매시 히트로 그는 단박에 '칼리소의 왕'이란 영예의 별칭을 얻었다.
거역할 수 없는, 넉넉하고 신뢰를 자극하는 목소리는 훤칠하고도 핸섬한 비주얼과 함께 당김 음(싱코페이션)으로 된 4분의 2박자의 칼립소 리듬에 전 세계인들이 홀리는 원천으로 더할 나위가 없었다. 가장 아름답고 완벽한, 역사가 검증한 바리톤 음역과 음색! 기성세대가 환호해마지 않았던 그의 골든 레퍼토리들 'Jerry(this timber got to roll)'(1952), 'Man smart (woman smarter)'(1952), 라이브 버전으로 더 유명했던 'Matilda'(1955)를 위시해 'I do adore her'(1955), 'Coconut woman'(1966) 'Jump in the line(shake, semora)'(1966), 'Jombie jamberee'(1966) 등이 모두 칼립소 혹은 칼립소 스타일의 곡들이었다.
이 가운데 1956년 공전의 히트를 친 앨범 <Calypso>에 수록된 곡 'I do adore her'는 나중 서수남과 하청일 듀오가 창의적으로 개작한 '동물농장'의 원곡이기도 했다. 해리 벨라폰테 음악이 국내 컨트리 송 전파의 전기를 마련했음의 증빙 자료다. 1960년대 말과 1970년대 초 한국의 베이비붐 세대의 통기타 음악이 된 이른바 포크(실은 컨트리음악 요소가 더 차용되었다) 붐에 킹스턴 트리오, 브라더스 포, 밥 딜런, 조안 바에즈와 함께 해리 벨라폰테의 이름을 빠뜨리지 말아야 한다. 사실 밥 딜런도 1962년 해리 벨라폰테가 편곡하고 취입한, 미국 남부 죄수들 사이에서 구전되어온 민요 'Midnight special'에서 하모니카를 불면서 포크음악계에 이름이 퍼지기 시작했다.(해리 벨라폰테는 밥 딜런이 역시 민요 'On top of old smokey'에서도 하모니카를 연주했다고 증언하고 있다)
그의 광활한 도약은 음악 분야로 그치지 않았다. 1950년대 중반 이후부터 음악 혹은 가창에 사회적 의미망을 연결하고 부여하는 시선의 대전환을 꾀했다. 그것은 뿌리의 재조명 재발견이었다.
"나는 그동안 내용이나 언어 파워에 있어서 너무너무 창백한 대중가요 작가들의 음악을 듣고 있었다. 그것은 너무도 뻔하고 진부했다."
"메시지가 중요했다. 난 사람들이 내가 노래하는 방식과 주제를 통해 내가 이민자 부모에게서 태어났고 미국에서 흑인이라는 사실이 뭘 의미하는지를 이해하도록 만들고 싶었다."
실상 뿌리 찾기 노력의 일환인 칼립소 음악에 대한 천착은 그의 알 깨고 나오기 작업을 재촉했다. 그가 나아가 인권 운동가, 저항 운동가로 정체성을 확립하는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1985년 기아에 허덕이는 아프리카를 위한 'We are the world'에 그가 참여한 것도 이 맥락에서 파악해야 한다. 1980년대에 팝 아티스트의 저항은 이전 시대의 반전과 반핵이 아닌 '자선(charity)'의 양상을 띠기 시작했다. 해리 벨라폰테는 한해 전 영국의 'Do they know it's Christmas'를 듣고 미국 판 자선 싱글이 시급하다는 판단 아래, 인맥을 활용해 아프리카 자선을 위한 미국 아티스트연합(USA for Africa)을 결성하고 'We are the world'를 만들어내는데 막후의 지휘자로 암약했다.
타이틀곡이 빅 히트하고 본인이 주연으로 나선 영화 <Island in the sun>(1957)이나 그 이전 1954년 오토 플레밍거의 뮤지컬 <Carmen Jones> 등 영화 뮤지컬 연극과 같은 연기 분야에서도 두각을 나타냈지만, 그래도 활동 터전은 언제나 '음악'이었다. 빌보드 앨범 차트 31주간 정상을 차지한 <Calypso> 앨범은 LP 최초의 밀리언셀러(당연히 아프로 아메리칸 아티스트로도 최초)를 기록한 것은 물론, 1959년과 1960년 두해 연속 일반 아티스트는 꿈도 못 꾸는 라이브 앨범을 발표했다. 1959년 카네기홀에서의 공연 실황은 국내에서 라이선스로 출시되어 'Matilda'는 음악다방의 단골 신청곡이었다.
또한, 이 앨범에서는 유태인들의 결혼식 축가로 사용되어온 이스라엘의 민요 '하바 나길라(Hava nagila)'가 전 세계인들의 애청곡으로 오랫동안 사랑받았다. 여기서 또 하나의 대(大)위업이 추가된다. 상기한 20~30년 앞서 유행을 선도한 월드 뮤직 전령으로서의 전 지구적 영향력이었다. 칼립소의 세계화에 이어 그는 미국과 유럽으로부터의 음악 탈영토화를 조준해 지구촌 각국의 민요를 소개한다는 야망을 불태웠다. 또 다른 이스라엘 민요 'Erev shel shoshanium'(그는 유태인 혈통)이 국내에서 1977년 대학가요제에서 출전자 이명우가 청산별곡을 응용해 '가시리'로 리메이크했듯 이 노래가 세계적 반향을 일으킨 것도 해리 벨라폰테가 불러서였다.
아일랜드 민요 'Danny boy', 멕시코의 민요 'Cu cu ru cu cu paloma', 베네주엘라의 구전 가요 'Venezuela', 일본민요 'Sakura(사쿠라)' 등이 세계 곳곳의 라디오에서 오랜 리퀘스트가 이뤄진 것도 그의 음악적 기여가 아닐 수 없다. 미국 민요로 친숙한 'Midnight special', 'Cotton fields(목화밭)', 'Shenandoah'도 마찬가지다. 우리 기성세대들이 좋아한 'Try to remember'나 'And I love you so'도 어찌 빼놓을 수 있겠는가. 브라더스 포가 불렀든, 나중 홍콩 가수 '여명'의 것이든, '페리 코모'의 버전이든 다 제쳐두고 해리 벨라폰테의 해석만을 챙기는 사람들이 많았다.
그가 얼마 전 2023년 4월25일 96세의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한 세대와 시대가 역사 속으로 들어간다는 생각마저 든다. 과거 뉴욕의 재즈 클럽 '빌리지 뱅거드'에서 노래하는 것을 보고 그의 멘토이자 전설적 배우 겸 가수인 '폴 로비슨(Paul Robeson)'은 말했다.
"당신은 위대한 모험을 하고 있네요. 사람들로 하여금 당신의 노래를 부르게끔 해요. 그럼 그들은 당신이 어떤 사람인지 알고 싶어 할 거요!"
20세기 지구촌의 거의 모든 사람들은 그가 누구인지를, 무슨 일을 했는지를 알았다. 미국 최초의 흑인 스타로 불리며 세기적 사랑을 누린 인물이라는 사실도 그들 기억의 깊숙한 곳에 박혔다.
추천기사
관련태그: 채널예스, 예스24, 이즘특집, 칼립소, 해리 벨라폰테, HarryBelafonte, Calypso
이즘(www.izm.co.kr)은 음악 평론가 임진모를 주축으로 운영되는 대중음악 웹진이다. 2001년 8월에 오픈한 이래로 매주 가요, 팝, 영화음악에 대한 리뷰를 게재해 오고 있다. 초기에는 한국의 ‘올뮤직가이드’를 목표로 데이터베이스 구축에 힘썼으나 지금은 인터뷰와 리뷰 중심의 웹진에 비중을 두고 있다. 풍부한 자료가 구비된 음악 라이브러리와 필자 개개인의 관점이 살아 있는 비평 사이트를 동시에 추구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