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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중혁의 북커버러버] 가장 좋아하는 표지 디자이너 - 『딕 브루너』
1화 - 『딕 브루너』
딕 브루너의 표지는 간결하지만 복잡했고, 유머러스하면서도 유혹적이었고, 이야기 전달에 있어서는 누구보다 선명했지. 자신이 하고 싶었던 예술을 하면서도 상업적인 감각을 잊지 않았던 딕 브루너의 표지를 보면서, 나는 지금도 이렇게 중얼거려. "딕, 언젠가 당신에게 내 소설의 북커버를 부탁하고 싶었는데, 너무 안타까워요." (2023.05.04)
격주 목요일, 소설가 김중혁이 좋아하는 북커버를 소개하는 칼럼 ‘김중혁의 북커버러버’를 연재합니다. |
안녕, 나는 '북커버러버(BookCoverLover)'라고 해. 줄여서 BCL, 세상 모든 표지를 사랑하지. 모든 책을 사랑하지는 않지만 모든 북커버를 사랑해. 엉망진창인 북커버도 존재 이유는 있어. 디자이너가 건성으로 만들었대도, 아니, 디자이너까지 개입시키는 건 사치라고 생각한 편집자가 대충 제목만 적어놓은 북커버라도 나는 좋아하지. 모든 북커버는 책을 대변할 수밖에 없어. 아무리 소심하고 내성적인 표지더라도 맨 앞에 서 있어야 해. 책의 운명을 떠안은 채 제일 앞에 서 있는 셈이지. 가끔 라면 냄비에 깔리기도 하고, 도서관에 들어가서는 몸에다 스티커를 붙여야 하고, 어떤 책을 읽는지 꽁꽁 숨기고 싶어하는 사람에게는 북커버의 커버로 가려질 수밖에 없고, 서가에 꽂혀 있을 때에는 책등만 보이고 얼굴조차 드러낼 수 없는 기구한 운명의 북커버를 어떻게 사랑하지 않을 수 있겠어.
오늘은 첫 시간이니까 북커버러버가 가장 좋아하는 표지 디자이너 이야기를 해야겠어. 이름하여 '북커버러버스북커버디자이너'라고 해야겠지. 모두 '미피(Miffy)'라는 캐릭터를 알 거야. 귀를 쫑긋 세우고 있고 입에는 엑스 표시를 하고 있는 토끼. 미피를 만든 디자이너는 네덜란드 사람 딕 브루너야. 딕 브루너는 1927년 정묘년 붉은 토끼의 해에 태어났어. 토끼를 그릴 운명이었던 거지. 1955년 여름, 딕 브루너는 아내와 한 살 짜리 아들 시르크와 가족 여행을 떠났어. 여행을 즐기던 어느 날, 세 가족은 작은 토끼 한 마리가 모래 언덕으로 뛰어가는 걸 보았지. 딕은 아들에게 작은 토끼를 그려주었고, 전설이 시작됐어. 딕 브루너가 세상을 떠나던 2017년까지 미피는 50개 이상 언어로 번역됐고, 엄청난 규모의 부가 가치를 창출해냈어. 노란색을 좋아하고 토끼를 좋아하고, 귀여운 걸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집에 미피 인형 하나쯤은 있을 거야. 우리 집에도 여러 개 있어.미피가 엄청난 인기를 끄는 바람에 오해도 생겼지. 딕 브루너가 평생 귀여운 토끼 그림만 그리다 간 줄 아는 사람이 많아. 아냐. 귀여운 돼지도 그렸고, 몹시 예쁜 곰도 그렸어. 고양이도 그렸어. 그리고 무엇보다 끝내주는 북커버들을 남겼지.
딕 브루너는 자유로운 예술가의 삶을 꿈꾸다가 결혼하면서 직장인이 되었어. 아내가 된 이레네의 아버지, 그러니까 장인어른이 "결혼하려면 안정적인 직업을 가지라"고 했기 때문이지. 딕의 아버지가 'A.W.브루너'라는 출판사를 운영하고 있었는데 곧장 회사의 표지 디자이너로 취직했어. 정직원으로. 딕 브루너는 예술가의 꿈이 완전히 끝나버렸다고 생각했지만 반대였어. 안정감 덕분에 창조적인 실험을 할 수 있었지. 아내 이레네는 이렇게 말했대.
"딕은 용감한 사람이었어요. 여러 가지 다른 일들을 해낸 걸 보면 알 수 있지요. 때로는 위험도 감수했어요. 책 표지 작업을 하지 않았다면 딕은 고유의 그래픽 스타일을 발전시킬 수 없었을 것입니다." _『딕 브루너』 38p.
딕은 책 표지에다 자신의 모든 예술혼을 쏟아붓지 않았어. 어떻게 하면 잘 팔릴 책을 만들까 고민했지. 단번에 독자들의 흥미를 끌고, 여행자들의 눈길을 사로잡고, 출판사의 인지도를 높일 책. 딕 브루너의 북커버 초기작을 보고 있으면 여전히 깜짝 놀라게 돼. 단순한 면의 조합으로 이뤄진 형태와 과감한 색 선택으로 세련된 표지를 만들어냈지. 장 브루스의 『방콕에 울린 총탄』의 책표지에는 대나무 숲 사이를 지나가는 남자의 실루엣을 정말 근사하게 표현해냈어. 내가 좋아하는 북커버야.
내가 딕 브루너의 북커버를 얼마나 좋아했냐면, 실제 작품을 보기 위해 네덜란드 위트레흐트에 있는 딕 브루너 뮤지엄에도 다녀왔어. 딕 브루너가 살아 있을 때였지. 거기에서 딕 브루너의 초기 북커버와 미피 캐릭터의 초기 모습도 볼 수 있었어. 딕 브루너는 거의 평생을 위트레흐트에 살았고, 자전거를 타고 가끔 뮤지엄에 들르기도 했다던데, 나는 만나지 못했지. 그래도 딕 브루너의 숨결은 느낄 수 있었어.
딕은 디자인을 하기 위해 원고 더미 상태로 배달 온 책을 모두 읽었대. 분위기를 파악하고, 스케치를 하고, 색채의 관점에서 이야기를 보고, 자신이 주인공이 되면 어떤 일이 벌어질지 상상했대. 책 속에 흠뻑 빠져든 거지.
딕 브루너의 표지 중 압권은 조르주 심농의 '매그레' 시리즈라고 생각해. 모든 매그레 시리즈에는 파이프가 등장하는데, 하나의 사물로 시리즈의 연결성을 만든 거지. 조르주 심농은 딕 브루너에게 이런 편지를 보냈어.
"내 신작을 위해 만들어준 표지는 전작보다도 간결했소. 내가 글을 쓰며 성취하려는 것을 당신은 그림을 통해 성취했다오." _『딕 브루너』 60쪽
딕 브루너의 표지는 간결하지만 복잡했고, 유머러스하면서도 유혹적이었고, 이야기 전달에 있어서는 누구보다 선명했지. 자신이 하고 싶었던 예술을 하면서도 상업적인 감각을 잊지 않았던 딕 브루너의 표지를 보면서, 나는 지금도 이렇게 중얼거려.
"딕, 언젠가 당신에게 내 소설의 북커버를 부탁하고 싶었는데, 너무 안타까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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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태그: 채널예스, 예스24, 김중혁의북커버러버, 딕브루너, 미피, 북커버, 책표지, 북디자인
소설 쓰고 산문도 쓰고 칼럼도 쓴다. 『스마일』, 『좀비들』, 『미스터 모노레일』,『뭐라도 되겠지』, 『메이드 인 공장』 등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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