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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룸펜매뉴얼] 엄주의 여성의 몸 그리는 법

뉴스레터 룸펜 (2) - 엄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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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년 동안 기능에 충실한 몸으로 살았다. (2022.09.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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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년 동안 기능에 충실한 몸으로 살았다. 먹고 싸고 자고 뛰어놀고 롤러블레이드를 타고 정글짐을 위아래로 넘나들며 일주일에 두 번은 충실하게 수영을 가고 방과 후에는 집 근처 태양의 집 옥상에서 방방을 뛰며 태권도에 가 친구들과 구르며 보낸 14년이었다.

그러나 곧 기능에 충실하던 몸이 다른 기능을 가진 몸으로 변하는 걸 받아들여야 하는 날이 왔다.

생리였다. 그날 이후로 체육 활동을 단계적으로 졸업하고 다른 이슈에 민감해지기 시작했다. 기능에 충실한 몸이 아닌 보이는 여성의 몸에 대한 집착이었다. 내가 어떻게 생겼는지 하루에도 몇 번씩 거울을 보고 어디가 미운지 헤아려보며 코의 블랙헤드 같은 작은 것들이 큰 문제로 다가오니 점점 기능을 잊은 몸으로 살아가게 되었다.

다시 기능에 충실한 몸에 집중한지는 얼마 되지 않는다. 코로나가 터지기 2년 전에 수영과 필라테스를 시작했다. 하루 종일 앉아 컴퓨터 작업을 하면서 일자로 곧게 뻗은 목으로 두통에 시달리다가 체형 교정을 위해 어쩔 수 없이 시작한 것이다. 운 좋게 집 주변 걸어서 5분도 안되는 거리에 수영장과 체육 센터가 있어 저렴한 가격으로 오전에 운동을 하기 시작했다. 그때부터였다. 다양한 나이의 여성의 몸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한 것이. 처음 수영을 등록할 때는 늘어난 군살과 뒤틀린 척추와 굽은 목이 창피했다. 그러나 샤워실에서 만난 나이 든 여성들과 뒤섞여 수영복을 입기 시작하면 그런 것들은 눈에 보이지 않는다. 어떤 몸이든 지치지 않고 추진을 잘하는 몸이 최고의 몸인 것이다. 필라테스도 마찬가지였다. 기능에 집중하는 몸은 수치를 모른다. 오늘 자유형 몇 바퀴를 지치지 않고 돌았는지, 필라테스의 어려운 동작을 어렵지 않게 잘 이행했는지가 가장 중요한 것이다. 볼록 튀어나온 아랫배, 얇아진 팔다리, 제모하지 않은 겨드랑이 털은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다. 되려 여성의 다양한 몸이 주는 시각적 쾌감이 있었다.

'아 이런 몸을 잊고 있었다'

또래의 여성들이 곧게 뻗은 다리와 들어간 허리, 깨끗한 피부를 신경 쓰며 관리할 때 어쩐지 동조하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은 불안함이 있었는데, 운동하는 나이 든 여성들과 함께 있을 때 비로소 자유로움을 느꼈다. 그 자유는 다분히 시각적인 부분에 국한된 것으로 기능에 충실하지 못한 몸은 자유형 한 바퀴에 얼굴을 벌겋게 만들어 또 다른 수치심을 갖게 만들었지만 말이다. 어리석지만 타인의 몸을 사랑하게 되니 비로소 내 몸도 사랑할 준비가 되었다. 몸의 상처나 티눈, 기미나 주근깨, 두꺼워진 허벅지나 종아리는 기능에 충실해지는 순간, 아무것도 아닌 게 된다. 나는 집중하는 사람을 아주 사랑한다. 스스로가 늘 어딘가에 집중하고 있던 상태로 인생을 살아와서 그런 것이 아닌가 싶지만 운동에 집중하는 몸은 참 아름답다.

모르던 근육을 깨워내고 자세를 바로잡아 최고의 효율을 끌어내는 몸은 미디어가 보여주는 정돈된 몸과 완전히 다르다. 특히 노인의 근육이 참 좋다. 세월이 쌓여 특정한 부분이 발달된 근육은 그 사람의 역사가 된다. 또래보다 건강하게 나이 들어가는 노인의 모습을 보면 늙는 것에 대한 불안도 줄어든다.

매일 아침 운동을 하며 다양한 여성의 몸을 눈에 담는다.

촘촘하게 애정을 뿌려 그림으로 옮긴다.

이제는 나의 그림도 기능하는 몸에 집중할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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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ㆍ사진 | 엄주(일러스트레이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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