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읽아웃] 영화 기자가 좋은 이유 (G. 김혜리 작가)
책읽아웃 - 오은의 옹기종기 (291회) 『묘사하는 마음』
"영화는 자력으로 멈추기 힘들게 돼버린 이 컨베이어 벨트에 브레이크를 걸 수 있는 힘을 가졌다"고 말하는, 영화 산문집 『묘사하는 마음』을 출간하신 김혜리 작가님 나오셨습니다. (2022.09.15)
삶은 한번 갔던 자리로 돌아가는 일로 채워져 있다. 우리는 윤희정의 말대로 "지키지 않을 것 같으면 무너질까 봐 무서워서" 루틴을 엄수하기도 하고 "사는 느낌을 매일 확인하는 경험"에 기쁘게 자족하기도 한다. 반복 자체는 두려워할 저주도 안전한 성도 아니다. 분명한 진실은, 우리가 비슷한 장소에서 비슷한 미덕과 결함을 가진 사람들과 비슷한 행위를 거듭하면서도 끊임없이 조금 더 잘 살기를 소망한다는 사실이다.
안녕하세요. <오은의 옹기종기> 오은입니다. 김혜리 작가님의 영화 산문집 『묘사하는 마음』에서 한 대목을 읽어드렸습니다. 우리는 "양질의 시간을 찾아서 영화관에 간다"고 김혜리 작가님은 말씀하시죠. 영화의 매혹, 영화와 영화가 교차하며 튀어 오르는 경이, 그 안에 담긴 놀라운 통찰들. <씨네21>에서 오랫동안 연재되었던 '김혜리의 영화의 일기'에는 그 모든 것이 담겨 있었습니다. 오늘 <책읽아웃 – 오은의 옹기종기>에 5년 만의 신작 『묘사하는 마음』을 펴내신 <씨네21> 기자, 김혜리 작가님을 모시고 영화를 보고, 글을 쓰고, 또 말을 하면서 영화를 '묘사하는' 김혜리 작가님의 꾸준하고도 탁월한 작업에 대해 들어보겠습니다.
오은 : 『그림과 그림자』에서 "모든 외출은 작은 결의를 요하는 모험이다"라는 말씀하셨는데요.(웃음) 오늘 외출은 어떤 모험이었는지 궁금해요.
김혜리 : 책을 내서 평소와 다르게 매일 나갈 일이 생기는 것 같은데요. 모처럼 하늘이 개서, 덕분에 볕을 좀 쐬겠구나, 생각하면서 나왔습니다.
오은 : 5년 만에 영화 산문집 『묘사하는 마음』이 출간됐어요. 책을 출간하고 나면 어떤 마음이 생기나요?
김혜리 : 저는 사실 저자로서의 정체성은 별로 없어요. 책을 쓰는 사람이라는 생각을 잘 안 하고 있어서 '책 낼 때가 됐다' 같은 마음은 전혀 없거든요. 그래도 이럭저럭 기사를 모아서 내기도 하고 그러면서 부끄럽게 권수가 쌓이긴 했더라고요. 책을 낼 때는 매번 비슷한 것 같아요. '많이 읽어주셨으면 좋겠다'하는 마음과, 부끄러우니까 그냥 소리 없이 지나갔으면 좋겠다는 마음, 그래도 책을 낸 출판사에 손해는 안 끼쳤으면 좋겠다는 마음, 딱 세 가지예요.
오은 : 마음산책에서 출판사의 책은 초판에 편집자 엽서가 들어 있잖아요. 이번 책에 이런 글이 있어요. '이 책의 서문을 받고는 좀 웃었습니다. 김혜리 저자는 자신의 글을 가리켜 영화의 그림자나 밟는 남루한 글이라고 표현하셨더군요.' 저 역시 서문을 읽고 충격 받았거든요. 어떻게 이런 문장을 쓰시는 분이 자신의 글을 이렇게 낮게 이야기를 할 수 있을까, 하고요.
김혜리 : 사람들이 너무 너그러운 것 같고요. 사실 제가 제일 잘 알죠. 제 글이 책으로 묶여 나올 만한 글로써 자격이 있을까, 하는 질문에 대해서는 좀 아슬아슬한 선에 서 있는 글 같아요.
오은 : 제가 아까 최근에 출간된 제 책을 한 권 드렸는데, 다시 회수를 해야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웃음) 책 내지에 서명 문구를 '통로 쪽 좌석에서 혼자 영화를 보는 당신에게'라고 쓰셨어요. 여기서 통로라는 단어와 혼자라는 상태가 김혜리 작가님이 영화를 보는 방식하고도 맞닿아 있지 않을까 생각했어요.
김혜리 : 말씀을 듣고 보니 그러네요. 저는 한쪽이라도 옆사람이 없는 자리, 약간 옆에 숨 쉴 틈이 있는 자리를 선호해요. 그래서 제가 선택할 수 있는 환경에서는 통로 쪽을 선택하는데요. 아이맥스는 조금 다르긴 해요. 아무래도 H열보다는 뒤쪽을 선호하죠. 너무 샅샅이 얘기를 하네요.(웃음)
오은 : 지금까지 하나의 직업을 가졌다는 내용의 작가 소개가 그간의 저서 곳곳에 담겨 있습니다. 직업에 대한 각별한 마음도 엿볼 수 있는 대목인데요. 기자의 일을 계속 해올 수 있었던 이유 좋아하는 이유가 궁금했어요. 사실 좋아하지 않으면 지속적으로 하기 힘들잖아요.
김혜리 : 어떤 일을 전문가로서 하기에는 준비가 잘 안 됐다고 생각해서, 잡지 기자가 일을 하면서 계속 공부할 수 있는 점이 좋았어요. 영화 개봉의 우연에 따라서, 그냥 그 영화를 얘기하기 위해서 이것저것 공부하게 되고요. 다음에 볼 책이 뭔지도 영화가 정해주고 그랬던 거죠. 그리고 제가 평생 애써도 세상에는 못 가볼 곳이 더 많잖아요. 이 한계를 깨닫고 보니까 영화를 통해 가볼 수 있는 많은 공간들, 어떤 도시의 골목들, 그런 것들이 굉장히 값지게 느껴졌어요. 이후 몇 년 일을 하고 나서는 영화 기자일을 하면 만나게 되는 영화를 만드는 사람들이 좋았어요. 그분들이 대체로 저는 좋았고요. 그래서 그만둘 결심을 계속 유예하며 해오지 않았나 싶어요. 실제로 좀 관성적 인간이라 새로운 일을 도모하는 데 아주 게으릅니다.(웃음)
오은 : 이제 작가님께서 직접 『묘사하는 마음』이 어떤 책인지 소개해 주시는 시간을 갖도록 하겠습니다.
김혜리 : 이 책은 에세이적 성격이 강한 리뷰를 한 데 묶은 책이에요. '배우론'과 이천년대 이후 할리우드 블록버스터의 전례 없는 경향에 대한 관찰이 한 챕터씩 있고요. 나머지는 한 편 한 편의 영화에 대한 리뷰적 에세이라고 볼 수 있는데요. 어떤 영화를 방금 보셨는데 그 영화에 대해서 남들은 어떻게 생각했나 궁금하시거나 과거에 봤던 영화가 책의 목차 중에 있을 때 한 편씩 쉬는 시간에 읽으시면 읽을 만하실 것 같습니다.
오은 : 읽다 보면 사실 영화를 보지 않더라도 왠지 영화에 발을 좀 담그고 나온 기분이 들거든요. 작가님이 영화를 보지 않은 사람이 이 영화를 보게끔 유도하는 역할도 하고 계신다고 느꼈어요.
김혜리 : 그래서 약간 고민한 적도 있어요. 홍보 쪽으로 가야 되나, 하고요.(웃음) 팟캐스트 <김혜리의 필름클럽>에서도 어떤 영화의 좋았던 점을 얘기하다 보면, 자체 에스컬레이션이 돼서 실제로 방송 시작하기 전에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좋은 영화처럼 분위기가 흘러갈 때가 있어요. 그러면 꼭 끝에 가서 덧붙이죠. '환불은 안 해드립니다.'(웃음) 그런데 글도 그래요. 영화가 40의 단점과 60의 장점이 있다, 근데 장점에 대해 이미 다른 사람들이 많이 얘기를 했다, 그래서 내 글의 토픽을 '이 영화가 어떤 점이 부족하다'고 일단 잡으면요. 부정적인 하나의 문장을 쓰고 나면 그걸 뒷받침하기 위해서 또 다른 것들이 끌려 나오잖아요. 그 오차라는 게 생기게 돼요.
오은 : 제목이 참 좋다고 느끼면서도 한편으로는 이상한 생각이 들었어요. 제가 생각하는 영화 기자나 평론가의 일은 묘사보다는 설명에 더 가까운 것이 아닐까 생각했었거든요. 설명과 묘사 중 김혜리 작가님이 끌리는 건 역시 묘사인 걸까요?
김혜리 : 그렇죠, 다른 예술도 다 그렇지만 저는 영화는 참 설명하기 어렵다고 생각하거든요. '시점샷'이라는 게 있잖아요. 영화를 이루는 수많은 샷 중에 일부 샷들은 누구의 시점인지가 분명하지만 사실 대부분의 중간에 있는 샷들은 누구의 시선인지 모호해요. 감독의 시선만도 아닌 슛들도 되게 많고요. 그래서 영화는 반쯤은 우리 머릿속에서 완성되는 거거든요. 그것에 대해 언어라는 형태로 어떤 설명을 한다는 게 사실 좀 앙상해질 수밖에 없는 면이 있죠.
제가 생각하는 묘사는 내가 본 그 영화랑 닮은 꼴을 글로 짓는 것이에요. 그 영화의 톤이나 매너, 그러니까 내가 극장에서 받은 느낌을 유사한 모델로 만들어서 '이런 거예요'하고 보여드리는 기분이거든요. 때문에 그 안에는 극장에서 반응했던 저의 상태도 들어있고요. 이건 설명과는 너무 거리가 멀고, 그나마 글쓰기를 뜻하는 동사 중에서는 '묘사하다'가 비슷한 것 같다는 생각이에요.
오은 : 이제 <오은의 옹기종기> 공식 질문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책읽아웃> 청취자 분들에게 추천하고 싶은 단 한 권의 책을 소개해 주세요.
김혜리 : 사실 이런 질문에 제일 취약해요. 지금 소개하는 책은 2022년 9월 어느 날 골랐을 때에 우연히 잡은 책인 거고, 단 한 권의 책이라는 건 절대 아닙니다. 『호밀밭의 파수꾼』으로 잘 아시는 J.D 샐린저의 『목수들아, 대들보를 높이 올려라』라는 책이에요. 정영목 선생님이 번역하신 소설집인데요. 두 편의 중편으로 이루어져 있어요. 이 책을 왜 골랐는지 설명하는 대신에 책의 한 부분을 읽어드리면 될 것 같아요.
나는 이야기꾼, 그러나 매우 개인적으로 절실한 욕구를 가진 이야기꾼이다. 나는 그를 소개하고 싶고, 묘사하고 싶고, 그에 관한 추억거리나 부적을 나눠주고 싶고, 지갑을 열어 그의 스냅 사진을 돌려보게 하고 싶고, 내 본능에 따라 행동하고 싶다. 이런 기분으로는 감히 단편소설의 형식 근처에도 갈 수가 없다. 단편소설의 형식은 나 같이 거리를 두지 못하는 작고 뚱뚱한 작가를 통째로 삼켜버릴 것이다.
제가 쓰고 싶은 글의 이데아가 이 부분 같아요. 많은 부분에서 '글쓰기는 이제 나한테 너무 힘들어'라고 반쯤 포기하기는 했지만, 이런 마음이 용솟음 칠 때가 있거든요. 묘사하고 싶고, 부적을 나눠주고 싶고, 지갑을 열어서 내가 간직하고 있는 그 대상의 사진을 독자들과 같이 돌려보고 싶은 그런 욕망이 생길 때가 있어요. 보통, 『호밀밭의 파수꾼』을 읽으시지만 이 책에 제가 문장 테크니션으로써 너무 부러워하는 부분이 있어요. 그런 부분에서는 글쓰기에 관심 있는 분들께도 좋을 것 같습니다.
*김혜리 <씨네21> 편집 위원. 2008년 로테르담 영화제 심사위원으로 위촉되었다. 그녀는 인터뷰어로서 붙임성과 순발력은 좋지 않지만, 어딘가 절박해 보이는 인상의 도움을 받고 있다고 우스갯소리로 이야기한다. 새로운 약속 장소로 향할 때마다 팔뚝에 잔소름이 돋을 만큼 긴장하면서도, 한 번쯤 대화하고 싶은 사람들의 이름을 수첩 한 페이지에 남몰래 적어넣고 있는, 오늘도 열정적인 인터뷰어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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