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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용준의 짧은 소설] 해피 엔딩

<월간 채널예스> 2022년 5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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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을 쓰기 어려운 게 바로 그거야. 아무리 노력해도 괴상한 삶을 따라잡을 수가 없거든. 그 어떤 끔찍한 상상을 해도 현실은 그것보다 끔찍하니까. (2022.05.02)


기억을 되짚어보자. 새벽이었고 맥주를 두 캔 마셨다. 울고 싶지 않다고 몇 페이지에 걸쳐 우는 소리를 하는 인물이 나오는 소설을 조금 읽었고, 전개가 가로막힌 원고를 붙들고 있었다. 졸렸고, 읽기 싫고, 쓰기는 더 싫었지만, 관두고 잠들 수 없었다. 어떻게든 써야 했다. 글이란 게 원래 마음처럼 써지지 않는 거라지만 이번엔 기이할 정도로 안 써졌다. 뭘 써야 할지 생각이 안 나는 것은 아니다. 생각은 났지만 적절한 문장이 떠오르지 않는 것도 아니다. 괜찮은 아이디어도 있었고 이렇게 쓰면 되겠다는 나름의 판단도 있었다. 하지만 실제로 타이핑을 하면 뜬금없는 단어로 이루어진 문장이 써졌다. 예상치 못한 장면이 떠오르거나 뜻밖의 문장을 만날 수 있지만 이건 그것과 다르다. 내 손이 아닌 것 같고 내 생각이 아닌 것 같다. 아니, 생각과 손이 따로 노는 것 같다. 그 기분을 뭐라고 해야 할까. 모르겠다. 막막하다. 피곤하다. 현기증이 느껴졌다. 어지럽고 속이 울렁거렸다. 눈을 감고 책상에 엎드려 이 진동이 지나가길 기다렸지만 흔들림은 멈추지 않았다. 

침대로 기어갔다. 몰라. 그냥 자자. 자고 나면 내일 어떻게든 되겠지. 그러나 그것조차 쉽지 않았다. 닫고 있는 눈꺼풀 안쪽이 뜨거워졌고 눈물이 질질 흘렀으며 망할 어지럼증은 사라지지 않았다. 그냥 흔들리는 것이 아니라 회전하는 무엇인가가 정수리를 뚫고 들어오는 느낌이었다. 아니, 뭔가가 내 안의 커다란 나사를 돌려 빼내고 있다. 뭐가 됐든 느껴본 적 없는 어지러움. 그러다 갑자기 기억이 툭, 끊어졌다. 잠든 것과는 다른. 누군가 완력으로 정신을 강제로 뜯어낸 것 같은.

“죽어.”

무슨 소리? 잠에서 깼다. 눈은 떠지지 않고 팔다리는 움직이지 않았다. 느리게 뛰는 심장. 미지근한 피. 죽은 듯 누운 신경. 감각이 없다. 나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걸까. 손가락을 어떻게 움직였더라. 눈꺼풀을 들어 올리는 방법은 뭐고, 침대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무엇을 해야 하는 거지? 알고 있었는데, 고민 없이 그냥 되던 거였는데, 모르겠다. 여전히 꿈인 걸까? 가위에 눌렸나? 몸은 죽고 정신만 살아 있는 상태? 덧없는 육체 위에 홀로그램처럼 겹쳐 있는 유령 같은? 피곤하다. 생각. 그만하고 싶은데 생각 외에 할 수 있는 것이 없다. 희미하게 몸의 윤곽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아직 들어 올릴 수 없지만 미약한 신경이 팔과 다리 밑에 눌려 꿈틀거리고 있었다. 아프다. 이상한 통증이구나. 몸의 도처에서 피어오르는 연기. 불꽃은 보이지 않지만 열기가 느껴진다. 몸 여기저기 숯불이 박혀 있다. 숨 쉴 때마다 붉어지는 불쾌한 아픔. 아, 이 기분 뭐야. 끔찍하다.

진흙에 파묻힌 시간. 관 속에 누운 몸. 내가 여기에 갇혀 있다는 것을 아는 이가 없다. 이렇게 죽는 걸까? 음…. 죽는 거지 뭐. 생물은 결국 무생물이 되는 거니까. 피가 식고 심장이 멈추고 생각이 사라지면 사물이 되는 거. 알고 있잖아. 받아들이자. 죽음. 그래. 그날이 왔다. 눈이 떠졌다. 내 힘은 아니다. 무언가 내 몸을 만졌고 나는 다시 작동됐다. 탁상시계가 바닥에 넘어져 있다. 각기 다른 방향을 향한 세 개의 침. 시침은 5에, 분침은 45에, 초침은 24에 멈춰 있다. 마지막 시각은 새벽이었을까. 오후였을까. 어지럽다. 눈을 떠도 눈을 감아도 현기증이 느껴진다. 웅크린 채 바닥을 봤다. 동전 크기의 물 얼룩이 내 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일어나자. 정신을 차리자. 축 늘어진 왼손을 봤다. 오랫동안 내 것이었던 손이 남의 것처럼 낯설었다. 긴장 없이 늘어진 다섯 개의 손가락. 움직여라. 움직여라. 그 순간 엄지가 꿈틀거렸다. 하, 웃음이 나왔다. 손가락 하나가 움직이자 얼었던 감각의 수면이 깨졌다. 됐다. 돌아왔다. 돌아왔어. 주먹을 천천히 쥐었다 펴며 팔목을 돌렸다. 호흡을 고르고 서서히 몸을 일으켰다. 어깨 위에 무거운 바위가 짓누르고 있는 것처럼 힘이 들었고 무릎은 불안하게 흔들렸다. 두려움과 흥분이 뒤섞인 묘한 기분에 휩싸여 거울을 봤다. 세상에. 몸의 모든 부분이 반 토막씩 줄어들었다. 키도 줄었고 팔도 짧아졌다. 허벅지도 배도 종아리도 한 주먹씩 사라진 것 같다. 갈비뼈가 피부에 드러나 보일 정도로 앙상해진 몸뚱이. 어려진 걸까? 아니. 반대다. 말라붙은 얼굴은 곧 죽을 노인처럼 보였다. 볼을 쓰다듬고 입을 벌려 소리를 내고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뺨을 때려봤다. 아, 통증. 꿈은 아니다. 꿈이 아니라고? 이게 꿈이 아니면 도대체 뭐란 말인가. 서 있을 힘이 없어 거실 바닥에 주저앉았다. 고개를 돌려 소파를 봤다. 어떤 남자가 앉아 있었다. 한숨이 절로 나왔다. 나. 미쳤구나. 망상. 환상. 아니면 몽유하는 병에 걸린 걸까? 내가 여기 있는데 저기에 앉은 내가 나를 쳐다보고 있다는 게 말이 되나? 나는 그를 모른 척하고 거실을 가로질러 걸어갔다. 당장이라도 쓰러질 것처럼 다리가 떨렸지만 그 앞에서 약한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았기에 버텼다. 그는 시선을 바닥에 둔 채 가만히 있더니 짜증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너는 왜. 아직도. 살아 있는 거지?”

그를 봤다. 당황스러웠다. 나와 똑같이 생긴 사람이 말을 걸고 있었다. 목소리도 흡사했고 표정도 비슷했다. 그는 불만이 가득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이래서는 곤란하잖아. 계약 위반이야.” 

그는 긴 여행을 하고 있는 여행자처럼 지쳐 보였다. 소파에 등을 기대고 왼손을 이마에 올린 채 무슨 말인지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계속 중얼거리고 있었다. 나는 두려운 마음을 감추려 목소리를 꾹 눌러 물었다.

“누구세요?”

그는 실눈을 떠 나를 쳐다보고 다시 눈을 감았다. 그의 입술에 기분 나쁜 냉소가 걸려 있었다. 화가 났지만 지금 나는 언성을 높여 그를 나무랄 힘이 없고 끌어낼 힘은 더더욱 없었다. 나중에 다시 이야기합시다, 속으로 말하고 방에 들어와 침대에 누웠다.

“일어나 봐.”

눈을 떴고 낭패감이 밀려들었다. 아직도. 여전히. 나를 닮은 그 사람. 팔짱을 끼고 성난 표정으로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나는 본능적으로 방어 자세를 취하며 일어나려 했다. 비명을 지를 뻔했다. 뼈가 으스러진 듯 사지가 아팠다. 나는 어금니를 깨물고 몸을 일으켰다. 그는 질문인지 혼잣말인지 모를 말을 중얼거렸다.

“원래는 이렇게 서로 만날 일은 없어야 하잖아….”

그는 골똘한 표정으로 내 눈을 유심히 들여다보더니 침대에 걸터앉았다. 가까이 앉으라는 듯 손바닥으로 옆자리를 툭툭 두드렸다. 나는 이끌리듯 그의 옆에 앉았다.

“기억이 전혀 안 나는 거야? 하…. 아무것도 모르는 멍청한 표정을 보니까 속이 뒤집히네. 이해 못 하고 믿지 않겠지만 설명해줄게. 믿든 안 믿든 상관없어. 너는 곧 죽을 거야. 하지만 걱정 마. 내가 널 대신할 거니까.”

그의 얼굴. 거울을 보고 있는 것 같다. 오래전 내 얼굴이다. 젊고 단단하고 오만했던 표정이 그에게 있다. 그는 기이한 이야기를 들려줬다.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그와 나는 원래 쌍둥이였다. 엄마는 약했고 커져가는 배에 손을 얹고 두려움에 떨었다. 둘은 느꼈다. 한 배에서 함께 자랄 수 없는 상황이라는 것을. 둘 중 하나가 사라지지 않으면 둘 다, 아니 셋 다, 죽을 수도 있다는 것을. 그래서 약속했다. 하나의 몸으로 삶을 절반씩 나눠 쓰자고.

그는 이야기하는 동안 몇 번씩 나를 노려보며 증오심을 내비쳤다.

“시간이 흐를수록 위협은 다가오는데, 난 걱정스러워 죽겠는데, 이기적인 너는 엄마의 피와 양분을 쪽쪽 빨아대며 돼지처럼 몸만 불리고 있었어.”

미친 녀석이다. 아니면 내가 미친 거겠지. 나는 내 집에 무단으로 침입한 나를 닮은 이 사람을 어떻게 몰아낼지 연구했다. 하지만 한쪽 마음 구석엔 저자가 나를 대신한다는 것이 무슨 의미일까 생각했다. 초조하고 불안해졌다. 그는 침대에서 일어났다. 처음보다 한 뼘은 커진 것 같다. 혈색도 좋아 보였다.

“그때는 몰랐겠지. 이렇게 시간이 흘러 약속을 지켜야 하는 순간이 올 줄. 흡수되었으니 내가 너의 먹이가 되었다고 생각했겠지만 아니야. 처음부터 우리는 다른 몸. 다른 마음. 다른 존재였으니까. 네 속에 스며들어 완전히 사라졌을 때도 나는 나인 채로 살아 있었어. 내가 화가 나는 건 약속을 이행하지 않고 네가 이렇게 살아 있다는 거. 무엇보다 내가 이어받게 될 삶을 이렇게 엉망으로 꾸려왔다는 것. 어디서부터 만져야 할지 계산이 안 나올 정도야.”

그는 집 안 곳곳을 돌아다니며 내 물건에 손댔다. 함부로 책을 꺼내 펼쳤고 노트를 읽었다. 분노가 치밀었다. 함부로 만지는 것도 싫었지만 표정이 거슬렸다. 무시하는 듯한 눈빛과 비웃음이 서린 입술. 마음 같아서는 멱살을 잡고 문 밖으로 끌어내고 싶었지만 침대를 벗어날 수 없을 정도로 몸은 망가지고 있었다. 시간이 갈수록 회복은커녕 악화되기만 했고 정신도 혼탁했다.

“꺼져.”

소리쳤지만 목소리는 없다. 그는 무표정한 얼굴로 달싹거리는 내 입술을 바라보다가 접시를 들고 가까이 다가왔다. 그는 아몬드를 씹으며 내 입술 쪽으로 귀를 기울였다. 나는 욕했다. 화냈다. 질문했고 마지막에는 애원했다. 그는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는 듯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저었다. 그의 입속에서 부서지는 아몬드 소리가 신경을 긁는다. 그는 감정을 알 수 없는 눈으로 나를 깊숙하게 바라봤다. 두렵다. 어쩌면 그는 망상이 아닌 진짜일지도 모른다. 어쩌면 그는 진짜 나의 반쪽일 수도 있다. 어쩌면 그는 이미 나일지도 모른다. 어쩌면 나는….

그는 내 겨드랑이에 손을 집어넣어 일으켜 세웠다. 내 몸은 너무도 쉽게 움직였다. 그는 나를 바퀴가 달린 의자에 앉혀 거실로 데리고 나왔다. 오랜만에 보는 내 거실. 내 책. 내 책상. 내 노트. 내 컵. 그것들은 위치가 달라져 있었다. 책상에 놓인 물건이 달라졌고 노트가 펼쳐져 있었으며 책들은 바닥에 쌓여 있었다. 만지지 말라고 말하고 싶지만 입술조차 움직이지 않는다. 그는 나를 의자에 젖은 수건처럼 걸쳐놓고 소파에 앉아 책을 읽었다. 연필을 들어 노트에 무엇인가를 적었다. 나는 눈동자를 양옆으로 굴리며 탑처럼 쌓여가는 책들을 바라봤다. 손만 뻗으면 닿을 수 있는 저 너머에 침입자가 앉아 있다. 내 의자에 앉아 내 책을 읽고 있다. 나를 휴지처럼 구겨 던져두고 뻔뻔하게 책을 읽고 있다. 저 눈을 찌르고 목을 비틀고 싶다. 아슬아슬하게 쌓여가던 책들이 중심을 잃고 쏟아졌다. 그는 심드렁한 얼굴로 널려 있는 책들을 밟고 부주의하게 돌아다니다가 의자에 앉았다. 그는 내 책에 밑줄을 긋는다. 아직 읽지도 않은 새 책을 함부로 만지고 구기고 흔적을 남긴다. 내가 쓴 원고를 읽고 연필로 문장을 고치고 여백에 자신의 문장을 쓰고 있다. 나는 발악을 하며 팔다리에 힘을 줬다. 몸을 떠는 것 외에 할 수 있는 것은 없다. 그러나 포기하지 않았다. 꿈틀거렸다. 계속, 계속, 계속, 실패, 반복, 다시 반복, 실패, 다시 반복. 내 몸이 의자에서 떨어졌다. 왼쪽 이마에 큰 충격과 함께 목과 어깨에 통증이 느껴졌다. 나는 바닥에 떨어진 책들 사이에 누워 그를 노려봤다. 그는 조금 놀란 표정을 짓고 책을 덮으며 의자에서 일어섰다. 그는 부드럽게 미소를 지으며 내 곁에 누웠다. 그리고 속삭였다.

“네가 왜 이렇게 멍청한지 이제 알겠어. 쓸모없는 책들만 읽어왔구나. 의미도 없는 문장에 밑줄을 긋고 뭐 대단하다고 책을 저렇게 많이 접어놓는 거야.”

그는 딱하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침을 뱉고 싶어 입술이 부들부들 떨렸다. 그는 묘한 눈으로 내 입술을 봤다. 그리고 검지로 아랫입술을 살살 만졌다.

“네가 쓴 것들도 한심해. 그동안 내가 수도 없이 말해줬잖아. 그건 아니라고. 이렇게 써야 한다고. 너는 내 도움으로 여기까지 와놓고 언젠가부터 내 생각과 의견을 무시한 채 지루하고 한심한 글만 써댔어. 쓰레기 같은 책을 출간해놓고 보란 듯이 책장에 꽂아두고.”

그는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의 숨이 얼굴에 닿았지만 눈꺼풀은 감기지 않았다. 억울하고 원통해서 울고 있지만 눈동자는 돌멩이처럼 말라붙었다.

“나는 후회했어. 너에게 양보하는 게 아니었어. 이렇게 살 줄 알았다면 내가 너를 잡아먹었을 거야. 나는 너에 대해 다 알아. 평생 동안 봤고 들었고 느꼈지. 하찮은 도전과 별것 아닌 성과들. 절망과 실패. 더러운 욕망과 충동. 그때마다 겁쟁이처럼 주저하며 주저앉았던 것들까지 모두 알고 있어. 넌 겁이 많고 허약하고 우둔했지. 내게 물려준 이 모습을 봐. 그동안 나는 네 속에 갇혀서 속이 터지는 줄 알았다. 그래도 얼마나 다행이니. 지금부터는 제대로 살아보자. 사는 것도 쓰는 것도 훨씬 나아질 거야. 그러니까 어서 약속을 지켜. 계속 이러면 내가 널 죽일 수밖에 없잖아. 어차피 죽는 거 똑같다고 생각해? 아니야. 이제 바뀌는 거야. 네가 내 안으로 들어오는 거라고. 기회를 줬는데 끝까지 이러면 내가 너한테 잘해줄 수 있겠어? 빛도 소리도 없는 진창에 처박고 평생 꺼내주지 않을 거야. 그게 무슨 의미인지 너는 모르겠지만. 생각 잘해. 시간 얼마 남지 않았으니까.”

아니. 나. 살고 싶지 않아. 하지만 죽을 힘도 없고 방법도 몰라. 어쩌면 내 생명은 몸의 한계를 모두 사용한 뒤 연기처럼 꺼질 생각인가 봐. 내가 정말 그라면, 그가 정말 나라면, 내 생각을 알고 있겠지. 그렇다면 내 마음을 전할 수도 있겠지. 나는 말했다. ‘이제 죽을 거야. 따뜻한 물속에 들어가게 해줘. 마지막으로 온기를 느껴보고 싶어. 부탁할게.’ 그가 고개를 돌려 나를 봤다. 고민이 되는 듯 눈살을 찌푸리며 약지로 왼쪽 눈썹을 긁었다. 그는 탁, 소리 나게 책을 덮은 뒤 화장실에 들어갔다. 욕조에 따뜻한 물을 받아 검지를 집어넣고 적당한 온도가 될 때까지 찬물을 섞었다. 그는 나를 가볍게 안아 뚜벅뚜벅 걸은 뒤 조심스럽게 욕조에 집어넣었다. 따뜻하다. 부드러운 느낌에 얼어붙은 몸이 녹아내리는 것 같다. 좋았다. 만족스럽다. 됐다. 됐어. 지금 당장 죽어도 여한이 없다. 그는 왼손에는 빨간 사과를, 오른손에는 과도를 들고 욕조 옆에 앉았다. 그는 사과의 껍질을 얇게 벗겨낸 후 한 입에 들어가기 좋을 크기로 잘라 입에 넣고 우물우물 씹었다. 상큼한 사과 향이 욕실에 퍼졌다. 마음이 누그러들었다. 그는 나쁜 사람이 아니었구나. 그의 말이 맞다면 그는 나니까 그는 내게 잘해줄 것이다. 정말로 나보다 내 삶을 더 잘 꾸려나갈 것이다. 글도 훨씬 잘 쓰겠지. 그동안 모른 척했지만 사실 나는 알고 있었다. 내 안에 새로움은 하나도 없고 내 문장은 누구의 흥미도 끌지 못하리라는 것을. 내내 비참했고 서글펐다. 그걸 알면서도 포기 못 했고 욕심을 버리지 못했다. 내 마음을 알았던 걸까? 그는 사과 한 조각을 잘라 내밀었다. 침이 고였다. 나는 순한 개처럼 행복한 눈으로 그의 왼손을 봤다. 움직인 건 그의 오른손이었다. 어? 목이 뜨겁다. 이윽고 한 번도 느껴보지 못한 종류의 통증. 그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내 목에서 과도를 빼냈다. 그리고 가볍게 물에 두어 번 헹군 뒤 일어섰다.

“생각이 바뀌었어.”

물이 미지근해지고 있다. 탁하게 변하는 적갈색 물이 비루한 육체를 가려준다. 이불을 덮고 있는 것 같다. 붉은 모래에 파묻혀 있는 것 같다. 열린 문틈으로 찬 바람이 들어오고 있다. 궁금하다. 내 문장을 어떻게 고쳤을까? 막혔던 이야기의 다음 장면을 어떻게 이었을까? 우습다. 내가 쓴 어떤 소설도 내가 겪은 것보다 이상하지 않았다. 이게 이야기였다면 나는 말이 안 된다고 이렇게 쓰지 않았겠지. 소설을 쓰기 어려운 게 바로 그거야. 아무리 노력해도 괴상한 삶을 따라잡을 수가 없거든. 그 어떤 끔찍한 상상을 해도 현실은 그것보다 끔찍하니까. 내 몸을 뺏은 나도 그걸 곧 느끼겠지. 느껴봐라. 흡수된 내가 피와 땀이 되어 실컷 비웃어줄 테니까. 웃음이 나온다. 웃음이 나와. 얼마 만에 해피 엔딩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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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정용준(소설가)

2009년 현대문학 신인 추천으로 등단했다. 소설집 『가나』, 『우리는 혈육이 아니냐』, 『선릉 산책』, 장편 소설 『바벨』, 『프롬토니오』, 『내가 말하고 있잖아』를 썼다. 젊은작가상, 황순원문학상, 문지문학상, 한무숙문학상, 소나기마을문학상 등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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