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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재의 네덜란드 일기] 여름의 거울로부터 겨울의 나무로

이제재의 네덜란드 일기 2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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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재에게 있어 그해 여름의 틸뷔르흐는 하나의 산책으로부터 시작된 것이었다. (2022.04.19)


첫 시집 『글라스드 아이즈』로 독자를 만났던 이제재 시인이 네덜란드에서의 일상을 에세이로 전합니다. 새로운 장소에서 시인은 자신을 3인칭으로 바라보며 ‘내’가 변화하는 순간들을 관찰합니다. 짧은 소설처럼 흘러가는 이 에세이는 격주 화요일 연재됩니다.


2020년 6월 17일

이제재에게 있어 그해 여름의 틸뷔르흐는 하나의 산책으로부터 시작된 것이었다. 그때 그는 그가 머무는 집에서 한 블록 정도 떨어진 차고 앞에 서 있었고, 차고 앞에는 네모난 거울이 놓여져 있었고, 거울 속에는 녹색 잎의 나무가 흔들리고 있었다. 거울 속 나무와 같은 리듬으로 움직이고 있는 나무 그늘 속에서, 그는 이 모든 장면을 비현실적으로, 그와 동시에 현실적으로 체감하고 있었다.

왜 저 거울이 마치 연출된 것처럼 내 앞에 배치된 것일까.

그는 조용히 질문하며 불과 며칠 전 출판사에 넘긴 그의 시집 원고를 떠올렸다. 그가 시집 제목으로 꼽아둔 후보는 유리로 된 눈이라는 뜻의 ‘글라스드 아이즈’였다. 동명의 제목을 가진 시가 원고 1부에 배치되어 있었고 그가 기억하기에 그 시는 이렇게 시작했다.

‘거울을 찍으러 다녔어’

여기까지 떠올렸을 때 그는 곧 자신이 하게 될 일이 무엇인지 알아차렸다. 주머니 속의 핸드폰에 손을 가져다 대면서, 그는 분명 자신의 의지로 이 일을 하고 있는데도 다른 힘에 따라 움직이고 있는 것 같은 이상한 느낌 속에 있었다. 그것은 마치 시가 스스로 먼저 얘기한 것에 따라 그가 움직이고 있다는 느낌이었다.

그해 여름은 그 느낌의 연장선상에서 그에게 펼쳐졌다. 그의 시집 속에 등장하는 까마귀들이 그가 산책하는 길목마다 껑충껑충 뛰어다니고 있었고 커튼이 처져 있지 않은 창문들은 거울처럼 여기서 저기로 빛을 반사하고 있었다. 그 가운데에서 그는 시집 뒤에 들어갈 짧은 에세이를 완성했다. 삶이 신이라면 이 모든 배치를 받아들일 수 있겠니, 라는 질문으로 끝나는 글이었다. 그것은 그에게 아름다움에 대한 질문 같았다.


2021년 12월 31일

이제재에게 있어 그해 겨울의 틸뷔르흐는 몇 가지 소음으로부터 시작되고 있었다. 이른 낮부터 시작된 소음은 저녁이 되자 점차 더 잦아졌고 집을 둘러싼 모든 거리에서 들려오기 시작했다. 처음에 그는 그것이 근처의 공사장에서 들려오는 소리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점차 사람들의 시끌벅적한 웃음과 노래 소리, 블라인드 틈새로 비쳐오는 붉고 푸른 빛으로 인해 그는 그 소리가 새해를 맞이하기 위한 폭죽으로부터였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곧 이 소음들에 가세하기 시작한 EDM 음악 소리를 들으며 그는 기사를 찾아 읽었다. 네덜란드 당국이 코로나 확산 방지를 위해 새해맞이 폭죽 판매를 금지시켰고 그 때문에 네덜란드인들이 바로 옆 벨기에에서 폭죽을 사들여오고 있다는 글이었다. 하루종일 조용히 쉬며 여독을 풀어보려던 그에게 이제 소음은 적응의 문제가 되어 있었다.

열한 시 반, 근처 이웃집에서 드럼 연주가 시작되자 그는 과연 이 소란이 오늘 내로 가라앉을 수는 있을 것인지를 스스로에게 묻고 있었다. 점점 더 커져 비명에 가까워진 웃음소리와 노랫소리는 새해를 맞는다는 것이 이곳 사람들에게 얼마나 즐거운 일인지를 알려주고 있었다. 그는 이불 속에서 마치 그렇게 하면 소음이 줄어들기라도 한다는 듯 굳게 닫아 놓은 그의 집 창문과 블라인드를 바라보고 있었다. 눈은 고정되어 있는데 몸이 움직이면 멀미가 나는 것처럼, 눈으로는 보이지 않는 소리를 하루종일 듣고 있으려니 어디선가 신물이 올라오고 있는 듯했다. 이미 일곱 시간 전에 새해를 맞은 한국으로부터의 연락은 이제 잠잠해진 지 오래였다. 그는 잠시 두 귀를 막은 뒤 심호흡을 두어 번 쉬었고 열한 시 오십오 분이 되자 자리에서 일어나 잠옷 위에 회색 패딩을 걸쳤다. 복도 계단을 내려가 건물 출입문 손잡이를 잡았을 때 그는 이때까지 그가 단 한 번도 잠옷을 입고 외출한 적이 없었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문을 열자 폭죽의 불꽃들이 하늘로 선명히 퍼져나가는 것이 보였고 그는 보이지 않는 소음을 들을 때보다 보이는 소음을 듣는 것은 다르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곧 그의 뒤를 이어 그가 사는 건물의 이웃들 몇몇도 밖으로 나왔는데, 유난히 외국인이 많이 사는 이 건물의 특징 때문인지 그들은 모두 하나 같이 예정에 없던 외출을 하게 된 사람처럼 얼떨떨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어느새 주위를 둘러보니 그는 연기가 자욱한 거리에 혼자 서 있었다. 뒤를 돌아 그의 집 주변 사거리 쪽을 바라보니 폭죽을 터뜨리던 사람들의 무리는 사라져 있었다. 이제 폭죽은 더 멀리서 이따끔씩 쏘아 올려지고 있었고, 갑자기 줄어든 소음 속에서 그는 어쩐지 멍한 기분이 되어 주변을 바라보고 있었다. 연기 속에서 가로등의 불빛이 거리 전체를 물들이고 있었고 이따끔씩 폭죽의 붉고 푸른 색깔이 그 자리에 더해지고 있었다. 멀리서 두어 명의 사람들이 그 연기 속으로 사라지고 있었고 그는 습관적으로 핸드폰을 들어 그 모습을 찍어두었다. 핸드폰 사진첩 속에는 방금 전까지도 어깨동무를 하며 노래를 부르고 해피뉴이어, 하며 외치는 사람들의 영상과 사방으로 튀어 올라 그의 바로 머리 위에 떨어지는 듯이 보였던 폭죽들의 잔상이 찍혀 있었다. 다시 하나하나 재생해 보면 그가 점차 사람들의 무리에서 멀어지고 있음을, 동시에 폭죽에서도 멀어지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영상들이었다.

해피뉴이어.

그는 텅 빈 거리를 천천히 걸으며 거리의 사람들이 떠들썩하게 소리치던 말을 스스로에게 중얼거려 보았다. 그 소리는 지금의 그의 느낌과도 먼 것이었고 집 앞에 서서 5층 건물을 올려다보다 그는 어느새 그가 겪었던 틸뷔르흐의 여름과 자신이 멀어졌음을 알 것 같았다. 그 여름에 그는 틸뷔르흐의 서쪽에 머물렀고 그 집은 공동주방과 공동욕실을 쓰는 셰어하우스였다. 지금 머무는 집은 틸뷔르흐 중심지의 원룸이었고 그는 욕실도 주방도 혼자 쓸 수 있었다. 그 차이는 그에게 크게 와닿은 것이 아니었는데도 여름과 겨울 사이의 감각을 벌려주고 있었다. 건물 중 대부분의 집에 불이 꺼져 있는 것을 바라보다 그는 근처에서 들려오는 크지 않은 소리에 건물 뒤쪽의 주차장 공터 쪽으로 향했다. 그곳에 서 있자 멀리서 하늘을 물들이고 있는 두어 개의 폭죽이 보였고 그 사이로 어둠 속에 묻혀 잘 보이지 않았던 나무가 드러났다가 사라지는 것이 보였다. 그는 핸드폰을 들어 올리지 않았다. 어느 순간부터 느낌은 느낌이라는 체험일 뿐, 그 자신의 속성은 아니라는 것을 그는 알고 있었지만 지금 그가 느끼는 감정은 외로움이었다.

왜 네덜란드로 다시 돌아왔는지 누군가 그에게 묻는다면 그는 네덜란드에서 그가 경험한 여름이, 삶이 스스로 펼쳐 보여주는 그림과 가깝게 느껴져서였다고 말하고 싶은 적이 있었다. 이곳에서라면 그는 무언가를 애써 하려고 하지 않고도 자연스럽게 삶을 바라볼 수 있을 것 같았다. 그 여름에 ‘삶이 신이라면 이 모든 배치를 받아들일 수 있겠니’ 하는 질문은 그에게 시와 가장 가까운 질문이 되었고, 그래서 틸뷔르흐의 6월은 그에게 하나의 거울로 남은 것이었다. 그러나 지금 그는 거울 바깥에 있었고 그는 어둠 속에 있다가 문득 드러난 나무가 다시 어둠 속으로 가라앉는 것을 보고 있는 중이었다. 지금 그에게 삶이 펼쳐 보여주고 있는 그림이 이것이라면 그는 그 그림이 계속해서 자연스럽게 펼쳐지도록 놓아두고 싶었다. 동시에 그는 그의 내면에 있던 문장이 변형되고 있는 것을 느꼈다. 삶이 신이라면, 사람은 아름다움 속에서도 신을 찾을 수 있었지만 외로움 속에서도 신을 찾을 수 있었다.




글라스드 아이즈
글라스드 아이즈
이제재 저
아침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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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ㆍ사진 | 이제재(시인)

1993년 3월 4일생. 생년월일이 같은 아이를 두 번 만난 적 있다. 명지대학교 문예창작과를 졸업했다. 『글라스드 아이즈』의 저자이다.

글라스드 아이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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