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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용준의 짧은 소설] 저스트 키딩

<월간 채널예스> 2022년 4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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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지은 죄는 누군가를 모욕했거나 명예를 훼손한 것이 아닙니다. 형량은 그렇게 나왔겠지만 절대로 아닙니다. 그 사람은 존재 자체가 파괴됐거든요. (2022.04.01)


비 내리는 새벽의 편의점. 한 사람이 안으로 들어왔다. 위아래로 회색 트레이닝복을 입고 갈색 모자를 쓴 남자였다. 점원은 게임을 하다 말고 “어서오세요.”라고 중얼거리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모자는 편의점을 한 바퀴, 두 바퀴. 천천히 거닐었다. 점원은 하품을 하며 창밖을 봤다. 차와 사람이 없는 텅 빈 사거리에 하릴없이 초록불이 켜졌다가 카운트다운 후 빨간불로 바뀌었다. 태풍이 오려나. 빗줄기는 굵어졌고 바람도 강해졌다. 시간 진짜 안 가네. 인기척을 느낀 점원은 고개를 돌렸다. 모자가 검지로 모자챙을 살짝 올려 자신을 보고 있었다.

“저 기억하시나요? 아까 몇 시간 전에 여기 왔었는데.”

“네? 아… 무슨 불편한 점이라도.”

“여기에서 물건을 훔쳤었는데.”

점원은 굽은 어깨를 펴고 헐렁하게 걸쳐 입은 조끼를 매만지며 모자의 얼굴을 봤다. 검은 뿔테 뒤에 숨은 두 눈이 그림자 속에 숨어 있었다. 모자가 말을 이었다.

“CCTV를 볼 수 있을까요? 제가 진짜로 훔쳤다는 것을 보여드리고 싶어서요.”

“아니.” 

점원은 무의식적으로 고개를 돌려 냉장고 위 CCTV를 쳐다봤다.

“그러시다면 음, 다시 돌려주시면 될 것 같습니다.”

“그럴 수는 없어요. 사정이 있어서요.”

점원은 휴대폰 화면을 켜고 시간을 확인했다. 3시 47분이었다.

“그러면 지금이라도 결제하시면 될 것 같은데요. 어떤 제품이었을까요?”

“확인하셔야 하는 거 아닐까요? 껌을 훔쳤다고 말하면 껌값 천 원만 내고 나가면 되겠네. 그렇게 할까요?”

일하는 두 달 동안 진상들 많이 만났다. 계산한 뒤 신용 카드를 자기 손에 쥐어주지 않는다고 화를 내는 사람. 어제까지 1 1이었는데 왜 오늘은 1 1이 아니냐고 소리 지르는 사람. 결제도 안 했는데 담배를 뜯고서는 카드 잔액이 부족하다니까 두 개피만 빼 가는 사람. 그런데 이 사람, 본 적 없는 신종일세.

“손님. 일단 지금은 새벽이고, 점장님 오시면 그때 확인하면 좋겠습니다. 연락처를 알려주실 수 있을까요?” 

“그럼 안 훔친 걸로 하죠. 하지만 분명히 말했습니다. 확인 안 한 건 그쪽이시고.”

점원은 이제 짜증이 났다. 목소리에 힘이 들어갔고 나오는 말이 배배 꼬이며 끝이 뾰족해졌다.

“저기. 무슨 상황인지 모르겠네요. 훔쳤으면 돌려놓으시고요. 먹었으면 결제하시면 되잖아요. 뭐 하자는 거예요? 지금.”

그때 비니를 쓴 두 명이 문을 열고 들어왔다.

“어서 오세요.”

점원은 의도적으로 고개를 돌려 모자를 무시하고 시선을 허공에 고정했다.

“그럼 저 그냥 갑니다.”

“아니. 아니. 그러시면 안 되죠. 훔쳤다면서요? 그게 뭔지 말하셔야죠.”

모자는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다. 카운터에서 한 발 물러선 뒤 창밖을 바라볼 뿐이었다. 점원은 마음이 복잡해졌다. 저자의 말이 사실이라면 결산할 때 펑크가 날 거다. 나중에 이 상황을 알게 되면 점장이 지랄할 게 뻔했다. 그걸 그냥 보냈느냐고. 그렇다고 지금 이 시간에 점장에게 전화를 거는 것도 아닌 것 같았다. 방금 들어온 남자들도 신경 쓰이기 시작했다. 비니 둘은 라면 코너 쪽에 나란히 서서 5분 넘게 꼼짝도 하지 않고 있었다. 매대에 가려 얼굴이 보이지 않았고 CCTV도 등만 비출 뿐이어서 무엇을 하고 있는지 파악이 되지 않았다. 제품을 고르지 않고 그냥 서 있기만 하는 세 명의 남자. 뭐지? 점원은 불안해졌다. 그때 모자가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불안해요?”

“네?”

“두렵냐고요. 느낌이 좀 달라졌네. 준비하세요. 여차하면 그거 눌러야 하니까.”

모자는 손가락으로 포스기 쪽을 가리켰다. 점원은 그 밑에 벨이 있다는 걸 알면서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는 얼굴을 하고 물었다.

“뭘요?”

모자는 입 모양으로만 말했다. ‘경찰.’

사선을 긋던 빗줄기가 지금은 거의 수평. 찢어진 박스들과 비닐봉지가 중앙선과 주행선을 오가며 뒹굴었다. 수초처럼 휘어지는 가로등. 수상하다. 똑같이 비니를 쓰고 위아래로 검은색으로 맞춰 입은 것과 카운터 쪽에서는 얼굴을 확인할 수 없는 각도에 서 있는 것까지. 점원은 초조하게 라면 코너 쪽을 주시했다. 가까이 다가온 모자가 소곤거렸다.

“저 사람들. 강도예요. 거울 봐봐. 후드티 앞주머니에 손 집어넣고 있죠? 주머니에 뭐 있을 것 같아요? 칼 아닐까?”

점원은 인상을 찌푸렸다. 신경 쓰지 마시고 나가세요. 말하고 싶었지만 그의 말이 사실이라면? 혼자 있는 것보다는 누군가 함께 있는 편이 나을 것 같았다. 아닌가? 이 사람도 한패라면? 심장이 빨리 뛰기 시작했고 손바닥에 자꾸 땀이 고여 몇 번이고 허벅지에 닦아냈다. 점원은 휴대폰으로 빠르게 문자를 입력했다. ‘점장님. 이상한 사람들이 있어요.’ 

답장은 없었다. 비니들은 양쪽으로 흩어졌다. 한쪽은 김밥 앞에, 다른 한쪽은 콘돔 앞에 서 있었다. 자세는 똑같다. 카운터 쪽을 보며 가만히 서 있기만 한다. 둘 모두 후드티 앞주머니에 손을 찌르고 있었는데 앞이 두툼했다. 그들은 한 발씩 천천히 다가왔다. 점원은 당황하며 모자를 봤다. 모자는 고갯짓으로 빨리 벨을 누르라는 신호를 줬다. 점원은 하얗게 질린 얼굴로 기침하듯 말했다.

“눌렀어요.”

“난 경고했다. 벨 안 누른 건 당신 탓이야.”

“눌렀어요. 눌렀다고요.”

형광색 비옷을 입은 경찰 두 명이 편의점 문을 열고 들어왔다. 둘 중 하나는 입구에 서서 편의점 내부를 봤고 다른 하나는 곧장 카운터에 다가갔다.

“무슨 일입니까?”

“강도래요.”

“누가요?”

비니들은 바나나 우유와 초코 우유를 들었다가 놨다 하면서 무구한 표정으로 카운터 쪽을 보고 있었다. 모자는 콜라 한 캔을 사서 의자에 앉아 있었다.

“아니. 아직은 아닌데요. 곧 강도 짓을 한다고. 했어요. 강도라고.”

강도 짓을 한 것은 아닌데요. 한다고 했고요. 저 사람은 물건을 훔쳤다고 했는데 무엇을 훔친지는 모르겠어요. 칼이 있다고 했어요. 칼을 본 것은 아니고요. 경찰은 횡설수설하는 점원의 말을 한참 들었다. 불안한 눈이 비니를 쓴 사람들에게 향해 있는 걸 보고 경찰은 그들에게 다가갔다. 신원 확인을 하고 주머니에 든 것을 확인했다. 둘 모두 휴대폰 외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모자에게 점원이 하는 말이 맞느냐고 물었다. 대화를 한 것은 사실이나 제품 가격에 대한 이야기였다고 했다. 범죄가 일어날 것 같은 분위기? 그런 건 모르겠다.

“그렇군요.”

경찰은 젖은 머리를 손으로 툭툭 털며 호, 하고 숨을 내쉬었다. 왼쪽 머리가 눌린 점장이 도착했다. 점원은 경찰들과 점장에게 왜 벨을 누를 수밖에 없었는지 말하고 또 말했다. 스스로 생각해도 무슨 말을 하는 건지 알 수 없었다. 말은 꼬였고 말도 안 됐다. 비니 둘과 모자 하나는 이 모습을 연극을 관람하듯 말없이 지켜봤다. 경찰은 돌아갔고 점장은 CCTV를 확인했다. 모자가 제품을 훔친 장면은 없었다. 편의점에 온 기록 자체가 없었다. 점장은 후우, 후우 한숨만 열 번도 넘게 내쉬며 아침에 다시 이야기하자고 집으로 돌아갔다. 

큰비가 잦아들고 분무기로 뿌리는 듯한 실비가 흩날렸다. 가로등 불은 꺼졌고 아파트와 야산이 희미한 미명으로 조금씩 환해지고 있었다. 비니들은 왜 우리를 의심했느냐, 묻는 듯한 눈으로 점원을 노려보며 밖으로 나갔다. 먼저 나간 모자는 한 손에 밀걸레대를, 다른 한 손엔 휴대폰을 들고 창밖에 서서 점원을 쳐다봤다. 마치 이 모든 장면을 영상으로 찍었다는 듯 검지로 휴대폰을 톡톡 때렸다. 

그리고 걸레를 들어 창문을 닦았다. 구정물이 투명한 창문에 주르륵 흘러내렸다. 뭔가에 홀린 듯 내내 멍하고 수치스러운 기분을 느껴야 했던 점원은 갑자기 몸과 마음에 전원이 들어온 듯 팔다리에 힘이 들어갔다. 그동안 착하게 살려고 노력했다. 한번 인생 말아먹었지만 앞으로는 착하게 살기로 다짐하고 또 다짐했다. 개 같은 짓을 하지 않았고 개 같은 짓도 참고 넘어갔다. 그런데 이 무슨 좆같은 상황인가. 점원은 카운터 탁자를 열고 바깥으로 뛰쳐나갔다. 모자는 가만히 서서 자신에게 다가오는 성난 점원을 바라봤다. 흐리멍덩했던 눈동자에 살기가 실렸고 흥분한 목소리엔 열기가 느껴졌다. 점원은 모자의 어깨를 밀치며, 왜 그런 거냐 소리를 질렀다. 

모자는 아무 대꾸도 하지 않고 실실 웃기만 했다. 이렇게 웃으면 상대방이 기분이 나빠 미쳐버리겠구나 싶은 더러운 미소를 입에 걸고 계속 점원을 바라보기만 했다. 모자는 들고 있던 밀대를 바닥에 놓고 발로 밟아 부러뜨렸다. 점원은 당황하며 한 발 물러섰다. 모자는 밀대를 들고 위협을 가하지 않고 그냥 바닥에 던졌다. 횡단보도 맞은편에 누군가 자신을 보고 있었다. 불 꺼진 치킨집 앞에 우산을 쓰고 쪼그려 앉은, 비니를 쓰고 있는 두 명의 남자. 점원은 어떤 확신에 이르렀다. 다들 한통속이었구나. 모두 짜고 나를 골탕 먹인 거다. 몰래카메라 같은 건가? 씨팔. 나를 뭘로 보고. 점원은 모자에게 달려들어 멱살을 잡았다. 모자는 말했다.

“억울한가요?”

“뭐라고?”

“억울하냐고요?”

점원은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이자는 처음부터 끝까지 거짓말만 하고 장난만 치고 있다. 점원은 한 번 더 이해해보려고 잠깐 머리를 굴려봤지만 그러기에는 너무 화가 났고 짜증이 치밀었다. 새벽이고 피곤해 죽겠는데 별 미친 새끼를 다 보겠네. 점원은 모자의 모자를 주먹으로 때렸다. 때렸다기보다 밀었다에 가까웠지만 모자는 뒤로 밀리며 넘어졌다. 모자는 바닥에 쓰러진 채로 바닥에 놓인 밀대를 잡으려고 팔을 뻗었다. 점원은 재빨리 다가가 모자보다 먼저 밀대를 잡았고 그대로 모자의 머리를 내리쳤다. 딱! 소리가 났고 모자는 악! 소리를 내며 쓰러졌다. 


모자는 병원 침대에 누워 점원이 오기를 기다렸다. 2인실을 함께 쓰는 환자가 몇 개의 검사를 받아야 해서 오후 내내 병실에 혼자 있을 예정이었다. 점원은 사과를 하고 싶다고 몇 개의 문자를 연달아 보냈고 다섯 번도 넘게 전화를 걸어 왔다. 모자는 전화는 받지 않고 문자에만 짧게 답했다. 모자는 머리에 감은 붕대를 매만지며 상처 위치를 확인했다. 두피가 찢어져 피는 났지만 별다른 이상은 없었다. 어떻게든 합의를 해달라고 요구하겠지. 억울하고 열받고 화나고 도대체 왜 자신에게 이런 일이 생겼는지 알 수 없어 미칠 것 같겠지만, 어쨌든 사람 머리에 구멍을 낸 가해자가 됐으니 똥줄이 탈 거야.

병실 문이 열렸다. 점원은 감귤 주스 선물 세트를 들고 어색하게 웃으며 침대에 다가왔다. 점원은 모자의 몸 상태를 물었고 그때는 정말 죄송했다고 몇 번이고 사과를 했다. 모자는 침대의 경사 각도를 조정해 누워 있는 자세를 앉은 자세로 만들었다. 모자는 선물 세트를 열고 주스 한 병을 꺼내 뚜껑을 열고 점원에게 건넸다. 점원은 두 손으로 병을 받아 들고 작은 소리로 “고맙습니다.”라고 했다. 모자가 말했다.

“사과하실 필요 없어요. 솔직히 그쪽이 잘못한 건 아니잖아요. 제가 장난치고 놀려서 그런 거니까. 사과는 제가 해야 할 것 같은데요.”

점원은 뭐라고 답해야 할지 몰라 망설이다가 고개를 저으며 답했다.

“아닙니다. 어쨌든 제가 다치게 했잖아요. 잘못한 게 맞죠.”

“아닌 거 같은데…. 뭐 그렇다면, 그렇다고 합시다. 합의하러 오셨나요?”

“아, 네. 뭐. 선처를 해주시면. 정말로.”

“싫습니다.”

“네? 제가 잘못한 게 아니라고 하셨잖아요.”

“네. 그쪽은 잘못 없어요. 하지만 합의는 안 합니다. 왜 왔는지 압니다. 왜 합의가 필요한지도 알고요. 억울하죠? 그냥 억울해 죽으세요.”

모자는 점원을 열받게 했던 그 미소를 지으면서 끄끄 소리 내어 웃었다. 점원은 쥐고 있던 병을 강하게 움켜쥐었다. 손바닥에 심장이 붙은 듯 툭툭 피 뛰는 게 느껴졌다. 병으로 내리치고 싶었다. 저 눈을 찌르고 이죽거리는 입술을 찢어버리고 싶었다. 하지만 참았다. 그렇지 않아도 재수 없게 꼬인 인생. 더 꼬이다가는 끊어질 수도 있으니까. 점원은 고개를 푹 숙였다.

“죄송합니다. 선처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모자는 음, 소리를 내며 한참 동안 말없이 점원을 봤다. 그리고 목소리에 장난기를 제거하고 건조하게 말했다.

“김민수 씨. 기분이 어때요?”

자신의 이름을 정확하게 부르는 소리에 점원은 고개를 들었다. 모자는 휴대폰으로 어떤 사진을 보여줬다. 점원은 사진을 보자마자 숨이 탁 막혔다.

“이 사람 생각나죠? 놀렸던 거. 장난쳤던 거. 다 생각나죠?”

점원은 이제야 이해가 됐다. 복수였구나. 하지만 동시에 분노가 치밀었다. 웃자고 한 일인데, 그저 재미있고 실감 나게 방송을 만든 것뿐이었는데, 하필 예민하고 진지한 사람이 걸려 꼬였다. 설정이었다. 밤길에 혼자 걷는 여성의 뒤를 따라가 살짝 겁을 주고 무서워하는 리액션 몇 컷 따고 ‘사실 몰카였습니다.’ 밝히는, 몰카 유튜버라면 한 번쯤 찍는 콘텐츠였다. 다만 짜고 치는 고스톱이 되지 않도록 대본 없이 리얼로 한 것뿐이었다. 그런데 그것 때문에 고소당하고 채널까지 없애야 했다. 한국은 이래서 안 돼. 몰래카메라잖아. 저스트 키딩. 외국처럼 여유 있게 웃고 넘기면 되는데. 트라우마니, 공황이니, 정신과 치료니 짜증 나. 

“하… 그것 때문이었나요? 저는요. 죗값을 치렀고요. 그것 때문에 제 인생도 엉망이 됐습니다. 언제까지 우려먹을 건데… 좋아요. 또 사과할게요.”

“죗값. 음, 당신 입장에서는 그럴 수 있지. 그럴 수 있어. 억울할 거야. 고소당했고 영상도 못 만들게 됐으니까. 그래서 커뮤니티에 억울하다고 답답하다고 호소했겠지. 너와 너 같은 사람들이 서로 편들어주는 곳이니까. 너의 말을 전적으로 믿고 어떤 짓을 해도 두둔해줬으니까. 감히 너를 고소하다니. 겨우 그깟 장난에 화를 내다니. 한꺼번에 우르르 몰려가서 그 사람을 욕하고 조롱했지. 그 사람은 들어본 적 없고 무슨 뜻인지도 모를 심한 말을 얼굴도 모르는 사람들에게 들어야 했어. 그 사람의 가족과 친구들, 회사 동료들에게까지 유언비어를 퍼트렸지. 메일을 해킹하고 연락처를 알아내 지인들에게 달라붙어 괴롭히고 온갖 더러운 말을 퍼 날랐어. 그 사람은 그걸 견디지 못했어. 회사를 그만뒀고 번호를 바꿨고 방에서도 나오지 못했거든. 가족들을 만나는 것조차 두려웠으니까. 이 모든 광풍이 지나가고 마침내 그 사람이 방에서 나왔을 때 그 사람은 다른 사람으로 변해 있었어.”

점원은 무슨 말이든 하려고 했다. 하지만 모자는 무서운 눈으로 점원을 노려보며 검지를 올려 자신의 입술에 댔다. 아무 말도 하지 말라는 그 신호에 점원은 말문이 막혔다.

“죗값. 당신이 지은 죄는 누군가를 모욕했거나 명예를 훼손한 것이 아닙니다. 형량은 그렇게 나왔겠지만 절대로 아닙니다. 그 사람은 존재 자체가 파괴됐거든요. 당신과 당신을 닮은 자들이 그 사람을 끈질기게 물고 또 물었죠. 상처 난 곳을 집요하게 파고들어 이빨을 박아 넣고 피가 흐르면 낄낄거리며 핥아대며 좋아했죠. 그냥 한번 살짝 깨물었을 뿐이라고 다들 주장하겠지요. 그러니까 내 책임이 아니라고요. 하지만 숨이 끊어져 결국 쓰러졌다면 누군가는 책임을 져야 하지 않을까요?”

점원은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지만 어떤 말을, 아무 말을, 아무렇게나, 나오는 대로 했다. 사실, 진짜, 원래는, 솔직히, 이런 단어들이 뒤섞인 변명이었는데 앞뒤가 맞지 않고 이해도 되지 않는 말이었다. 모자는 점원의 말을 끊었다.

“그동안 당신에 대해 알아봤어. 하나부터 열까지 다 뒤지고 찾아봤지. 인터넷에서의 흔적들. 누구와 친하고 누구에게 강하고 약한지 나는 다 알아. 그런데 끝까지 모르겠는 건… 이유였어. 도대체 그 사람에게 왜 그랬을까? 그런데 이제 알았어. 이유가 없다는 걸. 생각 자체를 하지 않았으니까. 김민수 씨. 당신은 아직 값을 치르지 않았어요. 사람을 죽인 죄. 또 사람을 죽이려고 한 죄.”

모자는 점원의 손에서 주스병을 빼앗았다. 주스가 침대에 흐르고 모자의 옷에 묻었다. 모자는 주스병으로 자신의 머리를 때리기 시작했다. 한 대 두 대 세 대. 점원이 소리를 지르며 모자의 손에서 병을 빼앗으려 했다. 하지만 모자는 계속 내리쳤다. 안경이 부러지고 이마가 찢겼다. 붕대에서 핏물이 고이기 시작했다. 흐르는 피가 눈썹과 귀, 상의를 적셨다. 하얗게 질려 벌벌 떠는 점원을 보며 모자는 환하게 웃으며 속삭였다.

“장난이야.”

모자는 응급벨을 누르고 정신을 잃은 듯 쓰러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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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정용준(소설가)

2009년 현대문학 신인 추천으로 등단했다. 소설집 『가나』, 『우리는 혈육이 아니냐』, 『선릉 산책』, 장편 소설 『바벨』, 『프롬토니오』, 『내가 말하고 있잖아』를 썼다. 젊은작가상, 황순원문학상, 문지문학상, 한무숙문학상, 소나기마을문학상 등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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