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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보미의 오늘밤도 정주행] 파이가 있다 - 길모어 걸스
<월간 채널예스> 2022년 1월호
의도한 건 아니었지만, 아침을 먹으면서 가장 자주 봤던 건, ‘온스타일’에서 방영해주던 <길모어 걸스>였다. (2022.01.04)
그 해, 나는 스물여섯 살이었고, 태어나서 처음으로 사회적으로 소속된 곳 하나 없는 신세가 된 참이었다. 물론 ‘태어나서 처음’이라는 표현은 너무 극적이기도 하고 진실도 아닐 것이다. 하지만, 사회적 소속이 없다는 사실 때문에 압박감을 느낀 건, 그때가 처음이 맞다. 내 삶과 관련된 모든 게 틀려먹은 것 같고, 어떤 식으로 삶을 꾸려야 할지 전혀 답을 알 수 없을 것 같던 그런 날들. 엄마는 내가 아침 일찍 일어나서 함께 식사를 했으면 좋겠다고 했지만 그런 적은 거의 없었다. 눈을 뜨고 나면 식구들은 모두 다 각자의 일을 찾아 떠난 후였고, 나는 잠옷을 입은 채로, 소파 테이블 앞에 멍하니 앉아 혼자 늦은 아침을 먹곤 했다. 가끔은 티브이를 켜두기도 했다. 의도한 건 아니었지만, 아침을 먹으면서 가장 자주 봤던 건, ‘온스타일’에서 방영해주던 <길모어 걸스>였다. (혹시나 해서 찾아봤더니 온스타일이라는 채널은 이제 이 세상에서 사라지고 없다).
이 드라마의 주인공인 ‘로렐라이 길모어’는 굉장한 커피 중독자이자, 삼십대 초반이지만 여전히 야채나 과일, 섬유질이 함유된 시리얼이나 계란 요리는 먹기 싫어하는 아이 입맛의 소유자이며, 유능한 모텔 관리자, 사랑스러운 수다쟁이, 수준 높은 유머 감각의 소유자, 그리고 열여섯 살 때 출산한 딸, (로렐라이 못지않은 유머 감각의 소유자인) 로리 길모어를 혼자 키우고 있는 엄마이기도 하다. 임신 후, 엄격한 명문 재력가인 부모님 곁을 도망치듯 떠난 로렐라이는 스타즈할로우라는 지역에 정착하여 로리를 낳고 독자적 삶을 충분히 행복하게 꾸려온 참이다. 하지만 로리가 명문사립고등학교에 진학하게 되면서 학비 조달을 위해 부모님과의 관계를 다시 이어가게 되고, 거기에서부터 <길모어 걸스>의 이야기가 시작된다. (명절이 아닌 날)처음으로 저녁 식사를 하러 로리와 함께 부모님 집을 방문한 날, 로렐라이의 어머니가 로리의 명문사립고 입학을 축하하며 “교육은 가족 다음으로 중요한 것이란다”라고 말하는데 그때 로렐라이는 농담을 하고 싶은 마음을 참지 못해, 이렇게 대답한다.
“파이도 있죠.”
맞다, 파이가 있다. 파이만 있는 게 아니다. 블루베리 머핀와 데니쉬, 글레이즈 도너츠와 크룰러, 펜케이크와 프렌치 토스트가 있다. 나는 잠옷 차림으로 세수도 하지 않고서, 오전도 훌쩍 지난 시간에 식은 밥과 반찬을 먹었지만, 로렐라이와 로리는 각자의 본분을 하러 떠나기 전, 일찌감치 모든 준비를 끝내고 스타즈할로우의 식당 ‘LUKE’S’(이하 루크네)에 자리를 잡고 앉아서 커다란 사발에 든 커피와 원하는 메뉴로 아침 식사를 한다. 거기에 등장하는 온갖 음식들 증 가장 나의 흥미를 끌었던 것 중 하나는 ‘애플파이’였다. 그때까지 내가 알고 있는 애플파이는 사과 조림을 넣고 구운 빵, 혹은 파이 전문점에서 파는, 위 쪽에 격자무늬의 반죽이 구워진 원형이었는데, 루크네에서 파는 애플파이는, 뭐랄까, 그런 것과는 달랐다. 빵보다는 반죽에 가까운 형태였다고나 할까? 지금 같으면 그게 애플 크럼블 파이라는 사실을 쉽게 알았을 테지만, 그때의 나는 그런 형태의 에플파이는 실제로 본 적도 없었고 (그러므로 당연히) 먹어본 적도 없었다. 그리고, 웃기지만 가끔은 그 맛을 상상해보곤 했다.
먹어보지 못한 애플파이의 맛만 상상한 건 아니다. 어느 날, 평소보다 조금 일찍 일어난 나는 장식품처럼 식탁 위 자리를 차지하고 있던 원두커피머신을 깨끗히 닦고, 싱크대 이곳 저곳을 뒤진 끝에 찾아낸 (구입한 지 오래된 게 분명한) 분쇄원두와 종이 필터를 이용해서 커피를 내렸다. 그리고 (역시) 싱크대 이곳저곳을 뒤져 찾아낸 팬케이크 가루와 냉장고에서 꺼낸 계란과 우유를 섞어서 팬케이크를 굽기 시작했다. 그렇게 완성된 팬케이크 석 장과 오래된 원두로 만든 커피를 소파 테이블에 가지고 간 뒤 나는 티브이를 틀었다. 그리고 그 음식들을 먹으면서 <길모어 걸스>를 보기 시작했다. 여전히 잠옷 차림에, 세수도 하지 않은 채였지만, 남들은 다 자기 일을 하러 떠났을 시간에 집에 혼자 남아 늦은 아침을 먹는, 사회적 소속이 사라진 스물여섯 살짜리 여자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았지만, 게다가 팬케이크는 타버렸고 커피의 맛은 이상했지만, 포크로 팬케이크를 잘라서 입에 넣고 커피를 후루룩 마시는 동안, 어쩐지 조금은 근사한 기분이 들었던 것 같다.
누군가 내게 좋아하는 미드를 열편 뽑으라고 한다면 과연 그 리스트 안에 <길모어 걸스>가 들어갈까? 음, 그렇진 않을 것 같다. 나는 <길모어 걸스>의 결말을 알지 못한다. 내가 몇 시즌까지 봤는지, 티브이에서 방영하던 것을 보다가 말았는지, 아니면 중간에 방영이 중단된 건지도 잘 기억나지 않는다. 다시 찾아보고 싶다고 특별히 생각한 적도 없다. 그렇지만, 그 시절-때로는 이해할 수 없는 희망에 차오르기도 하고, 이루 말할 수 없는 두려움에 잠기기도 했던 시절-을 떠올리면 어쩐지 늦은 아침, 혼자서 밥을 먹으며 <길모어 걸스>를 보던 나 자신이 떠오른다. 이상하게 그 정경 속 나는 언제나 뒷모습이다. 거실 안으로는 햇살이 비쳐들어오는데 공기 중으로 먼지의 입자가 보인다. 나는 아마도 길모어 걸스를 보면서 웃고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로렐라이 길모어와 로라 길모어의 든든한 아침식사를 책임지던 루크는 로렐라이에게 (톨스토이를 들먹이며) 이렇게 하소연한 적이 있다.
“가족이요, 문제투성이라고요. 구멍이 뚫린 물주머니처럼 계속 여기저기 새요. 마루를 닦아도 닦아도 얼룩이 마를 날이 없죠”
그리고 다른 에피소드에는 로렐라이가 자신의 딸 로리에게 이렇게 말하는 장면이 나온다.
“난 운이 좋은 것 같아. 삶이 거지같고, 일이 거지같고, 모든 게 다 거지같을 때, 불만을 토로하고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사람이 있다는 게 말이야.”
루크는 가족에 대해 이야기했지만, 이것은 어쩌면 삶에도 적용되는 말인지도 모른다. 삶은 문제투성이고, 거지 같고, 아무리 닦아도 얼룩이 마를 날이 없다. 그래도, 로렐라이의 말마따나 운이 좋은 사람들 곁에는 늘 불만을 들어줄 사람들이 있다. 그런 식으로 우리는 하루하루를 한 걸음씩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 하지만 운이 없는 사람이라면? 믈론 그래도, 괜찮다! 모든 것이 엉망진창이 된 순간일지라도, 방향을 완전히 잃어버린 것 같아도, 이 세상에 나 혼자 남은 듯 느껴져도, 그래도 결국 나의 곁에는 언제나 나 자신이 남아있게 될 것이므로. 그러므로, 삶이 우리를 위협하는 순간, 무엇보다 중요한 건, 나 자신을 내 곁에 온전히, 잘 두려고 노력하는 일이 아닐까? 물론 내 곁에 맛있는 파이도 함께 있다면 더할 나위 없겠지. 그래, 결론이 이상하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나는 결국 이렇게 말하고 싶은 욕망을 멈출 수 없다. 파이는 교육 다음으로 중요한 게 아니라, 그 무엇보다 가장 중요한 것이라고.
옛날 드라마가 주는 특권!
드라마에 나오는, 이제는 너무 유명해진 조연들을 찾아보는 재미도 쏠쏠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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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와 빵을 좋아하는 소설가. 『디어 랄프 로렌』, 『우아한 밤과 고양이들』, 『맨해튼의 반딧불이』 등을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