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을 기억합니다, 차이콥스키의 “호두까기 인형, Op.71”
차이콥스키의 “호두까기 인형, Op.71”
한해를 그저 흘려보낼 수 없는 안타까운 연말, 나만의 의식으로 “호두까기 인형”을 들어 보세요. 올해도, 내년에도, 내후년에도요. 메마른 가슴에 행복을 촉촉하게 뿌려 줄 겁니다. (2021.12.23)
음악계 우스갯소리로 사람들이 ‘블랙 프라이 데이’ 쇼핑을 할 때, 연주자들은 '호두까기 인형' 악보를 펼쳐 연습을 시작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연말이 되면 전 세계 연주회장 어디선가는 항상 이 음악이 연주되기 때문입니다. 산타 할아버지에게 선물을 받듯 근심 걱정을 잊고 달콤한 연말을 보내기에 차이콥스키 음악만큼 잘 어울리는 음악이 또 있을까요?
'호두까기 인형'은 표트르 차이콥스키가 작곡한 대표적인 발레 음악입니다. 그가 활동하던 당시 러시아에서는 고전 발레가 크게 유행했습니다. 짧은 튀튀를 입고 토슈즈를 신은 무용수가 발레를 상징하기 시작한 것도 이때였습니다. 기화할 듯 가벼운 몸짓은 느리게 떨어지는 눈송이를 그릴 수 있을 정도로 우아했고, 러시아 음악은 낭만과 우수로 찬란하게 빛났습니다. 두 예술이 만나 환상적 세계를 그려내는 호화롭기 그지없는 장르가 바로 고전 발레였고, 그 한 가운데 차이콥스키가 있었습니다.
발레 음악은 노래나 대사 없이 음악과 무용만으로 이야기를 이끌어 갑니다. 감상자는 마치 무성 영화를 보듯 발레가 그리는 이미지와 음악 분위기로 줄거리를 상상합니다. 작곡가는 중심이 되는 이야기를 읽으며 어느 부분을 음악으로 강조할지 결정하고, 그에 맞는 다양한 음악 재료를 선택해 사용합니다. 마치 영화 배경 음악처럼요. 하지만, 발레 음악은 영화 음악보다 더 구조적입니다. 감상자가 말이나 글 없이 음악과 무용만으로 줄거리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기억이 가능한 선명한 구조가 전제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여러 명이 함께 추는 군무, 무대의 꽃인 독무와 2인무는 오페라의 합창곡, 독창이나 이중창 아리아처럼 작곡가가 구체적으로 음악을 구상하는 틀을 제공합니다.
'호두까기 인형 발레'는 E.T.A. 호프만이 1816년에 쓴 『호두까기 인형과 생쥐 대왕』을 알렉상드르 뒤마가 각색한 동화에 기반해 총 2막으로 작곡되었습니다. 1막은 주인공인 클라라와 호두까기 인형이 겪는 사건 사고가 펼쳐지고, 2막은 왕자로 변한 호두까기 인형이 클라라와 함께 도착한 과자 나라에서 열리는 연회가 주 내용을 이룹니다. 연속되는 이야기를 중심으로 전개되는 1막과 달리 2막에서는 각각의 무용수가 보여 주는 다양한 춤곡이 다채로운 음악과 함께 펼쳐집니다. 감상자는 주인공과 함께 연회에 참석한 느낌을 받게 되지요.
초콜릿(스페인 춤), 커피(아랍 춤), 차(중국 춤), 트레파크(러시아 춤)를 비롯해 꽃들의 춤, 왕자와 사탕 요정의 2인무(파 드 되, Pas de deux) 등 음악만 들어도 장면이 연상되는 아름다운 발레곡이 이어집니다. 19세기 낭만 음악이 묘사하는 청각적 설명과 화려한 무대 장식을 배경으로 펼쳐지는 아름다운 몸동작은 종합 선물 세트처럼 우리의 오감을 자극합니다.
초콜릿(스페인 춤) - 볼쇼이 발레단
커피(아랍 춤) - 모스크바 발레단
차(중국 춤)와 트레파크(러시아 춤) - 마린스키 발레단
발레는 오페라와 마찬가지로 종합 예술입니다. 작곡가의 음악뿐 아니라 미술가의 무대 장식과 의상, 안무가의 무용이 겹치는 공감각적 창작품이지요. 그래서, 다양한 예술 해석이 다차원적으로 교차하고 어우러집니다. 음악만으로도 우리의 상상력을 충분히 자극하는 차이콥스키의 풍성한 선율과 화성, 독특한 악기 음색과 다양한 리듬은 발레의 완성도를 올리는 데 크게 기여합니다. 낭만 음악으로 표현할 수 있는 환상의 극치가 발레와 결합해 폭발적인 상승효과를 내는 것이죠.
호두까기 인형 모음곡(Op.71a), 라디오 프랑스 교향악단, 미코 프랑크 지휘
아직 발레 전체를 보지 않았다면, '호두까기 인형 모음곡(Op.71a)'을 들으며 나만의 발레를 상상해 보세요. 차이콥스키는 음악을 발레에 맞추기 전, 중요한 음악들만 모아서 관현악 모음곡으로 먼저 선보였고 엄청난 반향을 얻었답니다. 당시 청중처럼, 이 음악을 먼저 듣고 그 이후, 여러 안무가가 제시하는 다양한 해석을 맛보는 겁니다. 내가 상상한 춤과 실제 안무가 비슷하다면 만족감으로 행복할 테고, 그렇지 않다면 예상치 못한 부분에 솜털이 쭈뼛 서는 짜릿한 자극을 받을 수도 있으니까요. 예를 들어, 2막에 등장하는 왕자와 사탕 요정의 2인무를 완전히 다르게 해석하는 두 영상을 보세요. 서로 다른 두 안무가 차이콥스키의 음악으로 어떻게 고양되는지, 무엇에 마음이 더 끌리는지 보며 나의 취향을 가늠해 보는 겁니다.
레나타 샤키로브, 다비드 잘레예프 2인무, 2017년 러시아 마린스키 발레단 공연
마리옹 바르보, 스테판 뷔옹 2인무, 시디 라르비 셰르카위 안무, 2016 파리 팔레 가르니에 공연, 파리 국립 오페라 관현악단 연주
딱딱한 철학책이 주는 교훈을 받아 새기기에는 많이 지쳐버린 한 해의 마지막, 우리가 반복되는 의식처럼 '호두까기 인형'을 찾는 이유는 아마도 복잡한 생각은 새해로 미루고 일단 달콤한 선물로 마음을 달래고, 현실을 잊고 싶기 때문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삶에 대한 걱정도 예측도 없던 어린 시절, 어른이 주는 선물과 맛난 과자로 마냥 행복할 수 있었던 시간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새롭게 시작될 한 해를 버틸 힘이 충전되니까요.
"의례가 뭐야?" 어린 왕자가 말했다.
"그것도 모두들 잊고 있는 것이지." 여우가 말했다.
"그건 어떤 날을 다른 날과 다르게, 어떤 시간을 다른 시간과 다르게 만드는 거야."
_『어린 왕자』, 앙투완 드 생텍쥐페리, 황현산 역, 열린 책들
반복되는 시간을 다르게 만들기 위해 우리에게는 ‘의례’가 필요합니다. 한해를 그저 흘려보낼 수 없는 안타까운 연말, 나만의 의식으로 '호두까기 인형'을 들어 보세요. 올해도, 내년에도, 내후년에도요. 메마른 가슴에 행복을 촉촉하게 뿌려 줄 겁니다. 이렇게 길든 마음은 이제 매번 이 음악을 들을 때마다 자동 반사하듯 우리 뇌 속에 도파민을 끌어낼 거예요. 행복할 이유가 없어도 음악은 일단 우리 마음을 덥히고, 상처에 반창고를 붙여 주기 때문입니다. 음악이 세상에 존재하는 이유이기도 하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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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 선생. 한국, 미국, 프랑스에서 피아노, 오르간, 하프시코드, 반주, 음악학을 공부한 후 프랑스의 렌느 2대학, 렌느 시립 음악원에 재직 중이다. 음악 에세이 『음악의 언어』를 출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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