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타버스 돌풍 속 대중음악
이즘 특집
대중문화를 선도하는 음악계 역시 메타버스에 주목하고 있다. 현실 너머의 광활한 땅을 맞아 조금씩 시류에 탑승하고 있는 국내외 팝 신의 면면을 살펴본다. (2021.10.15)
2018년 개봉한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의 영화 <레디 플레이어 원>은 모든 상상을 현실로 바꾼다. 극심한 빈부격차로 사람들이 신음하는 2045년 지구, 척박한 일상 속 가상 세계 '오아시스'만이 피난처다. 이곳에서 유저들은 실제로 만나본 적 없는 친구들과 어울리고 게임에 참가하며, 고전 영화를 배경으로 한 퀘스트와 대중문화 속 전설적인 캐릭터를 만나는 등 시공간을 자유로이 넘나든다. 과거와 미래의 경계를 허물고 비로소 모두의 꿈을 실현하는 인류의 새로운 생태계, '메타버스(Metaverse)'다.
먼 미래처럼 보이던 모습이 이제 코앞에 다가왔다. 초월을 뜻하는 메타(Meta)와 세계를 의미하는 유니버스(Universe)의 합성어로 3차원 가상 세계를 일컫는 메타버스는 이미 금융, 의료, 교육 등 사회 다방면에 변화를 일으키고 있다. 빅테크 기업들이 뜨겁게 동참하고 있음은 물론이다. VR 기기 '오큘러스 퀘스트2'로 애플의 초기 아이폰과 맞먹는 판매량을 기록한 페이스북과 하이엔드 VR 헤드셋을 발표할 예정인 애플, 그 밖에도 마이크로소프트, 테슬라 등도 무주공산에 깃발을 꽂기 위해 저마다 발 빨리 움직이고 있다.
메타버스가 새 시대의 문명으로 자리 잡기 위해 갖춰야 할 가장 중요한 요건은 무엇일까? 많은 전문가들은 핵심이 '콘텐츠'에 있다는 데에 의견을 모은다. 최첨단 기술을 겸비해도 그 속에 즐길 거리가 없으면 말짱 도루묵이라는 이야기다. 메타버스 관련 기업들의 성패도 참신한 놀잇거리가 있는지에 판가름 날 가능성이 크다. 대중문화를 선도하는 음악계 역시 이 흐름에 주목하고 있다. 현실 너머의 광활한 땅을 맞아 조금씩 시류에 탑승하고 있는 국내외 팝 신의 면면을 살펴본다.
K팝 신에 화끈한 신기술의 돌풍이 인다. 2020년 11월 'Black mamba'로 데뷔한 에스파가 그 주인공이다. 지난 6월 'Next level'로 공개 32일 만에 유튜브 조회 수 1억 건을 돌파하며 매서운 기세를 입증했다. 국내 음원 사이트 정상에 안착하는 것은 물론 독특한 팔 꺾기 '디귿 춤'은 각종 SNS에서도 유행했다. 'Next level'은 이렇게 끝난다. "Next level / 제껴라 제껴라 제껴라!". 그룹의 정체성뿐만 아니라 장대한 이상을 그려가는 기획사의 미래관까지 압축한 한 줄이다.
에스파는 현재로서 K팝이 다다른 세계관의 절정이다. 인원 구성부터 독특하다. 실제 멤버 네 명에 그들의 분신 넷이 공존한다. 개인 소셜미디어 활동을 통해 제공된 데이터로 설계된 각 멤버의 아바타들이다. '싱크(Synk)'를 통해 이들과 교감하고 그를 방해하는 악당의 존재를 찾아 가상의 땅 '광야'로 떠나는 등 그 스토리도 장대하다. 어느 순간 멤버들과 교차되고 무대 위에서 직접 춤추기도 하는 아바타. '삶의 기록'을 뜻하는 '라이프로깅(Life logging)'과 '가상 세계' 메타버스를 결합했고 이를 뒤받치는 건 최첨단의 가상 현실(Virtual Reality)과 증강 현실(Augmented Reality) 기술이다.
SM은 세계관을 음악에 한정하지 않겠다는 야심도 여러 차례 드러냈다. 이수만 총괄 프로듀서는 지난 SM 콩그레스 2021에서 '음악을 기반으로 이전에 없던 경험을 만들기 위한 도전을 계속할 것'이라며 만화, 애니메이션, 웹툰, 모션 그래픽, 아바타, 소설의 앞글자를 딴 'CAWMAN'을 자사의 비전으로 제시했다. 콘텐츠가 디지털 세상에서 팬들을 통해 확장해 가수와 대중이 그 속에서 호흡할 것이라는 귀띔이다. K팝 산업 최전선에 선 SMCU의 미래, 그 중심에 메타버스가 있다.
팬데믹으로 부닥친 일상 구금은 공연 업계에 큰 타격이었다. 가수는 무대 뒤에서 팬들과 멀찌감치 떨어져 기약 없이 기다려야 했다. 메타버스가 대중음악계에 관심사로 급부상한 것도 사실 이런 사정에서였다. 메타버스는 멈춰버린, 그리고 앞으로 크게 바뀔 콘서트 업계에 방책을 내놓을 수 있을까? 그 실마리를 제공한 것은 다름 아닌 게임 산업이었다.
미국의 에픽게임즈가 제작한 '포트나이트'는 온라인 게임에서 대표적인 메타버스 서비스로 거듭난 플랫폼이다. 지난해 4월 래퍼 트래비스 스콧이 이곳에서 가상 공연을 펼쳐 큰 화제를 모았다. 2,770만 명의 관객, 200억 원이 넘는 수익으로 오프라인 공연보다 더 많은 돈을 번 대규모 쇼였다. 방탄소년단도 'Dynamite'의 새 안무 버전 뮤직비디오를 포트나이트에서 최초 공개했고, 올해 8월에는 아리아나 그란데가 '리프트 투어'로 유행의 열기를 이어갔다.
월간 사용자 수 1억5000만 명에 달하는 게임 플랫폼 로블록스의 움직임도 주목해야 한다. 작년 래퍼 릴 나스 엑스는 로블록스 내에서 물리 기반 렌더링, 안면 인식 기술 등을 앞세운 빼어난 몰입감의 가상 공연으로 3,600만 명의 접속자를 모았다. 이 밖에도 트웬티 원 파일럿츠의 콘서트에서는 밴드를 콘셉트로 한 미니 게임과 퀘스트도 선보였다.
로블록스는 대형 음반사의 꾸준한 사랑을 받는 기업이기도 하다. 연초 워너 뮤직에 5억 2천만 달러를 투자받은 데에 이어 7월에는 소니 뮤직과 전략적 제휴를 체결했다. 더 많은 아티스트들의 목소리가 로블록스 안에서 울려 퍼질 거라는 추측이 가능한 이유다.
미국에 로블록스가 있다면 한국에도 이에 뒤처지지 않는 콘텐츠가 있다. 네이버 자회사 네이버제트가 개발한 제페토다. 증강현실 기반의 3차원 아바타 플랫폼이자 글로벌 10대들에게 하나의 소셜 미디어 앱으로 자리매김한 서비스로 전 세계 2억 명이 넘는 유저가 뛰어놀고 있는 새 시대의 놀이터다.
제페토는 K팝 신과 밀접하게 교류하고 있다. 가장 적극적으로 나선 회사는 YG엔터테인먼트다. 지난해 9월 블랙핑크는 제페토에서 멤버들의 아바타를 앞세운 가상 팬 사인회를 개최해 4,600만 명의 세계 팬을 끌어모았다. 그뿐만 아니라 멤버들의 이미지를 바탕으로 구현한 '블핑하우스'는 연일 팬들이 사진을 찍고 춤을 추는 '블링크(BLINK)'의 필수 방문 코스가 됐다.
기존에 있던 단상에 가수의 아바타를 올려놓은 것은 비교적 간단해 보일지 모른다. 하지만 국내 엔터테인먼트 기업들은 자체적인 온라인 팬 플랫폼 제작에도 열성을 다한다. 재작년 하이브는 팬 커뮤니티 서비스 '위버스'를 론칭해 팬과 가수의 다양한 교류 방식을 하나의 채널에 취합하는 전략을 펼쳤다. 게임 회사 엔씨소프트가 카카오 산하 엔터테인먼트 업체들과 합작한 '유니버스'도 전선에 뛰어들었다. 이곳에서 팬들은 아티스트의 아바타를 코디하거나 직접 뮤직비디오를 제작하는 등 능동적으로 참여한다. 메타버스가 선사한 K팝 신 스타와 팬들의 새로운 소통 방식이다.
메타버스가 일상에 고착화하기 위해 필요한 것은 무엇보다 경제시장과의 연결이다. 가상 세계가 가상에만 머물지 않고 현실과 상호운용적으로 교류하기 위해 개인이나 기업이 자유롭게 수익 모델을 창출해 판매하고 화폐를 벌어들이는 것이 가능해야 한다. 이에 최근 몇 년 사이 가상자산 NFT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다. NFT는 'Non-Fungible Token'의 약자로 소유권, 판매 이력 등의 정보가 블록체인에 저장되어 위조가 불가능하고, 각각 디지털 자산에 고유한 인식 값이 부여되어 대체 역시 불가능한 암호화폐를 말한다.
대중음악계에도 NFT를 활용하는 모습을 심심찮게 볼 수 있다. 'Blinding Lights'의 스타 위켄드는 예술 경매 플랫폼 니프티 게이트웨이(Nifty Gateway)에서 낙찰자만 소유할 수 있는 미공개 음원을 판매했다. 수익은 229만 달러(한화 약 26억 원)였다. 이 밖에도 린제이 로한, 미국 밴드 킹스 오브 리온, DJ 저스틴 블라우도 앨범 발매에 NFT를 적용했다. 음원 스트리밍이 절대적인 음악 청취 방식이 된 지금 다시 과거처럼 노래를 개인이 소장하는 형국이 도래할 조짐을 보이는 것이다.
K팝 산업의 발걸음도 바쁘다. JYP엔터테인먼트는 7월 블록체인 업체 두나무와 NFT 플랫폼 사업을 위한 업무 제휴를 맺었다. 국내에서는 산업에 공식적으로 뛰어든 최초 기획사다. 보이그룹 에이스는 4월 미국 블록체인 플랫폼 왁스(WAX)를 통해 멤버들의 사진 등이 담긴 굿즈를 선보였다. 가수뿐만 아니라 인플루언서, 화가, 사진작가 등 다양한 창작자들의 작품을 다루는 K컬쳐 전문 NFT 마켓 플레이스 스노우닥도 등장했다.
NFT 시스템은 가수와 팬 모두에게 윈윈(win-win) 될 수 있다. 아티스트는 무분별한 복제를 막아 창작물의 희소성을 지킬 수 있고, 팬들은 좋아하는 아티스트의 작품을 독점하는 특권을 누릴 수 있다. 물론 아직은 가격대가 지나치게 높아 대중이 진입하기 어렵다는 점은 풀어야 할 숙제다. 투기성 거래의 위험이 크다는 지적도 고민해볼 만하다. 대중음악계와 소비자가 적극적으로 참여해 자체적인 적정선을 마련하는 것이 관건이다.
앞서 언급했듯 미국의 에픽 게임즈는 메타버스와 대중음악을 연결할 방법을 꾸준히 모색해왔다. 포트나이트에서 유저들은 트래비스 스콧의 신곡을 들었고 아리아나 그란데와 함께 날아다니기도 했다. 그리고 이번에는 라디오헤드다. 엥? 라디오헤드? 의외의 인물이다. 라디오헤드가 아바타로 변신해 포트나이트에서 오징어 춤을 추면서 'Creep'을 연주하기라도 하는 걸까?
뭐, 그것도 재미있겠다만 정확히는 아니다. 기술 혁신과 실험 정신으로 똘똘 뭉친 세기의 록 밴드는 메타버스를 활용하는 방식도 남달랐다. 지난 9월 8일 에픽 게임즈와 콜라보한 <Kid A Mnesia Exhibition> 프로젝트의 티저가 플레이스테이션 쇼케이스에서 공개됐다. 밴드의 2000년대 걸작 <Kid A>와 <Amnesiac>의 20주년과 21주년을 기념하는 가상 전시회다.
오는 11월 플레이스테이션5, 맥, PC를 통해 정식 출시 예정이지만 아직 아무런 추가 정보가 없어 정확히 무엇이라 규정하기 어렵다. 그러나 예고편에서부터 범상치 않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리더 톰 요크와 비주얼 디자이너 스탠리 돈우드가 협업한 아트워크와 프로듀서 나이젤 고드리치가 맡은 오디오 디자인이 지하 세계에서 1인칭 시점의 관람자를 디스토피아를 연상케 하는 으스스한 전경으로 초대한다.
가상 공연이나 팬 커뮤니티 기반의 서비스와 달리 아티스트의 명작을 박물관 형식으로 재현한다는 점이 독특하다. 라디오헤드는 매우 난해한 음악을 하는 밴드다. 어쩌면 그들이 미처 다 보여주지 못한 팀의 예술 세계를 메타버스에서 구현할 지도 모를 일이다. 메타버스가 단순 마케팅 수단을 넘어 뮤지션의 내면과 감정을 보다 정교하게 채색하는 캔버스로 진화할지. 결과는 11월에 확인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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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즘(www.izm.co.kr)은 음악 평론가 임진모를 주축으로 운영되는 대중음악 웹진이다. 2001년 8월에 오픈한 이래로 매주 가요, 팝, 영화음악에 대한 리뷰를 게재해 오고 있다. 초기에는 한국의 ‘올뮤직가이드’를 목표로 데이터베이스 구축에 힘썼으나 지금은 인터뷰와 리뷰 중심의 웹진에 비중을 두고 있다. 풍부한 자료가 구비된 음악 라이브러리와 필자 개개인의 관점이 살아 있는 비평 사이트를 동시에 추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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