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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승영의 멸종 위기의 나날들] 번역이 발전하려면

<노승영의 멸종 위기의 나날들> 마지막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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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가들은 하나의 정점을 향해 올라가는 것이 아니라 각자 타고난 모습을 바탕으로 점점 완성되어간다. 닮고 싶은 번역가는 있을지언정 그와 똑같은 문장을 구사하고 싶지는 않을 테니까. (2021.10.15)

언스플래쉬

“번역을 배워서 하는 사람이 어디 있나? 그냥 시작하는 거지.” (일산에 거주하는 47세 A씨) 

내가 출판 번역에 입문한 계기는 2006년 한겨레문화센터에서 ‘강주헌의 번역 길라잡이’를 수료한 것이지만, 실은 그전에도 번역을 하고 있었다. 무턱대고 번역 회사 홈페이지에 들어가 ‘프리랜서 신청’을 클릭하고 샘플 번역을 제출하여 합격했더니, 회사에서는 프로그램 쓰는 법을 가르쳐준 뒤에 바로 내게 일감을 줬다. 번역의 세계에 시험은 있어도 교육은 없다.

그런데도 번역이라는 직업이 건재하고 해마다 수많은 번역가가 배출되는 비결은…… 나라에서 전 국민을 대상으로 10년간 공짜로 번역을 가르쳐주기 때문이다. 내가 번역에 대해 정말 알아야 할 모든 것은 중고등학교에서 배웠다고나 할까. 영어 공부의 4대 요소인 듣기, 말하기, 읽기, 쓰기의 네 가지 중에서 한국의 교육 여건상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하는 것은 읽기이며 읽기는 번역의 다른 이름이니까. 번역료가 오르지 않는 것은 번역가의 문턱이 너무 낮기 때문이라는 말이 있는데, 문턱이 낮을 수밖에 없는 것은 일정 수준의 영어 독해를 할 수 있는 사람이 해마다 50만 명씩 배출되기 때문이다.

물론 10년 넘게 국어 공부를 했다고 해서 누구나 작가가 되는 것은 아니듯 번역에도 어느 정도 재능이 필요하다(이와 관련하여 2020년 글항아리 출판사의 비정기 잡지 『자이테』 1호에 '번역 지능'이라는 글을 기고한 적이 있는데, 출판사의 허락하에 PDF 파일을 링크한다). 한편 15년 가까이 번역을 하다 보니, 경력이 쌓일수록 노하우가 조금씩 생기는 것 같기도 하다.

그렇다면 번역가로 데뷔하기 위해 우선 필요한 것은 (스스로 평가하든, 남에게 평가받든) 재능에 대한 평가다. (내가 수료한) 한겨레 문화센터 번역 강좌는 12주 코스였는데, 열두 번 수업을 들으면서 번역에 대해 배운 것도 물론 많았지만 ―무엇보다 내 번역문에 대한 첨삭 지도를 받으면서 근거 없는 자신감을 치료받을 수 있었다― 강좌의 가장 중요한 소득은 ‘내가 번역으로 먹고살 만한 실력(물론 속력도!)이 될까?’라는 궁금증을 해결한 것이었다.

하지만 진짜 번역 교육은 번역가로 데뷔한 뒤에 이루어지며 그 방법은 독학이다. 첫 책의 첫 장을 펼치는 순간부터 한 문장 한 문장이 연습 문제인 셈이다. 근육을 키우고 싶으면 일단 근육을 손상시켜야 한다는 운동의 철칙처럼, 번역에서도 안 풀리는 문제로 두뇌를 괴롭히고 스트레스를 줘야 그만큼 번역 지능이 향상되지 않을까? 반면 생각 없이 번역한다면 100권을 해도 실력은 제자리걸음일 것이다.

물론 성장하는 경로와 종착지는 번역가마다 다르다. 원래 가지고 있던 글투와 번역 과정에서 점차 다듬어지는 문체, 독특한 어휘 같은 나름의 개성이 있기에, 번역가들은 하나의 정점을 향해 올라가는 것이 아니라 각자 타고난 모습을 바탕으로 점점 완성되어간다. 닮고 싶은 번역가는 있을지언정 그와 똑같은 문장을 구사하고 싶지는 않을 테니까.

그런데 번역가 개인은 이렇게 성장할 수 있다지만 한국의 번역은 어떻게 성장할 수 있을까? 지금의 번역은 30년 전의 번역보다 전반적으로 나아졌을까? 무언가가 발전하려면 각자가 거둔 성과가 공유·전수되고 교류와 경쟁이 이루어져야 한다. 학문과 예술은 이런 식으로 발전한다. 이를테면 학계에서는 책과 강의, 논문을 통해 지식이 전수되고 교류와 경쟁이 이루어진다. 그렇다면 번역에서의 공유와 교류와 경쟁은 어떻게 이루어질 수 있을까?



우선 번역학이라는 학문 분야에서 진행되는 연구와 번역 비평을 들 수 있겠다. 한국번역비평학회에서 야심차게 출간한 연간지 『번역비평』이 좋은 사례일 것이다. 물론 이곳도 학회이기에 학계 인사가 주축을 이루긴 했지만, 잡지의 번역 비평 코너에는 현역 번역가들도 꽤 많이 참여했다. 하지만 아쉽게도 2011년 제5호를 마지막으로 폐간된 것으로 알고 있다. (단순히 원문과 대조하여 오역을 지적하는 것만 해도 엄청난 시간과 노력이 들어가는데 비평의 관점에서 이 일을 해내는 것이 얼마나 힘들지 충분히 짐작할 수 있으므로, 잡지를 복간해달라는 요청은 차마 못하겠다.)

번역가 개인의 차원에서는 옮긴이 후기를 통해 자신의 번역 전략, 힘들었던 부분, 해결 방법 등을 공유하여 다른 번역가들에게 도움을 줄 수 있다. 출판사에서 바라는 옮긴이 후기는 다른 것인지도 모르겠지만, 번역가들이 소통하는 매체로서의 옮긴이 후기라면 앞으로도 열심히 쓸 용의가 있다.

요즘은 유튜브를 비롯한 SNS로 소통하는 방법도 생각해볼 수 있겠다. 번역은 외로운 작업이고 번역가는 오로지 번역서로만 말한다는 것이 지금까지의 통념이었지만, 앞으로는 다른 분야와 마찬가지로 번역에서도 독자나 동료 번역가와의 소통이 더 활발해지면 좋겠다.

무엇보다 바라는 건 번역가 공부 모임이다. 번역가들이 모여서 자기만의 노하우를 공유하고 힘들었던 사연을 하소연도 하고 새내기 번역가들에게 도움이 될 만한 테크닉을 알려주는 자리가 있으면 좋겠다. 『번역비평』 같은 잡지를 현역 번역가들끼리 만들 수 있다면야 꿈만 같은 일이겠지만…… (이하 생략).

영어에 “바퀴를 새로 발명하다Reinventing the wheel”라는 표현이 있다. 남들이 이미 해놓은 일을 백지에서 새로 시작하는 무식한 시도를 가리킨다. 지금의 번역은 번역가마다 바퀴를 새로 발명하는 셈이다. 번역가 한 명이 쌓은 지식과 노하우는 누구에게도 전수되지 못한 채 사라진다. 지금 번역을 시작하는 사람들은 내가 출발한 지점이 아니라 내가 도착한 지점에서 출발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내가 건넨 바통을 이어받아 내가 가보지 못한 곳까지 달려주시길.



번역비평 (연간) : 5호 2011 겨울 [2012]
번역비평 (연간) : 5호 2011 겨울 [2012]
한국번역비평학회
고려대학교출판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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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노승영(번역가)

서울대학교 영어영문학과를 졸업하고, 서울대학교 대학원 인지과학 협동과정을 수료했다. 컴퓨터 회사에서 번역 프로그램을 만들었으며 환경 단체에서 일했다. 『번역가 모모 씨의 일일』을 썼으며, 『제임스 글릭의 타임 트래블』, 『당신의 머리 밖 세상』, 『헤겔』, 『마르크스』, 『자본가의 탄생』 등을 번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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