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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은영의 짧은 소설] 호시절

<월간 채널예스> 2021년 9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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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참 살기 좋지 않았니?" 엄마의 질문에 나는 애써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2021.09.06)


서경이 언니네와 우리 가족은 가장 가까운 이웃이었다. 우리는 1988년에 사흘 차이로 같은 아파트에 입주했고 윗집 아랫집으로 17년을 알고 지냈다. 우리가 살던 아파트는 엘리베이터가 없는 5층짜리 건물에 한 층에 두 가구가 있는 구조였다. 우리는 2층, 서경이 언니네는 1층에 살았는데 아주 추운 날을 빼놓고는 문을 열어놓고 서로 드나들며 지낼 정도로 일상을 공유했다.

우리가 살던 아파트 주차장 옆에는 널찍한 잔디밭이 있었다. 그 잔디밭에서 고무줄놀이를 하거나 백발 뛰기를 할 때면 베란다 너머 서경이 언니네가 보였다. 베란다에는 크고 작은 장독대와 화초들이 빽빽하게 자리하고 있었고 민소매 원피스를 입은 서경이 언니네 아주머니가 파리채를 들고서 분주히 움직이곤 했다.

언니는 나보다 두 살 많았지만 작고 말라서 내 또래로 보였다. 긴 머리를 하나로 묶고 고개를 숙인 채 책가방을 메고 천천히 걸어가던 언니의 모습이 떠오른다. 언니는 눈이 큰 데다 자기 감정을 담아서 이야기할 때면 안 그래도 큰 눈을 더 크게 뜨는 습관이 있었다. 언니네 아주머니 아저씨가 야, 너 그러다 눈 빠지겠다, 아이고, 무서워라, 하면서 놀리던 기억이 난다. 아주 어릴 때는 그 말이 농담인 줄 모르고 정말 언니의 눈이 빠지는 건 아닐지 걱정을 하기도 했다. 

언니에게는 다섯 살 어린 남동생 동주가 있었다. 나는 언니와 동주와 함께 아파트 옥상이나 계단에서 놀기를 좋아했다. 언니네 집에서 텔레비전에 연결된 팩 게임기로 게임을 하기도 했고 부모님이 늦게 돌아오는 날에는 언니네 집에서 저녁을 얻어먹기도 했다. 언니네 부모님이 일이 있을 때는 언니와 동주가 우리 집에서 지냈다. 맛있는 음식이 있을 때 서로 나눠 먹는 건 너무도 당연한 일이었고 여름에는 같이 계곡으로 피서를 가기도 했다.

엄마와 아빠는 그때가 호시절이었다고 내게 말하곤 했다. 서경이 언니네와 어울려 함께 살던 때가 좋았다고, 요즘 사람들은 정이 없고 차갑다고.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그렇다고 답하면서 그 시절에 느꼈던 두려움을 속으로 감췄다. 

두려움만 있던 건 아니었으니까. 나도 가끔은 그때를 그립게 기억하기도 하니까. 학교를 다녀오면 아파트 일층 화단에 할머니들이 모여서 같이 나물을 다듬고 웃으며 이야기하던 모습. 할머니들이 학교 잘 다녀왔냐, 물어 봐주고 살구며 복숭아, 삶은 감자 같은 걸 손에 쥐여주던 기억은 소중하니까.

하지만 거기에는 늘 뭔가가 있었다. 차가운 가시 같은 것이. 어린 나는 그것이 무엇인지 머리로 이해할 수는 없었지만 종종 구석에 몰리는 기분을 느꼈다.

한별이 키가 많이 컸네, 아주 아가씨가 다 됐어, 이따 집에 와라, 반찬 한 거 가져가라. 그런 말을 하던 정다운 어른들, 그중에서도 서경이 언니네 부모님은 엄마 아빠를 제외하고는 내게 가장 가까운 어른들이었다. 

나는 어려서부터 고기를 못 먹었다. 지금도 살코기는 물론이고 고기나 뼈로 국물을 우린 것도 먹지 못한다. 한 점만 먹어봐. 편식하면 못 써요. 서경이 언니네 집에서 밥을 먹을 때면 아저씨와 아주머니는 내게 고기를 권했다. 

고기는 비싸고 귀한 음식이었고 나는 마땅히 그분들께 감사해야 했으므로 억지로 고기를 씹어서 삼키곤 했다. 거봐, 먹을 수 있잖아. 먹다 보면 나중에는 없어서 못 먹을 거다. 그분들은 그렇게 말하며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어느 날은 한 점, 어느 날은 애써서 두 점, 그렇게 고기를 먹으면서 나는 토하지 않으려고 애써야 했다. 

여덟 살 여름방학의 어느 날, 아저씨가 내게 족발을 권했다. 하지만 그날은 아무리 애를 써도 도무지 고기를 먹을 수가 없었다. 

"죄송해요." 

나는 사과하고 입을 다물었다. 아저씨와 아주머니는 즐거운 일이라는 듯 소리 내 웃으면서 나를 보고 말했다. 

"아, 해봐."

아저씨는 깻잎에 족발 한 점을 싸서 내 입 앞에 가져다 댔다. 

"입 열어. 아, 해봐."

나는 울음을 삼키면서 고개를 저었지만 아저씨는 완력으로 내 입에 쌈을 욱여넣었다. 꼭꼭 씹어 먹어라, 어서. 나는 울면서 족발을 씹었다. 아주머니와 아저씨는 그런 내가 귀엽다며 웃으며 나를 쳐다봤다. 동주도 나를 보고 웃었다. 단지 서경이 언니만 그런 나를 차갑게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왜 저렇게 유난이야? 언니의 눈빛은 나를 보고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족발을 먹은 날 나는 집에 가서 토하고 고열에 시달렸다. 온몸에 두드러기가 났고 물조차도 비리게 느껴졌다. 

"애들은 아프면서 크는 거야." 

그렇게 위안하는 엄마에게 나는 내가 서경이 언니네에서 강제로 족발을 먹게 된 걸 말할 수가 없었다. 엄마를 속상하게 하고 싶지도 않았고 서경이 언니 부모님이 엄마 아빠에게 얼마나 큰 힘이 되어주는지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런 일로 분란을 만들고 싶지도 않아서였다.

내가 열 살이 되었을 때 민성이네 식구가 우리 아파트로 이사를 왔다. 우리 집과 서경이 언니네가 이사를 온 지 칠 년 정도 됐을 때였고 주민들끼리 친하게 지낸 지도 꽤 오래되었을 무렵이었다. 민성이는 채 돌이 되지 않은 아이였다. 민성이네 아주머니가 어린 민성이를 업고서 돌아다니던 모습이 떠오른다. 그 다정다감한 이웃들이 민성이네 아주머니를 얼마나 차갑게 대했는지 나는 기억한다. 그렇다고 해서 대놓고 싸늘하게 말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민성이네 아주머니를 향한 어른들의 태도에는 분명 평소와는 뭔가 다른 점이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서경 언니와 계단을 내려오다가 민성이 아주머니와 마주쳤다. 아주머니는 어린 민성이를 업고서 우리를 향해 밝게 웃어 보였다. 너희들 어디 가느냐고 말을 걸었다. 

"놀이터 가려고요."

내가 대답하는 동안 서경 언니는 민성이 아주머니가 투명 인간이라도 되는 듯이 무시하며 계단을 내려갔다. 

"야, 내려와." 

언니는 내게 소리쳤고 나는 당황한 표정의 아주머니를 보며 인사를 하고 언니를 따라갔다.

그 후에도 그런 일이 여러 번 있었다. 언니는 민성 아주머니에게 인사하지 않았다. 아주머니는 그래도 포기하지 않고 언니에게 말을 걸었다. 

"언니 왜 그래?"

어느 날 참지 못하고 언니에게 묻자 언니가 답했다. 

"엄마 아빠가 조심하라고 했어." 

"뭘." 

"전라도 사람 조심하라고 했다고. 저 아줌마도 전라도 사람이래."

언니는 대수롭지 않게 그 말을 하고서 화제를 돌렸다. 나는 엄마 아빠와 서경 언니의 부모님이 했던 말들을 떠올렸다. 전라도가, 전라도가, 그렇게 시작하는 말들을. 나는 전라도가 우리나라의 어느 부분인지도 몰랐고 세상 사람들이 태어난 지역에 의해 구별될 수 있다는 사실도 몰랐다. 내게는 우리 작은 동네가 세계의 전부였기에 어른들의 그런 말들은 기본적인 수준에서부터 이해되지 않았다. 

그러나 어른들의 말에는 힘이 있었다. 어른들이 조심하라고 하는 사람은 조심하고 봐야 했다. 나는 그다음부터 민성 아주머니와 마주치면 피하거나 가까운 거리에서 보게 되면 얼굴을 보지 않고 작게 묵례만 했다. 그런 행동을 하면서 나는 작은 죄책감을 느꼈지만 어른들이 민성이 아주머니를 꺼리는 분명한 이유가 있으리라고 생각했다.

나는 그 아파트에서 그 이후로도 10년을 더 살았다. 민성이 아주머니네가 언제 그곳을 떠났는지는 잘 기억나지 않지만, 그 아파트에서 그렇게 오래 살았던 것 같지는 않다. 나를 보며 애써 웃어주는 민성이 아주머니를 멀뚱히 바라보며 지나갈 때, 나는 힘이 있는 어른들의 세계에 속한 것 같은 기분을 느끼기까지 했다. 


나는 파견 근무를 나간 영국에서 지금의 남편을 만나 그곳에 정착했다. 한국을 떠나 살 거라고는 생각해본 적 없는데 어쩌다 보니 일이 그렇게 진행됐다. 그는 정직하고 헌신적인 사람이었고 비록 타국 생활이었지만 그를 삶의 반려자로 삼는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았다. 

나는 파견을 왔을 때부터 영국 생활에 잘 적응한 편은 아니었다. 한국에서 20대 중반까지 살았던 내가 영국인 수준의 영어를 할 수 없었음에도 내 언어를 두고 은근히 면박을 주는 사람들이 있었다. 길을 걸을 때면 나를 뚫어져라 쳐다보는 남자들이 있었다. 칭챙총, 차이니즈, 곤니찌와, 장난이라는 듯 그 말을 하고 깔깔 웃으며 지나가는 사람들, 합장하는 자세로 인사하는 사람들, 내게 손가락질을 하며 중국으로 돌아가라고 소리치는 사람을 만나기도 했다.

결혼 후 나는 영국에서 석사학위를 땄고, 직업을 얻었고, 아이를 낳았다. 처음에는 직장 동료들에게 내가 겪은 불쾌한 일들에 대해 말했지만 모든 걸 인종차별로 받아들이는 건 좋지 않다는 충고를 여러 번 들은 끝에야 나는 백인들에게 내 경험을 이해받으려는 노력을 접었다. 

"피해의식 갖지 말았으면 좋겠어. 장난이잖아.", "너랑 친해지고 싶었나 보지.", "그래, 기분 나빴을 것 같아.", "조금은 인종차별일 수 있겠다. 그래도 그렇게만 생각하지 마."

아이를 낳은 후 남편과 여러 날 발품을 판 끝에 우리는 5층짜리 건물의 한 플랫(FLAT)을 구할 수 있었다. 우리는 3층에 살림을 차렸다. 5개월 된 에스더는 나를 닮아 예민한 아이였고 자주 칭얼댔다. 나는 포대기에 아이를 싸서 업고 건물 밖으로 나가 아이가 잠들 때까지 산책을 하곤 했다. 영국에서는 사람들이 서로 모르더라도 눈을 마주치며 인사를 했다. 같은 플랫에 사는 사람들은 서로의 삶에 관여하지는 않았지만 건물에서 마주치면 인사를 했고 새로 이사 온 이 플랫도 다르지 않았다.

그래서 처음에는 내 착각이라고 생각했다. 5층에 사는 남자와 그 남자의 어린 두 딸이 내 인사를 받아주지 않는 건. 남자는 나를 멀뚱히 쳐다보고 스쳐 지나갔고 대여섯 살 되어 보이는 그의 딸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런 일이 몇 번 반복되자 나는 그가 노골적인 수준의 인종차별주의자라는 걸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나는 그 남자가 길가에서 자기 이웃의 어깨를 두드리며 사람 좋게 웃는 모습을 봤다. 마트 계산대에서 계산원의 눈을 보며 부드럽게 말하는 모습을 봤다. 그러던 어느 날 남편과 내가 계단을 올라가고 있을 때, 그는 뒤에 따라가는 나를 보지 못하고 내 남편에게 웃으며 다정하게 인사를 했다. 나도 남편 옆에 서서 그에게 인사를 했다. 그는 형식적인 대답을 하고 아래로 내려갔고 나는 그 자리에 얼어붙은 듯 서 있었다. 

"왜 그래?" 

남편의 물음에 나는 지금까지 겪은 일들을 이야기했고 남편은 다시 그 남자를 만난다면 항의하겠다고 답했다. 

"그래, 너는 백인 남자고, 백인 남자의 말은 들어주겠지. 근데 그런다고 뭐가 달라지는데?"

나는 그렇게 말하면서도 남편이 내 말을 정확히 이해하리라고는 확신할 수 없었다. 

다음 날 에스더를 업고 계단을 오르는데 그 남자의 작은 딸들과 계단에서 마주쳤다. 더 작은 애는 고개를 숙여 나를 못 본 척했고, 여섯 살 정도 되어 보이는 큰애는 내 얼굴을 곁눈질로 보면서 살며시 미소 지었다. 요란한 소리를 내며 계단을 내려가는 그 애들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나는 어린 시절의 나를 봤다.

그 일을 겪고 얼마 지나지 않아 나는 엄마와 스카이프 영상 통화를 했다. 엄마는 서경이 언니네 아저씨가 많이 편찮으시다는 말을 했다. 

"그 양반이 우리에게 얼마나 잘해줬니. 참 좋은 사람이었지. "

"그래, 엄마."

"그 양반처럼 모든 사람 다 챙겨주는 사람 없었다. 요즘 그런 사람 없다."

"맞아, 엄마."

"너에게도 참 잘해줬었어."

"그럼, 그럼."

나는 엄마에게 진심으로 그렇게 답했다. 어릴 때 그렇게 가까웠던 아저씨가 아프시다는 말에 나도 마음이 좋지 않았으니까. 하지만 나는 그렇게 말하면서도 내가 어린 시절 그를 왜 두려워했고 서경이 언니네에 가는 것이 왜 즐겁지만은 않았는지 생각했다.

아저씨는 우리를 도와준 고마운 분이었다. 그 사실은 영원히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그는 여러 번 사업을 부도낸 아버지에게 돈을 꿔주기도 했고, 열두 살의 내가 빙판길에 미끄러져 깁스를 하고 입원했을 때 선뜻 병원비를 내주기도 했다. 엄마는 이번 통화에서도 내가 입원했을 때의 일을 이야기했다.

엄마에게는 감동이었을 그때가 내게는 지우고 싶은 순간이었다는 걸 엄마는 끝내 이해할 수 없겠지. 나는 상기되어 이야기하는 엄마의 얼굴을 보며 생각했다. 

내가 입원해 있을 때 서경이 언니네 가족이 문병을 왔다. 아저씨는 자기가 보약을 가지고 왔다고 보온병을 내밀었고 아주머니는 스테인리스 대접에 보온병에 담긴 음식을 쏟아냈다.

"우리 한별이, 이거 먹고 금방 낫자."

아저씨는 재미있는 일이라는 듯 크게 웃으며 내게 대접을 건넸다. 그 대접에는 붉은 기름이 둥둥 뜬 고깃국이 담겨 있었다. 처음 맡아보는 냄새에 구역질이 났다. 아주머니가 그 고깃국에 도시락에 담아온 밥을 말고 숟가락을 내게 건넸다.

"개장국이야. 약 된다 생각하고 먹어."

아주머니가 말했다. 

"아저씨가 너 생각해서 사오신 거야. 감사합니다, 하고 먹어야지."

엄마가 숟가락을 손에 쥐여주면서 내 등을 두드렸다. 꼭 아저씨가 보는 앞에서 먹어야 한다는 무언의 재촉이었다. 

나는 엄마와 아빠를 위해, 그리고 ‘우리’를 위해서 개장국을 숟가락으로 떠먹기 시작했다. 그때를 생각하면 그런 나를 보며 소리 내어 웃던 아저씨, 무표정하게 나를 바라보던 서경이 언니, 혹여나 내가 이 일에 실패할까 봐 전전긍긍하던 엄마의 얼굴이 떠오른다. 

그날, 나는 그 한 그릇을 다 먹으면서도 울지 않았다.


"그때 참 살기 좋지 않았니?"

엄마의 질문에 나는 애써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 최은영

소설가. 소설집 『쇼코의 미소』, 『내게 무해한 사람』, 장편소설 『밝은 밤』 등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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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최은영(소설가)

소설가. 장편 소설 『밝은 밤』과 소설집 『쇼코의 미소』, 『내게 무해한 사람』 등을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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