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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수의 시대 : 불량식품
사사로운 어느 날의 물건 3화
문방구는 온갖 신기한 물건들과 초등학생의 주머니 사정에 걸맞은 간식거리가 있는 환상의 세계였다. (2021.06.04)
급하게 사야 할 물건이 있어 부랴부랴 근처에 있는 문방구에 들렀다. 내가 간 곳은 요즘 흔히 볼 수 있는 깔끔한 체인형 문구점(어쩐지 문방구와 문구점은 꽤 다른 뉘앙스를 띄고 있다)이 아닌 군데군데 오래된 잡동사니들과 장난감에 하얗게 먼지가 쌓여 있고 사방으로 발 디딜 틈 없이 잡화로 빽빽한 진짜 ‘문방구’였다. 안으로 들어오자마자 타임머신을 타고 20년쯤 전으로 돌아간 것 같았다. 잠시 이곳에 온 소기의 목적도 잊고 무엇에 홀린 듯이 하나씩 둘러보았다.
어릴 적 하굣길에는 매일같이 문방구를 향해 자석처럼 발걸음이 이끌리곤 했었다. 그저 오며가며 학교 수업 준비물을 사는 곳이 아니었다. 온갖 신기한 물건들과 초등학생의 주머니 사정에 걸맞은 간식거리가 있는 환상의 세계였다. 방과 후의 많은 시간을 이곳에서 친구들과 시시덕거리며 보내곤 했다. 고사리 같은 손으로 500원짜리 동전을 내밀어 주인아저씨께 건네받은 종이컵에는 떡볶이나 슬러시 음료가 들어있었다. 뜨거운 떡볶이를 호호 불며 친구와 나눠 먹고, 남자애들이 쭈그려 앉아 오락 게임을 하는 모습을 지켜보기도 했다. 도르륵 소리를 내며 굴러떨어지는 랜덤 뽑기를 하거나 축축하고 미끌미끌한 촉감의 괴상한 액체 장난감을 사서 놀거나, 먹고 나면 혀가 새파래지는 사탕을 입에 물고 마냥 즐거워했다.
이처럼 별 것 아닌 일에도 목젖이 보이도록 깔깔 웃던 그 시절의 나는 대체 어디로 가버린 걸까. 어쩔 수 없고, 당연한 일이지만 한편으로는 매캐한 씁쓸함으로 목구멍이 턱 막힌 것만 같았다. 물론 그 나이 때에도 나름의 고민이 있었고 힘든 일도 겪었지만 지금과 다른 점이 있다면 100%의 행복을 누릴 줄도 알았다는 거다. 세상을 보는 눈이 좀 더 맑고, 솔직하고 섬세했다고 생각한다. 천 원짜리 한 장으로도, 아니 돈이 한 푼도 없어도 친구와 몇 시간을 신나게 노는 방법을 알고 있었고 작은 것에서도 기쁨을 찾아낼 수 있었다. 하루 동안 즐거웠던 일과 슬프고 속상했던 일을 양 손가락에 줄줄이 꼽을 수 있었다.
분명 나는 그런 사람이었다. 그런데 왜 지금의 나는 그때와는 다른 사람이 되어버린 걸까? 순수의 시대는 저 멀리 사라져버리고, 어딘가 세상의 때가 묻고 조금은 찌들어버린 나의 모습만 남아 있게 되었다. 나이를 먹는다는 사실이 결코 싫은 것만은 아니지만,(과거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은 추호도 없다) 그 말 속에는 분명 약간의 서글픔이 묻어 있다. 10대에서 20대로, 또 20대에서 30대로 넘어오게 되며 어쩔 수 없이 행복의 기준치는 점차 높고 까다로워져 갔다. 그리고 대신 슬픔과 분노를 다스릴 초연함과 담담함 또한 얻게 되었다. (나만 그런 것은 아니겠지?) 그렇게 자꾸만 매사 단조로운 표정의 어른이 되어간다. 사회 안에서 가면을 쓰고 살아가다 보니 어느 순간 진짜로 그 가면이 내 얼굴이 되어버린 셈이다.
어린 시절에는 친구와 싸우고 나면 집에 돌아와 엉엉 울고, 한참을 속상해하다가 결국 전화를 먼저 걸어 화해를 하고, 다음 날이면 잠시 머쓱해했다가 다시 재잘거리며 세상에서 제일 가까운 단짝 친구로 돌아왔다. 누군가를 가슴이 미어지도록 좋아하고, 혼자 끙끙대고, 생각만으로도 얼굴이 붉어졌다가 밤새워 눈물 흘리기도 했다. 작은 손짓 하나에도 일렁이던 마음이 이제는 단단한 막으로 뒤덮여버린 것만 같다. 분명 그 안에 존재하고 있다는 것은 알겠는데 더이상 쉽게 움직이질 않는다. 심각한 사건 사고를 보아도 분노하고 놀라는 건 그때뿐, 금세 일상으로 돌아와버린다. 닳고 닳아버린 마음이 되어 사소한 일에 이전처럼 투명하게 기뻐하고 슬퍼하지 못한다. 이런 어른이 되고 싶었던 것은 아니었는데, 감정에 솔직해지는 법을 잊어버린 건 아닐까 두렵다. 때로는 이것이 나를 한없이 서글프게 만든다.
문방구를 나서며 만지작대던 사탕 몇 개를 주워들었다. 계산을 하고 바로 껍질을 까서 막대사탕을 입에 물었다. 혀에 닿는 깔깔한 촉감과 불량식품에서만 느낄 수 있는 단맛, 그리운 추억의 맛은 20년 전과 놀랍도록 똑같았다. 모든 것이 변했다고만 생각했는데 그렇지 않은 것도 있었다. 분명 그 시절의 나도 어딘가에 살아있으리란 희망을 품어도 괜찮지 않을까. 사라지거나 바뀌어 버린 것이 아니라 그저 중첩되고 있을 뿐임을 깨달았다. 열 살, 스무 살의 나도, 서른 살의 나도. 그리고 아마 앞으로도 서로를 의지하며 포개어 눕듯 모든 내가 차곡차곡 모여 갈 것이다.
*배현선 그림을 그리고 글을 씁니다. 어딘가 어설프지만 따뜻하고 사랑스러운 존재들을 좋아합니다. 마음에 오래도록 남는 순간들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 《오늘부터 휴가》 《우엉이와 오니기리의 말랑한 하루》 저자 인스타그램 @baehyunseon @3monthsshop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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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 속 조그만 사치를 누릴 수 있어 삶은 또다시 제자리를 찾아간다 ‘무언가를 소비하며 얻는 작고 빛나는 전환점들’ 하루의 끝에서 돌이켜보면 오늘도 많은 것들을 소비하며 보냈구나 싶다. 필요해서 산 크고 작은 물건들, 맛있는 식사를 위한 재료, 쉬지 않고 흐르는 시간…. 『사사로운 어느 날의 물건』은 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