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지영 “그림책은 저의 종착지 같아요”
그림책 『내 마음 ㅅㅅㅎ』
주인공이 마음껏 상상을 하며 자신의 세계를 키우고 나서는 시시했던 마음이 생생하고, 쌩쌩해지잖아요. 아이들은 요절복통한 마음의 혼란을 겪고 나면 훌쩍 크더라고요. (2021.05.13)
잘 가지고 놀던 로보트가 시시해지고, 달콤한 아이스크림도 더 이상 먹고 싶지 않은 날. 아이는 싱숭생숭한 마음에 의문을 품는다. ‘마음이 이상해. 내 마음에 무슨 짓을 한 거지?’
그림책 『내 마음 ㅅㅅㅎ』은 변덕스러운 유아 사춘기 시절 아이의 마음을 담은 작품이다. 아이는 갑자기 찾아온 기묘한 감정을 골똘히 들여다보며 “ㅅㅅㅎ”으로 시작하는 마음의 말을 되뇌고, 곧 싱숭한 마음에서 벗어나 상상의 세계에 빠져든다. 『내 마음 ㅅㅅㅎ』은 사계절출판사에서 주최한 ‘제1회 사계절그림책상’의 대상 수상작이다. 책을 쓰고 그린 김지영 작가는 2019 나미콩쿠르 그린아일랜드상을 수상했고, 그림책 『사막의 아이 닌네』 『이상한 꾀임에 빠진 앨리스』를 출간했다.
지난해 7월, 사계절그림책상 수상작 발표가 있었어요. 299편의 응모작 중 대상을 받으셨는데요. 수상 소식을 듣고 어떠셨어요?
제 생일이 7월이라 생일 선물을 받은 기분이었어요(웃음). 창작하는 사람들은 늘 이런 기회를 노리잖아요. 저 또한 새로운 공모전이 뜨면 으레 참여하곤 하는 편이거든요. 워낙 출중한 작가분들이 많아서, 큰 기대는 안 했는데 대상이라는 말을 듣고 정말 놀랐죠(웃음). 너무 좋았어요.
어떻게 작업하게 된 그림책인가요?
두 딸을 키우고 있는데, 아이들이 3~4살 무렵에 한동안 “시시해” “심심해” 같은 말을 정말 많이 했어요. 자아가 크면서 스스로 하고 싶은 게 많아지는데, 뜻대로 되지 않아서 감정이 요동치는 ‘유춘기(유아 사춘기)’ 시절을 아이들과 함께 겪으면서 아이디어를 얻었죠. 언젠가 한 번쯤은 언어를 재미있게 풀어보는 그림책을 만들고 싶었는데 “시시해, 심심해”의 초성을 따서 ‘ㅅㅅㅎ’를 반복해보니 재미있더라고요. 그동안 모았던 아이디어를 토대로 2019년에 첫 더미를 만들었어요.
이번 그림책을 통해 궁극적으로 하고 싶은 이야기가 무엇이었나요?
아이들에게는 심심하고, 시시한 순간이 왔을 때 상상의 세계로 들어가 자기만의 세상을 충분히 만끽해보라는 이야기를 하고 싶었고요. 이 책을 함께 볼 부모님들께는 유춘기를 겪는 아이들에게 눈높이를 맞추고, 그 시기를 잘 기다려준다면 금세 괜찮아질 거라는 말을 하고 싶었어요. 아이들은 아주 작은 것에도 큰 기쁨을 느끼고 굉장히 좋아하는데, 어느 순간 또 모든 게 다 싫다고 하는 날이 오더라고요. 제가 초보 엄마일 때는 그게 이상하다고 생각했어요. 지금 생각해보면 아이의 마음이 자라는 과정이었던 것 같아요. 이번 그림책에서도 주인공이 마음껏 상상을 하며 자신의 세계를 키우고 나서는 시시했던 마음이 생생하고, 쌩쌩해지잖아요. 아이들은 요절복통한 마음의 혼란을 겪고 나면 훌쩍 크더라고요.
초성 ‘ㅅㅅㅎ’로 시작하는 다양한 말들이 실렸어요.
모두 사전에 있는 단어로만 구성했어요. 후반부에 나오는 “냠냠해”도 표준국어대사전에 실려 있는 말이죠. 그림책에는 빠졌지만, 처음 응모한 더미에는 그림 아래에 단어의 사전적 의미를 함께 적었었어요. 아이들이 그림을 보고, 단어의 뜻을 함께 읽으면서 ‘내 감정이 이렇구나’ 하고 알게 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거든요.
아깝게 탈락한 단어들도 있나요?
개인적으로 제일 아까운 건 “수술해”였어요(웃음). 초기 더미에는 ‘내 마음이 이상한 건 누군가 몰래 마음을 수술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는 내용이 있었거든요. 그 외에도 좋은 단어들이 많았죠. “순수해”도 있었고, “쉬쉬해”도 재미있었어요. 가족들이 나만 빼고 쉬쉬해서 화가 났다는 내용이었는데요. 책 작업을 하면서 앞 부분의 비중을 줄이느라 빠졌어요.
응모한 작품과 그림책을 비교하면 어떤 부분이 가장 달라졌어요?
내용이 더 확장됐어요. 심심해하던 아이가 중간에 상상으로 빠져드는 쪽으로 이야기가 수정되면서 더욱 다채로운 작품이 되었죠. 가장 많이 바뀐 건, 전면을 채우는 그림이 추가된 거예요.더미작에서는 글, 그림이 한 면씩 자리하고 있었거든요. 출판사에서 아이들이 상상에 빠지며 자신의 세계가 넓어지는 것처럼, 책 속의 그림도 넓어지는 형태로 가보자는 제안을 주셔서 후반부는 수정을 많이 했어요. 덕분에 내용이 훨씬 풍부해졌다고 생각해요.
판화 느낌의 그림이 인상적이에요.
판화과를 졸업해서 늘 판화의 느낌을 동경하거든요(웃음). 그림책에 실린 그림이 실제 판화는 아니고요. 컴퓨터 그래픽으로 판화 소스를 찍고, 콜라주 작업을 했어요. 여러 색과 이미지가 겹치고, 때로는 핀트가 안 맞는 판화의 매력을 보여주고 싶었어요. 학부 때는 핀트가 어긋나게 작업하면 교수님들께 혼났는데(웃음) 그림책에서는 재미있는 요소로 보이는 것 같아요.
사용된 색상이 적은데, 그림은 굉장히 화려한 느낌이 들더라고요.
색감을 통일하고 싶어서, 어떤 색을 사용할지 신경을 많이 썼어요. 책에는 주로 3가지 색이 나오는데요. 다양한 색상을 사용할 때보다, 최소한의 색으로 작업을 했을 때 훨씬 더 강렬한 표현이 가능할 것 같더라고요. 여러 색상 중 어떤 것들이 어울릴지 찾아보고 핑크와 파랑, 주황을 선택했어요.
개인적으로 제일 마음에 드는 그림은 무엇인가요?
“그런데 혼자 노니까 너무 심심해” 부분이요. 주인공이 너무 심심한 나머지, 텅 빈 방에서 다양한 포즈를 취하잖아요. 그 장난스러운 모습이 귀엽기도 하고, 가장 아이다운 사랑스러움을 잘 보여준 장면이었다고 생각해요. 이 과정을 지나서 상상의 세계로 빠져들게 된다는 점에서도 의미가 있고요.
ㅅㅅㅎ의 초성이 돌아가고, 더해지는 등 변주되어 등장하는 게 재미있었어요.
처음 아이디어 스케치를 할 때, 여러 시도를 해봤어요. 시옷이 꼭 눈썹 모양 같아서 아이 얼굴에도 넣어봤고요. 시옷을 한자 人(사람인)처럼 쓸 수도 있고, 도형처럼 쓸 수도 있잖아요. 그래서 ‘초성을 돌려보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했죠. ㅅㅅㅎ을 돌리면 ㄱㄱㅎ, ㄴㄴㅎ로 바뀌니 더 다양한 이야기를 풀어갈 수 있겠더라고요. 그런데 작업하면서 고민이 많았어요. ‘아이들이 나의 상상력을 따라와줄까?’하는 의문이 들었거든요. 아이들이 이해해주길 바랄 뿐이에요(웃음).
상상 속 세계에 등장하는 외계인, 우주 괴물들도 독특하더라고요.
남자 아이인 주인공이 좋아할 법한 것들을 많이 가져왔어요. 아이들이 공룡, 우주 같은 걸 많이 좋아하잖아요. 여기서 외계인은 아이와 전혀 상관없는 존재가 아니에요. 방에 있던 장난감이기도 하고, 가족들이 외계인의 모습으로 변해서 나타나 있기도 하죠. 아이들과 그림책을 읽으면서 엄마, 아빠, 동생이 어떤 모습으로 변했는지 한번 찾아보시면 재미있을 거예요(웃음).
이 책의 이야기는 아이가 가족에게 서운함을 느끼면서 시작되잖아요. 상상 속 세계에서는 그 섭섭한 마음이 외계인으로 표출되는 거예요. 가족 외의 다른 외계인들도 아이가 좋아하는 로봇, 공룡 등으로 표현했어요. 아이가 좋아하는 장난감들이 상상에서는 조력자가 되어서 아이를 도와주는 거죠.
외계인으로 변한 엄마는 우주에서도 계속 잔소리를 하는 것처럼 보여요(웃음).
맞아요(웃음). 주변의 존재들이 상상으로 펼쳐지면서 아이의 세계가 더 풍성해지죠. 내 방에 있던 물건들이 상상에서는 놀이동산이 되기도 하고, 내가 좋아했던 음식들이 쏟아지는 등 또 하나의 환상의 세계가 만들어지는 거예요. 현실에서는 아이가 부모님과 화해하지 않았지만, 상상 속에서 같이 어울리면서 마음을 풀어가는 의미를 담고 싶었어요.
이번 그림책 작업을 하며 기억나는 에피소드가 있다면요.
작년에 코로나가 터지는 바람에 한동안 아이들이 유치원에 가지 못했어요. 사회적으로 코로나에 대한 공포감이 심할 때였거든요. 그래서 아이들을 데리고 친정에 가서 지내며 작업을 했어요. 아이들이 놀거나 잘 때 틈틈이 작업을 하느라 너무 힘들었는데요. 아이러니하게도 지금까지 작업한 그림책 중 가장 마음에 들어요(웃음). 집에서 쓰는 컴퓨터를 가지고 갈 수가 없으니, 노트북 하나로 작업을 했거든요. 어떻게 보면 가장 열악한 환경에서 만든 그림책인데 좋은 결과가 나왔다는 게 신기해요. 작업할 시간이 주어졌을 때, 최대한의 집중력을 발휘하다 보니 그런 것 같아요.
아이들로부터 그림책에 대한 영감을 많이 받는 편인가요?
아니에요. 오히려 제가 아이들에게 해주고 싶은 말을 책으로 만들 때가 많았죠. 물론 아이들이 하는 재미있는 말과 행동, 그림 같은 것들이 아이디어가 될 때도 있지만, 책으로 이어지진 않았거든요. 그런데 『내 마음 ㅅㅅㅎ』는 유일하게 아이들로부터 이야기가 시작된 책이에요. 동시에 제가 하고 싶은 이야기도 많이 담을 수 있었고요.
그림책을 만들 때 이야기에 비중을 많이 싣는 편이에요. 첫 책 『사막의 아이 닌네』도 동화 같은 이야기였고, 『이상한 꾀임에 빠진 앨리스』도 설명적으로 풀었어요. 그런데 작업을 하면 할수록, 아이들 눈높이에 맞추게 되는 것 같아요. 이번에는 이야기보다 아이디어를 중심으로 작업했어요. 아이들이 책을 읽으며 서사보다는 감정의 흐름을 더 느끼는 책으로 만들고 싶었거든요. 사계절그림책상 심사위원님들도 그 부분을 좋게 봐주신 것 같아요. 보편적인 이야기를 어떻게 하면 다른 그릇에 담을 수 있을지 고민을 많이 했어요.
두 딸이 이번 그림책을 보고 들려준 이야기가 있나요?
요즘 초성놀이를 많이 하거든요. 그래서 책을 보자마자 ㅅㅅㅎ에 맞는 단어들을 딱딱 맞추더라고요. 작업하면서 ‘어린이 독자들이 이걸 좋아해줄까?’하는 걱정을 많이 했는데, 아이들은 생각보다 더 작가의 의도를 잘 알아주는 것 같아요.
전작 『이상한 꾀임에 빠진 앨리스』 작가 소개에 “그림책의 이상한 꾀임에 빠져서 몇 년째 그림책 만들기에 빠져 살고 있다”고 썼어요. 어떤 꾀임이었나요?(웃음)
그림책은 저에게 종착역 같은 존재예요. 그림 그리고, 책과 이야기를 좋아하면 그 끝에는 늘 그림책이 있는 것 같아요(웃음). 저는 주로 일러스트 작업을 많이 했는데요. 이런 저런 그림 작업을 하다 보니 언젠가는 내 이야기를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때부터 틈날 때마다 아이디어를 계속 모으고, 더미 작업을 했어요. 빠져나갈 수 없는 그림책의 굴레에 들어간 거죠(웃음).
두 딸에게 보여주는 그림책을 고르는 기준이 있을까요?
아이들에게 선택권을 줘요. 물론 제가 원하지 않는 선택을 할 때가 많지만요(웃음). 보통 저처럼 작업하는 입장에서는 창작 그림책을 좋아하잖아요. 작가들이 그걸 만들기 위해 얼마나 고생했는지 알고, 아이들이 그걸 보면서 자신의 세계를 넓히기를 바라는데, 아이들이 좋아하는 책의 기준은 다르더라고요. 제가 볼 때는 이야기가 탄탄하지 않고, 그림이 썩 괜찮지 않아도 아이들이 사랑하는 책들이 있어요. 그 선택을 존중하는 편이에요.
앞으로 어떤 그림책을 만들고 싶으세요?
처음 그림책을 만들 때는 독자에 대한 생각을 잘 못했어요. 그저 그림책 만드는 게 즐거워서 했던 일인데, 엄마가 되고 나서야 아이들이 정말 즐겁게 읽는 그림책이 있다는 걸 알게 됐죠. 저도 아이들의 눈높이에 맞춰서 재미있게 읽을 수 있는 그림책을 만들고 싶어요. 아이에게 재미있는 그림책은 어른에게도 재미있더라고요. 그래서 요즘은 보편적인 주제의 이야기를 어떻게 하면 색다르게 표현할 수 있을지에 대해서 많이 생각해요.
오늘의 인터뷰 소감을 ‘ㅅㅅㅎ’으로 표현해주신다면요?
세심해! 책 내용을 세심하게 살펴보고 던지는 질문을 받으니, 잠시 잊고 있던 순간들이 다시 떠올랐어요. 덕분에 이번 책 작업에 대해 다시 한번 정리할 수 있는 시간이었습니다(웃음).
*김지영 홍익대학교 판화과를 졸업하고 현재 일러스트레이터와 글, 그림 작가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사막의 아이 닌네>를 출간하여 2012년 문화체육관광부 우수도서로 선정되었으며, 그 외 작품으로 <어린이 탈무드>, <초등 교과서 국어>, <나리 노리 시리즈>, <마지막 잎새>, <아모스 이야기> 등 다수 그림책과 문고 책이 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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