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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신지가 사랑에 빠진 그림책] '한 개의 노'로 할 수 있는 일

<월간 채널예스> 2021년 5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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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 어린이의 책 읽기 경험> 방에서 그림책 [노를 든 신부]를 알게 되었다. 책의 내용은 이렇다. 외딴섬에 사는 주인공 소녀는 결혼하여 섬을 떠나는 친구들을 보며 본인도 섬을 떠나기로 결심한다. (2021.05.07)

그림_ 오소리 


결혼기념일을 맞아 짧은 여행을 갔다. 목적지는 강원도 양양. 낙산사 옆 호텔에 묵으며 낙산사도 둘러보고 통통한 대게도 먹었다. 편안한 하루를 보낸 다음 날 조식 뷔페를 먹으며 남편과 오래전 결혼식 날을 회상했다. 결혼’식'을 하고 싶지 않았던 우리는 결혼식을 떠올리며 좋은 이야기보다 아쉬운 이야기를 많이 한다. ‘그래도 어쩔 수 없지. 그냥 결혼식 하자.’라고 결론을 냈던 그 지점에 대해 오래 이야기한다. '결혼식은 부모님을 위한 행사’라는 말과 ‘일생에 한 번 뿐’ 이라는 말에 무력해졌던 과거의 우리를 떠올리며 앞으로는 그런 실수를 하지 말아야겠다고 다짐하는 시간이다. 

결혼식에서 가장 후회되는 것은 신부 화장과 웨딩드레스다. 초면인 메이크업 선생님에게 내 얼굴을 맡기고 안절부절했던 그날의 아침이 생생하다. 얼굴에 드리워진 커다란 속눈썹 그림자를 보고 당황했던 나, 그리고 그게 마음에 안 든다고 표현하지 못했던 내가 생각난다. 웨딩드레스도 마찬가지다. 심플한 흰 원피스를 입고 싶었지만 그런 옷은  ‘재혼용’이라는 웨딩플래너의 말에 소심해져 ‘초혼용’ 드레스 중에 가장 심플한 것을 골랐다. 재혼용이면 어때서. 아니, 그런 게 세상에 어디 있다고. 정신 차려보니 나는 불편한 드레스에 두꺼운 화장을 하고 있었다. 많은 사람을 초대해서 내가 아닌 모습을 보여주는 일을 했다. 

얼마 전 클럽하우스에서 <여자 어린이의 책 읽기 경험> 방에 들어갔다. <여자 어린이의 책 읽기 경험> 방은 아동문학가 김지은 선생님께서 만든 자리였는데 각자 어린이일 때 읽었던 책 특히 여자가 주인공인 책을 소개하고 감상을 나누는 곳이었다. 공주 이야기가 싫어 공주가 안 나오는 책을 찾아 읽었다는 사람도 있었고 모험 이야기 주인공이 대부분 남자라는 사실에 분노하며 어린 시절을 보낸 사람도 있었다. 

그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내가 읽은 책을 떠올렸다. 그림책 속 많은 여자 주인공은 공주였고 그들은 왕자를 기다렸다. 결국 왕자를 통해 행복을 찾았는데 그 행복이란 결혼해서 아이를 낳고 오래오래 사는 것이었다. 왕자를 만나는 여정은 책마다 다양하지만 결론은 같았다. 목소리를 잃은 여자도 일곱 난쟁이와 우정을 나누던 여자도 모두 왕자를 만나 결혼해서 행복하게 살았다. 한 번쯤 ‘왜 여자의 행복은 결혼이 전부인 것처럼 그렸을까?'라고 생각해 봤을 법도 한데 그런 기억은 없다. 


오소리 작가의 <노를 든 신부>의 한 장면

<여자 어린이의 책 읽기 경험> 방에서 그림책 『노를 든 신부』를 알게 되었다. 책의 내용은 이렇다. 외딴섬에 사는 주인공 소녀는 결혼하여 섬을 떠나는 친구들을 보며 본인도 섬을 떠나기로 결심한다. 부모는 기뻐하며 드레스와 노를 한 개 마련해 준다. 그러나 한 개의 노를 가지고 바다를 건널 수는 없었다. 여자는 다른 쪽 노를 가진 사람을 찾아다니기도 하고 노없이 움직이는 커다란 배를 가진 사람을 만나기도 한다. 그렇지만 모두 여자가 원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러다 한 개의 노를 가지고도 할 수 있는 일이 있다는 것을 깨닫는다. 꼭 바다를 건너 가야 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도, 원한다면 배를 타는 것 말고도 바다를 건너는 방법이 있다는 것도 알게 된다. 세상의 비밀을 알게 된 여자의 의연한 표정이 정말 멋지게 그려져 있다. 



다시 한번 나의 결혼식을 돌아보면 내가 두려웠던 것은 부모님을 실망시키는 것도 일생에 한 번뿐인 일을 하지 않아 후회하는 것도 아니었다. 남들과 다른 선택을 하는 것이 두려웠던 것이다. 나는 왜 한 개의 노를 가지고도 잘 살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지 못했을까, 나는 왜 내가 입고 싶지도 않은 드레스를 입고 신부 대기실에 앉아 있었을까, 나는 왜 공주가 나오는 이야기를 비판 없이 받아들였을까, 왜 주체적으로 생각하고 선택하지 못했을까. 과거의 일을 후회하고 싶지는 않다. 아무것도 바뀌는 것은 없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 과거의 일을 잊지 않으려고 한다. 나는 자칫하면 다수의 흐름에 내 몸을 맡기는 사람이라는 것을 경험을 통해 알았기 때문이다. 항상 눈을 번쩍 뜨고 살고 싶다. 나만의 노를 가지고 나만의 삶을 꾸리고 싶다. 노를 든 신부처럼 의연하게.



노를 든 신부
노를 든 신부
오소리 글그림
이야기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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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수신지(만화가)

서양화와 일러스트레이션을 공부했으며, 글과 그림으로 만들 수 있는 이야기에 관심이 많많다. 만화책 <3그램>, <며느라기> 등을 펴냈으며, 여러 그림책의 일러스트를 작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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