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 연재종료 > 이라영의 언어는 권력이다
[이라영의 언어는 권력이다] 여성 : 최선을 다해 모욕하라
‘이라영의 언어는 권력이다’ 5회
이처럼 남성사회는 최선을 다해 돈과 시간과 열정을 들여가며 여성을 모욕한다. 여성을 모욕적으로 부르는 게 기본형이 되어서 때로는 어떻게 불러야 할지 몰라 ‘어이!’라고 한다. (2021.03.26)
국민의힘 조수진 의원이 더불어민주당 고민정 의원을 “왕자 낳은 후궁”에 빗댄 적이 있다. 이 발언이 비판을 받자 그는 어정쩡한 사과와 변명을 했다. “비유적 표현이 모욕이나 여성 비하로 논란이 되고, 정치적 논쟁의 대상이 됐다는 사실이 안타깝다”고 했다.
비유적 표현이 논란이 되어 그는 억울한 모양이다. 정치인들은 촌철살인을 통해 존재감을 발휘하려 애쓰지만, 대체로 촌철살인을 통해 입담을 과시하겠다는 욕심으로 오히려 자신의 차별적 의식만 고스란히 폭로한다. 표현은 그 자체로 이미 사상을 담기 때문이다.
상대가 남성이었다면 ‘후궁’이라는 위치를 생각하지 못했을 게 자명하다. ‘왕자 낳은 후궁’은 최고권력자의 아들을 낳아 권력을 얻는 여성이다. 여성이 권력을 얻는 방식을 남성과의 연결을 통해서만 상상하는 자기 내면의 고백이다. 그렇기에 태도가 마음이며, 형식이 내용이고, 언어가 곧 정치다.
가부장제 사회는 여성이 스스로 권력을 가질 수 없도록, 남성의 총애를 받아야만 부분적으로 권력을 얻을 수 있도록 시스템을 짠다. 이때 아들을 낳는다면 가장 훌륭한 권력인 ‘아들의 어머니’가 될 수 있다. 실제로 ‘아들의 엄마’는 여성에게 중요한 정체성으로 자리한다. 이 모든 것이 실은 제한된 권력이며 가상의 권력이지만 여성들에게 이 제한된 가상의 권력만이 여성이 품을 수 있는 단 하나의 ‘올바른 권력’인 것처럼 보이게 만든다.
‘왕자 낳은 후궁’에 불쾌감을 느끼더라도 근본적인 문제의식을 갖지 못하면 여성은 그저 다른 방식의 어머니로 꾸준히 변주될 뿐이다. 예를 들어 이낙연 의원이 “인생에서 가장 크고 감동적인 변화는, 소녀가 엄마로 변하는 순간”이라고 말한 것처럼, 여성을 칭송하는 가장 좋은 방식은 여전히 ‘어머니’이다. 곧, 어머니인 여성만이 최소한의 시민권이 생긴다는 뜻이다. 그렇기에 박영선 서울 시장 후보를 지원하기 위해 또다시 이낙연은 “엄마의 마음으로 아이를 보살피고 기르고, 딸의 심정으로 어르신을 돕는 자세를 갖춘 후보”라고 한다. 박영선 후보 스스로도 “엄마 시장 박영선에게 맡겨달라”고 호소하며 “엄마 리더십”을 강조한다. 공적 영역에 여성의 자리가 없기에 ‘엄마’로서 자리를 구해야 한다. ‘왕자 낳은 후궁’이든 ‘엄마’든 재생산을 충실히 수행한 여성이 권력을 가진다는 암시를 준다. 단지 비난을 위해서는 야망 있는 엄마(후궁)를 끌어오고, 칭송하기 위해서는 희생하는 어머니를 내세울 뿐이다.
사회에서 어떤 권력을 비판할 때 흔히 ‘권력의 시녀’라 한다. 한국에서 대표적으로 ‘권력의 시녀’로 비판받는 집단은 검찰이다. 아래와 같은 예문이 특별히 의미가 없을 정도로 ‘권력의 시녀’는 사용빈도가 매우 높다.
“검찰을 권력의 시녀로 만들려 하느냐” (2020.12.1 <서울신문> 사설)
“‘권력의 시녀’ 검찰 vs ‘권력의 충견’ 경찰” (2020.1 <시사저널> 1580호)
개는 인간을 향한 충성의 상징이며, 여성은 남성의 보조자 역할을 충실해 해야 한다. 권력은 남성성과 밀접하지만 권력에 아첨하는 인물로는 개와 여성을 끌어들인다. 검찰총장과 경찰청장은 항상 남성이었다. 여성이나 개가 한국에서 검찰총장이나 경찰청장이었던 적은 없다. 검사 중에서 여성은 30% 정도이며 부장검사를 거쳐 검사장으로 갈수록 여성 비율은 적어진다. 한국에서 최초의 여성 검사장은 조희진 전 제주지방검찰청 검사장으로, 무려 2015년이 되어서야 ‘최초’로 여성이 검사장이 될 수 있었다. 그럼에도 검찰 권력을 비판하기 위해서는 줄곧 ‘시녀’라 부른다. 오염되고, 부패하고, 주제넘게 덤비는 권력을 여성화한다. 흥미롭게도 검찰 내부에서 가장 두드러지게 싸우는 사람들은 임은정 검사나 서지현 검사처럼 여성이다.
세상은 속임수의 언어로 가득하다. 재산이 1500억이 넘는 안철수 국민의 당 대표가 박영선 후보를 향해 ‘도쿄에 아파트 있는 아줌마’라고 했다. ‘아줌마’라는 지칭도 문제지만, ‘아파트 있는 아줌마’로 불렀을 때 ‘아파트 있는 아저씨’와는 다르게 들린다. 여성은 집과 땅으로 비유되지만 실제로 주택과 땅은 남성이 더 많이 소유한다. 그럼에도 부동산 투기꾼의 대명사는 ‘복부인’이다. ‘복부인’에 해당하는 남성형은 없다. 다시 말해, ‘아파트 있는 아줌마’는 훨씬 탐욕스러운 인상을 준다. (게다가 도쿄의 아파트는 박 후보의 배우자가 도쿄에서 근무하는 동안 거주한 집이다.)
이처럼 부정적인 성질을 여성화하는 언어습관은 비단 정치인들만의 태도는 아니다. 평소에 사람들이 하는 말을 관찰해보면 대체로 부정적인 상황일수록 많은 사람들이 다음과 같이 말한다.
“아파트 관리소장이 여잔데......”
“의사가 여잔데......”
“주민센터 직원이 여잔데......”
그 뒤에 이어지는 내용이 성별과 무관함에도 여성이었음을 특별하게 언급함으로써 성별과 부정적 상황 사이에 인과관계가 있는 것처럼 보이는 착시효과를 만든다. 이런 말들은 여성 스스로를 움츠러들게 만들고 훨씬 더 자기검열에 시달리도록 한다.
여성형 지칭이 부정적으로 사용된다면 남성형은 어떨까. 작년부터 코로나 19로 수출이 한동안 막혔음에도 일부 상품은 오히려 특수를 누렸다. 예를 들어 초코파이, 신라면, 월드콘 등은 코로나에도 ‘효자 상품’이라고 한다. 이때 ‘효자’는 중성적으로 사용되었다고 우길 수 있다. 그렇다면 왜 우리는 좋은 의미일 때만 남성형을 가져와 중성적인 척 사용하는 걸까. 검찰을 권력의 시종이라 하지 않지만 수출 상품은 ‘효자’가 된다. 초코파이와 신라면이 효자가 되는 건 그나마 봐줄 수 있다.
“톡톡 두드려 완성하는 ‘쿠션팩트’, 글로벌 시장 효자 노릇 ‘톡톡’”
K뷰티 상품인 쿠션이 글로벌 시장에서 효자 노릇을 한다고 한다. 쿠션은 압도적으로 여성들이 사용함에도 효녀 상품이라 불리지 않는다. 그러나 적어도 문장 안에서 쿠션 구매자의 성별이 드러나지 않기에 상대적으로 위화감이 덜하다. 아래와 같은 문장은 어떤가.
“‘편의점 효자 상품’은 “1020세대 여성들을 겨냥한 색조 화장품”
여성들을 겨냥한 상품이지만 역시 ‘효자 상품’이다. 이 모든 언어들을 정리해보면 나쁜 짓은 여자가 하고 돈은 남자가 벌어온다. 모욕은 여성에게, 영광은 남성에게 돌린다. 이런 습관은 실로 광범위하게 우리 언어에 자리 잡았다. 대체로 이분법적 성 구별하에 부모, 형제자매, 남녀처럼 남성을 지칭하는 말이 여성을 지칭하는 말보다 앞에 온다. 그러나 년놈처럼 욕을 할 때는 여성을 앞세운다. 또한 암수, 자웅처럼 생식기 중심으로 설명하거나 동물을 이를 때도 암컷을 앞세운다. 인간과 문명사회는 남성화하고 동물은 여성화한다.
주로 영어와 영어 번역에서 드러나는 언어와 성차별의 관계를 다룬 김귀순의 『젠더와 언어』에 따르면 “남성을 나타내는 단어는 힘, 지위, 자유, 독립을 함의하는 데 비하여 여성을 상징하는 단어는 의존, 열등, 부정 등을 나타내고 있으며” 이에 해당하는 예로는 bachelor과 spinster가 있다. 독신 남성과 독신 여성에 대한 의미가 사회적으로 다르게 쓰이다 보니 결국 bachelor girl이라는 여성형을 따로 만들 수밖에 없었다. ‘실 잣는 여자’에서 유래한 독신 여성을 뜻하는 spinster는 의미가 변질되어 ‘추하고 매력 없는 독신 여성’을 뜻하는 말로 쓰이게 되었기 때문이다. 이런 단어는 매우 많은데, master의 여성형인 mistress는 남성형과는 그 의미가 전혀 다르게 ‘정부’나 ‘타락한 여성’ 등의 의미로 쓰인다.
이처럼 남성사회는 최선을 다해 돈과 시간과 열정을 들여가며 여성을 모욕한다. 여성을 모욕적으로 부르는 게 기본형이 되어서 때로는 어떻게 불러야 할지 몰라 ‘어이!’라고 한다. 정은경 질병관리청장을 ‘국민 맏며느리’라 칭하던 어떤 ‘아저씨’처럼, 여성을 향한 지칭과 호칭의 언어들은 마치 가부장제의 발악처럼 들린다. ‘어머니’ 없으면 자궁과 젖가슴 사이에서 돌봄받지 못할까 봐 불안해서 살 수 없는, 성장을 거부하는 ‘아들’들의 칭얼거림이다.
추천기사
관련태그: 예스24, 채널예스, 이라영칼럼, 이라영의 언어는 권력이다, 추천도서, 에세이
프랑스에서 예술사회학을 공부했다. 현재는 미국에 거주하며 예술과 정치에 대한 글쓰기를 이어가고 있다. 지은 책으로 『여자 사람, 여자』(전자책), 『환대받을 권리, 환대할 용기』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