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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김현영의 여자들의 사회] <고양이를 부탁해>, 우리가 떠날 수 있게

<권김현영의 여자들의 사회> 4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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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제도 내의 성차별 문제가 고쳐지든 말든, 그 결혼 안 하면 그만이다. 외롭지 않냐고? 고양이와 살면 되지. 작당모의를 함께 할 친구들과 함께. (2020.10.07)

<권김현영의 여자들의 사회> 

여성학자 권김현영이 영화, 소설, 드라마, 예능 프로그램 등에 나온

‘여자들의 관계’에 초점을 맞춰 3주에 한 번 글을 씁니다.



영화 <고양이를 부탁해> 포스터


영화 <고양이를 부탁해>(정재은, 2001)는 구제금융위기 이후 여자상업고등학교를 졸업한 다섯 명의 스무 살 여성들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개봉 당시 영화사가 내건 홍보문구는 ”스무 살, 섹스 말고도 궁금한 건 많다“였다. 맞다. 이 영화에는 섹스에 대한 이야기는 전혀 나오지 않는다. 그렇다고 여자들 사이의 풋풋하고 낭만적인 우정에 대한 영화도 아니다. 이 영화가 가장 공들여 담아내고 있는 건 다름 아니라 ‘일하는 여성’으로서의 삶이다. 영화의 시대적 배경은 IMF 직후. 시작은 환하기 그지없다. 교복을 입은 다섯 명의 고등학생들은 인천 앞바다 부두에서 바닥에 놓여진 밧줄을 향해 달려가 고무줄놀이를 하며 소리높여 깔깔 웃는다. 영화는 소녀들의 행복한 한때를 보여주는 것 같은 따뜻한 포스터와 홍보문구를 보고 들어온 관객들이 기대했을 법한 딱 그런 장면으로 시작한 다음, 자 됐지?라고 말하는 듯 이후 다시는 어디서 본 듯한 익숙한 장면으로 돌아가지 않는다. 


인천에서 제일 좋은 여상을 졸업했지만

태희(배두나)는 한곳에 머무르지 않고 계속 돌아다니고 싶은 사람이고 혜주(이요원)는 강 앞에 그림 같은 전원주택을 짓고 살고 싶은 사람이다. 비류와 온조(이은실, 이은주)는 서로에게 온전히 속해있어 결핍이 없는 존재로 나오고, 지영(옥지영)은 가고 싶은 곳도 갈 데도 없다.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사회에 내던져진 다섯 명의 소녀들은 각자의 방식으로 삶을 이어나간다. <고양이를 부탁해>는 여고동창회에 온 중년의 여성들이 추억하는 방식과는 아주 다른 방식으로 이야기의 타래를 풀어간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지 1년 후, 다섯의 현재는 이렇다. 태희는 졸업하고 아버지의 찜질방에서 무급으로 일하고 있고, 혜주는 ‘빽’으로 증권사에 들어갔다. 지영은 회사가 부도가 나 일자리를 잃고 식당에서 일하고 있고, 비류와 온조는 인천차이나타운 인근에서 악세서리를 만들어 판다. 태희는 친구들과 한달에 한번은 만나야 한다며 부지런히 약속을 잡지만 이들은 각자 짊어진 짐을 가누기도 벅찬 상태가 되었고, 학창 시절에 가장 친했던 혜주와 지영은 만날 때마다 싸운다. 혜주는 “내 이십 평생에 가장 큰 실수가 뭔지 알아? 여상 간거. 인천에서 제일 좋은 여상 나오면 뭐하니. 누가 알아주지도 않는 거. 후회는 안 해. 정신 차리고 살 수 있게 해줬다고 생각해. 사람들은 잠시라도 허점을 보이면 바로 무시해버린다고. 항상 긴장하고 살아야 하는 거야. 잠시라도 방심하면 꽝이야 꽝” 이렇게 큰소리치지만 증권사에서 고졸신입 여자사원의 위치는 초라하기 그지없다. 영어도 곧잘 하고 졸업성적도 좋은 혜주는 노력만 하면 자신 역시 능력을 발휘할 기회가 올 거라고 생각하지만 선망하는 팀장(문정희)은 “평생 잔심부름이나 하는 저부가가치 인생을 살 거냐”면서 야간대학이라도 다니라고 충고한다. 

지영의 처지는 더욱 참담하다. 할머니 할아버지와 함께 사는 집이 점점 무너져내리는 와중에 회사까지 부도가 나서 그동안 일한 월급도 받지 못한 상태다. 다니던 회사에서는 공장 기계들 처분하는 대로 월급 밀린 거 보내주겠다고 했지만 기약은 없다. 새로 구직을 하러 간 곳에서 면접관은 이렇게 묻는다. “백 미터는 몇 초에 뛰어? 낮술은 좀 하나? 고등학교 때 성적은 꽤 좋은 편인데, 자격증은 여기 적힌 게 다야? 컴퓨터는 잘해? 운전은 할 줄 알아? 그럼 영업부는 안되겠고 경리 밖에 할 게 없는데, 서류에 보니까 부모님이 모두 돌아가신 걸로 되어 있네? 경리 일을 보려면 신원보증을 해줄 직계 가족이 필요한데...” 취직은 글렀다고 생각한 지영은 집에 돌아와 머리를 노랗게 염색한다. 


<고양이를 부탁해>의 한 장면


IMF 시대 여성청년들의 곤궁

인천에서 제일 좋은 여상을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했는데도 취직하기 어렵다니. 구제금융위기 이전에는 ‘명문 여상’이라는 개념이 있었고 집안 형편이 넉넉하지 않거나, 대학에 뜻이 없는 애들은 상업고등학교를 졸업해서 즉시 취업하는 것도 나쁘지 않은 선택지였다. 취업 하나만 보고 갈만한 선택이었다. 나는 2003년 첫 대학강의를 은행의 고졸 여성 직원들을 대상으로 하는 야간대학에서 시작했는데 당시 은행과 산학협력을 맺은 대학은 강사에게 직접 은행으로 가서 수업을 하라고 했다. 매주 화요일 밤 7시에 은행의 교육장으로 가서 마감을 하고 저녁식사를 하고 온 학생들을 기다렸다. 아마도 대학졸업장을 따기 위해 늦깍이 공부를 하는 고학생이겠거니라고만 생각했던 인식은 첫날부터 완전히 깨졌다. 이들은 모두 수십년을 근무해온 은행의 핵심 인력이었고 상당히 높은 임금을 받고 있는 정규직이었다. 구제금융위기 이후에 도입된 노동유연화 제도들에 대한 수업을 한 날이었다. 한 학생(?)이 이런 말을 했다. “그러니까 고졸로 바로 입사해서 은행에서 20년쯤 근무하면 연봉이 팔천쯤은 되는데, 이제 그런 세상은 다시는 오지 못한다는 얘기네요” 이십 대 초반의 초임 강사였던 나는 그때 일 년에 천 만원이나 벌었을까. 갑자기 정신이 확 들었다. 구제금융위기 이후에 이런 사다리가 완전히 사라진 거구나 하는 실감이 났다. 수업을 듣고 있는 학생들은 은행의 1, 2단계 구조개혁에서 살아남은 생존자들이었다. 당시 정리해고 된 다음에 다시 돌아와 비정규직으로 기존의 업무를 똑같이 하고 있는 K언니 얘기가 수업 중에 종종 언급되었는데 십수 년의 숙련노동자였지만 비정규직이 되자마자 월급은 절반으로 깎였고 평생 소원이 대학졸업장을 따는 거였는데 이번 야간대학 교류프로그램도 대상자가 아니라 제외되었다고 했다. IMF 이후 이전에는 없었던 방식의 노동자 간의 구별이 생겨났고 바로 눈앞에서 노동자들끼리 서로 보이지 않는 차별을 실행하기 시작한 시기였다. 

한 문화평론가는 IMF에 여성들은 사모님 몇 분을 제외하면 끄떡없었고 여성은 항상 위기였고 빈곤했으므로 구제금융위기 역시 새삼스러울 것이 없다고 했는데, 얼토당토않은 얘기다. 1997년 구제금융위기 직후 노동 동향을 살펴보면 가장 직격탄을 맞은 건 다름 아닌 젊은 여성들이었다. 1998년 1/4분기 경제활동인구는 전년대비 평균 1% 감소했는데, 성별을 보면 여자는 4.1% 감소했고 남자는 오히려 1% 증가했다. 1998년 2월 근로자파견법이 통과되었는데 당시 파견이 허용된 27개 업무 중 20개 업무가 여성비중이 압도적으로 높은 분야였다. 은행 보험 증권 업계의 경우에도 여성우선해고가 공공연하게 이루어져 노동청에서 특별대책이 나올 정도였다. 정리해고 대상자도 여성이 우선이었다. 구제금융위기에 대응하기 위해 은행을 시작으로 대대적인 구조조정이 이루어지는데, 1997년 말에 33개였던 은행은 2000년에 11개로 정리된다. 1/3이 일자리를 3년만에 잃은 것이다. 여성 청년들은 비정규직과 실업이라는 이중의 타격을 받았다. 1999년 즈음에 경기가 차츰 회복했지만 한번 내려간 청년실업율은 다시 올라가지 않았고, 무급가족종사자 비율은 경제위기 때마다 가파르게 올라갔다. 아버지의 찜질방에서 무급으로 일하면서 가족들에게 백수 취급을 받고 있는 태희(배두나)가 바로 이 상황에 놓여진 여성청년이었다. 


영화 <고양이를 부탁해>의 한 장면


고양이를 부탁해 우리가 떠날 수 있게

막막한 현실 속, 이들에게 돌파구는 관계였다. 하층계급 여성들은 직계 가족을 넘어서 조금 더 넓은 관계망에서 서로 필요한 정보를 공유한다. 주디스 스미스는 이렇게 말한 바 있다. 

“ 직계가족에게만 관심을 쏟았던 전문직 계층과는 달리 가난한 노동계급 여성들은 친척이나 친구들 같은 더 큰 관계망에 의존했다. 그들은 함께 자녀를 키웠고, 직업을 찾았으며, 부부관계에서는 충족되지 않는 동료애를 나눴다. 하루 벌어 하루 먹고 사는 사람들은 그런 인간관계가 반드시 필요했다.” 

-캐일린 셰이퍼, 한진영 옮김, 『집에 도착하면 문자해』, 반니, 2020, 29쪽 

지영을 그렇게 살펴봐 주는 이들은 골목길에 함께 사는 동네 주민들이다. 지영네 집에 쓰레기봉투를 챙겨주고 식당 일자리도 알아봐 주는 동네분은 나중에 지영네 집이 끝내 무너졌을 때에도 곁을 지켜준다. 지영도 지키고 싶은 게 있다. 해고를 당하고 돌아오는 길에 늘 간식을 주던 아기고양이 티티. 티티는 처음에는 혜주의 생일파티에 선물로 건네졌지만 다음날 혜주가 고양이를 키울 수 없다며 돌려준다. 지영은 무너져내리고 있는 지붕 아래의 집에서 갈 곳이 없어진 아기고양이를 키우기로 한다. 그리고 할머니 할아버지는 결국 무너진 집 아래에 깔려서 돌아가신다. 

지영은 빈소에 찾아온 태희에게 고양이를 부탁하고 경찰서에 가서 참고인 진술 조사 중에 입을 다물어버린다. 아마 형사가 한 이 말 때문이었을 것이다. “ 야 노란머리. 니 소원대로 귀찮은 노인네들 죽었으니까 속이 시원할 거 아냐.”  노란 머리로 염색하기 전 지영은 취직을 하려고 사방팔방 돌아다니면서도 무너지고 있는 천장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구청, 집주인 등에게 전화를 한다. 하지만 아무도 지영의 말에 귀를 기울여주지 않는다. 그런데 경찰서에서 마치 조부모를 지영이 죽이기라도 한양 다그친 것이다. 지영은 그때부터 입을 다물어버리고 구치소에 수감된다. 소식을 듣고 지영을 면회하려고 찾아온 태희는 지영에게 이렇게 말한다. “ 형사 아저씨가 그냥 형식적으로 조사하는 중이었는데 네가 말을 안해서 상황이 더 나빠지고 있는 거 같애. 지영아 나는 네가 도끼로 사람을 찧어 죽였다해도 네 편이야. 다 이유가 있어서 그런 거라고 생각해. 나 너 믿어.” 지영은 비로소 입을 연다. “나가도 갈 데도 없는데 뭐” 

태희는 짐을 싼다. 옥스퍼드 영어사전과 밧줄과 삶은 계란과 책과 신문지에 싼 현금. 그리고 친구들과 함께 서울의 두타에 쇼핑을 갔을 때 산 맥가이버칼을 꺼내 가족 사진에서 자신의 모습을 도려낸다. 비류와 온조에게 가서 티티를 부탁하고 구치소로 가 지영을 기다린다. 태희는 출소하는 지영에게 손을 내밀며 이렇게 말한다. “악수하자고. 티티는 비류와 온조한테 부탁했어. 걔들이라면 잘 키워줄거야. 내가 졸업하고 일 년 동안 아빠한테 돈 한푼도 못받고 일했거든. 나 정도로 열심히 일하면 얼마인지 알아보고 딱 그 정도만 훔쳐가지고 나왔어.” “어디로 갈 건데?” “가면서 생각하지 뭐. 혼자 다니는 거 보다는 너랑 함께 다니는 게 더 좋을 거 같아서” 이렇게 태희와 지영은 아기고양이 티티를 비류와 온조에게 부탁하고, 한국에서의 탈출을 감행한다. 


고양이와 살면 되지

<고양이를 부탁해>의 결말이 헬조선 탈출이었다면 이십여 년이 지난 지금, 헬조선 탈출 역시 답이 아니다. 2017년 2월, 여성들이 서울 광화문 정부서울청사 앞에서 기자회견을 했다. 출산율 제고를 위한 대책으로 고소득 고학력 여성들에게 하향결혼을 제안하는 한국보건사회연구원의 저출산 대책 보고서에 대한 항의였다. 불꽃페미액션 회원이라고 밝힌 이들은 여성을 가축으로 취급하는 정부를 규탄하며 낮은 출산율의 원인은 독박육아와 경력단절 등 유자녀 기혼여성들이 겪고 있는 성차별이라는 점을 분명히 했다. 여기까지는 익숙한 전개다. 그런데 현수막의 내용은 이랬다. ”정부야 아무리 나대봐라 내가 결혼하나 고양이랑 살지“. 갑자기 고양이라니. 고양이는 이 집회의 성격을 완전히 다르게 만들었다. 기존의 규범을 가볍게 거절한 이들은 낡은 세상과 결별을 선언했다. 이들은 정부에게 무엇을 요구하려고 나온 게 아니라 이미 세상은 달라졌다고 말한 것이다. 결혼제도 내의 성차별 문제가 고쳐지든 말든, 그 결혼 안 하면 그만이다. 외롭지 않냐고? 고양이와 살면 되지. 작당모의를 함께 할 친구들과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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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권김현영(여성학자)

여성학 연구자. 언제나 여자들에 대한 글을 쓰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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