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클러버] 이다혜 “여성이 내면을 전시하기까지”
도리스 레싱 『금색 공책』을 함께 읽다
현대 소설에서 여자 주인공은 능력이 특출한 사람으로 그려지기보다는 오히려 불안정하고 복합적이고 쉽게 정의할 수 없는 사람으로 그려지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 내면을 전시할 수 있는 권리가 그 전에는 여자들에게 주어지지 않았기 때문이죠.(2020. 08. 13)
7월 13일, 이다혜 작가의 북클러버 두 번째 모임이 다산북살롱에서 열렸다. 같이 읽은 『금색 공책』은 20세기 문학사에서 중요한 작품이자 페미니즘 문학을 이야기할 때 빼놓기 힘든 경전으로 꼽힌다. 자유를 갈구했던 한 여성 작가의 일상과 자아상을 통해 자유주의와 공산주의 사이에서 격동하던 1960년대를 그려낸 소설이다. 제국주의와 인종주의, 반전(反戰), 공산주의의 몰락, 여성해방운동 등의 사회적 주제가 녹아들어 있다.
오바마 전 미국 대통령은 재임 기간에 읽은 책 중 하나로 『금색 공책』을 꼽았고, 『시녀 이야기』의 저자이자 부커상 수상자인 마거릿 애트우드는 도리스 레싱을 추모하는 글에서 주인공 애나 울프가 자신의 눈을 뜨게 해주었다고 밝히기도 했다. 김영란 전 대법관은 『금색 공책』을 가리켜 “빠르게 변화하는 세계를 담은, 인식의 지평을 넓힐 수 있는 책”이자 “여성운동가에게는 교과서 같은 책”이라며 추천했다.
『금색 공책』은 문단의 호흡이 매우 길다. 대사는 모호하고, 지문에서만 구체적인 사실이 드러나기 때문에 빠른 속도로 읽어내려가기 힘든 작품이다. 이다혜 작가는 낭독을 위주로 이 작품을 같이 읽어가기를 주문했다.
“이 정도 길이의 이야기에 매달려 있는 시간을 경험하는 게 문단문학이나 순문학이 가지는 중요한 독서 체험 중 하나입니다. 금방 읽을 수 없기 때문에 오래 걸리고, 계속해서 이해하려고 신경을 쓰고, 쓰여있지 않은 것도 본인이 겪은 경험과 엮어서 생각해야 하죠. 그렇게 긴 시간 체험해야 하는 책도 분명 있다는 생각이 들어요.”
주인공 격인 애나는 작가인 도리스 레싱을 어느 정도 반영한 인물이다. 도리스 레싱 역시 실제로 영국에서 공산당 활동을 하면서, 공산주의자들이 당시 소비에트 연방에 경도된 방식으로 활동하는 것에 대한 반감이 있었다. 개인사가 녹아있는 만큼 책에서도 과거와 현재를 오가며 공산주의에 관한 이야기와 삶에 대한 이야기를 풀어놓는다.
“저번에 읽었던 『빌러비드』의 주인공이 고등교육을 받지 못했기 때문에 정연한 방식의 스토리텔링을 하는 사람이 아니었다고 한다면, 이 책의 주인공은 반대입니다. 너무 많은 생각을 하는 사람이어서 이런 생각, 저런 생각을 가지고 일기와 소설도 써 보는 생활을 하는 거죠. 자기 기록을 가지고 어떻게 전하면 좋을지 너무 많은 생각을 하는 사람이기 때문에 어떻게 보면 내면의 일기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바깥에 있는 독자에게는 남의 내면으로 들어가서 그의 개인적인 신변까지 알아내야 하는 이야기가 되었죠.”
또 하나 책을 어렵게 하는 요인이 있다면, '세계문학 최초의 탐폰'이라는 책의 설명문이다. 탐폰은 무엇을 상징하는 것이며, 생리혈은 무엇을 상징하는 것일까? '다가오는 여성 해방 운동의 거의 모든 주제를 예견한 페미니즘 문학의 경전을 넘어 성 대결의 이분법을 극복하고자 하는 우리 모두의 필독서'라는 설명도 있다. 이 책에 쏟아진 다양한 찬사가 오히려 독자를 혼란스럽게 만들기도 한다.
“이런 것들을 읽을 때는 언제냐, 대개 책 본문이 안 읽힐 때 읽거든요. (웃음) 그런데 봤더니 더 헷갈리는 거예요. 이 책에서 제일 파악하기 어려운 부분 같아요. 워낙 『금색 공책』이 도리스 레싱의 대표적인 작품으로 꼽히기 때문에 이 책에 관한 글도 많은데요. 오늘은 그것 중에서 도리스 레싱 자신이 쓴 서문을 먼저 읽어볼게요. 71년 판 서문을 보면 도리스 레싱이 여성 해방 운동이라는 딱지를 거부하고 있다는 인상을 받게 됩니다.”
가끔은 그 시대의 아주 보편적이고 대표적인 목소리로 그러는 까닭에 그들은 이름 없는 존재가 되기도 하고, 오래된 도덕극에 등장하는 교리 씨와 '어디에도 속하지 않으니 난 자유로워' 씨, '사랑을 쟁취해야 해 그리고 행복도' 양, '뭐든 잘해야만 해' 부인, '진짜 여자는 어디있나' 씨, '진짜 남자는 어디 있나' 양, '난 미친 게 분명해 사람들이 그렇다고 하니까' 씨, '모든 걸 경험하며 살기' 양, '나는 혁명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 씨, 그리고 '이 작은 문제들을 잘 해결하면 큰 문제들을 감히 대면하지 못했다는 사실을 잊을 수 있겠지' 부부가 되기도 한다.
- 13쪽
“작가가 자기 작품에 대해 이렇게 길게 쓰는 일은 이례적이에요. 심지어 93년에 쓴 두 번째 서문도 짧지는 않습니다. 이 작품에 관해 작가가 소설의 방식이 아니라 직접 이야기하고 싶었던 내용이 있기 때문에 이렇게 썼을 거라는 생각이 들죠. 특징을 성별로 구분해 이야기한 부분이 있는데요, 자유로움은 남자에게 주어지고 사랑과 행복은 여자가 추구하는 가치로 되어 있어요. '진짜 여자라는 건 어디에 있나' 씨가 말하는 '진짜 여자'는 잘 꾸미고 온순한 개념의 여성이겠죠. 궁극적으로는 차별주의자면서 자신의 차별주의를 인식하지 못하는 사람 정도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진짜 남자는 어디에 있나' 양도 비슷한 개념이죠. 옛날 방식으로 기사도를 가진 남자를 찾는 여성을 뜻합니다. 이 부부는 직면해야 할 큰 문제를 못 본 척 하고 지엽적인 것에만 집착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모든 걸 다 여자와 남자로 나눈 다음 성별에 따라 역할을 구분하는 상태에 관해 도리스 레싱은 분명하게 자신은 그런 상태가 아니라고 이야기한다. 이다혜 작가는 이에 관해 최근 페미니즘 논의를 볼 때 이전 세대와 지금 세대의 차이점 중 하나는 '남자를 어떻게 할 것인가'의 문제 같다고 밝혔다.
“결국 책 속에서 애나가 곤란에서 탈출하는 방법도 결국 어떤 남자를 통해서 이루어지는 이야기처럼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그리고 초반부 대화도 여자들이 모여서 이야기를 하는데 계속해서 대화의 결론은 그 자리에 있든 없든 어떤 남자에 관한 이야기가 됩니다. 한국식 표현으로 이야기하면 남자의 '기를 죽이기 않기 위해' 적당히 어르고 달래서 기운을 북돋우는 식의 대화나 장면들도 있어요. 실제 모습을 이야기하지 않고 반쯤은 거짓말로 상대방의 용기를 북돋우는 거죠.”
페미니즘이 대두되면서 소설 속 여성 주인공들이 당당하게 말하지 못하는 장면에 대한 비판도 생겨나고 있으나, 현실에서 왜 여성들이 에둘러 말하는 방식을 쓰는지에 관해 이야기하는 것도 중요하다. 책 속에서 애나는 공산당에 관해서는 무엇이 문제였고 어떻게 이야기해야 할 것인지 준비된 필자였지만, 남자와의 관계를 이야기할 때는 훨씬 더 조심스러워 한다.
“세계문학전집에 포함된 남성 작가들이 쓴 글을 보면 전형적인 인물이 등장합니다. 단순하게 요약하면 주인공의 앞길을 막거나 위기를 만드는 여성이 등장하죠. 보통 아름다운 여자가 나오면 남자 주인공을 유혹하고, 아름답지 않은 여자가 나오면 남자 주인공을 구박합니다. 하지만 우리가 실제로 살면서 맞닥뜨리는 인간 관계에서는 이런 면도 있고 저런 면도 있죠. 주인공은 대개 복합적인 내면을 보여줍니다. 용기 있는 사람처럼 보이지만 어떤 때는 비겁하고, 누구한테는 못된 사람이지만 누군가한테는 괜찮은 사람이죠. 그러나 여성들을 등장시킬 때는 다면성이 없어지는 거예요. 일부 남성의 문제가 아니라 사회 전체가 이 편견을 공유할 때 문제가 됩니다.”
소설 속에서 애나와 몰리는 리처드와 결혼한 사람에 관해 이야기를 나눈다. 리처드는 비서와 바람을 피우고 있는데, 이 비서는 아내와 외모가 비슷하게 생겼다. 리처드는 자신의 힘듦을 애나에게 호소하고, 애나는 입을 다문다. 사무실에서 나와 지하철을 탄 애나는 또 추행을 당한다.
“사건이 빠르게 진행되는 소설은 아닙니다. 소설 속 상황을 애나는 어떻게 파악하고 있는지, 어떤 생각을 하는지 조직해서 읽어가야 하므로 시간을 들여 읽어야 합니다. 책 말미에 보면 번역자가 쓴 해설이 있어요. 도저히 줄거리를 모르겠다 하시면 말미를 읽어보시면 됩니다. 하지만 시험을 치려고 이 책을 읽으시는 건 아니잖아요. 일단 작가가 써놓은 순서대로 처음부터 끝까지 읽어보시라는 말씀을 드리고 싶어요.”
이야기를 다 읽고 나면 '주인공이 A에서 B까지 가는 이야기' 등으로 요약해서 말하기가 어렵다. 줄거리 상으로는 얇지만 자기가 경험한 것들을 여러 가지 방식으로 언어화하는 과정이 필요했기 때문에 이야기는 복잡해진다.
“설령 자기 연민이라 하더라도, 겉으로 보기에는 별 것 아니어 보이는 것도 내면에서 얼마나 많은 생각을 하는지 보여주려면 책 두 권이 된다는 거예요. 그 과정이 여자 주인공에게 벌어진다고 생각하면 이해가 빠르실 것 같습니다. 애나가 어떤 사람인지 묻는다면 쉽게 말하기 어렵다는 거죠. 어떤 때는 자기 주관이 확고하고 남자에게 메이지 않는 사람 같아 보이지만, 어느 순간에는 확실하게 자기 의견을 말해야 할 때 말하지 않는 거죠. 페미니즘 영향권 하에 있다고 하는 현대 소설에서 여자 주인공은 능력이 특출한 사람으로 그려지기보다는 오히려 불안정하고 복합적이고 쉽게 정의할 수 없는 사람으로 그려지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 내면을 전시할 수 있는 권리가 그 전에는 여자들에게 주어지지 않았기 때문이죠.”
이다혜 작가는 평소에는 잘 읽어볼 기회가 없는 책이기 때문에 이번 기회를 통해 한 번 읽어볼 것을 추천했다. 다음 모임은 제발트의 『아우스터리츠』를 같이 읽을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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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ijungchung@yes24.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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