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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고운의 부귀영화] 만날 수 없는 나의 딸에게

전고운의 부귀영화 10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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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린 만날 수 없어. 만나기 싫은 것은 아니야. 나도 네가 궁금하고, 너를 만난다면 인생이 바뀌는 기막힌 경험을 할 거라는 것도 알아.(2020. 07. 16)

이홍민(일러스트)

딸아! 

오늘 이 편지를 쓰게 된 것은 고민을 나눌 상대가 너밖에 생각나지 않아서야. 너 말고는 아무도 내 속에 관심이 있을 사람이 없을 것 같거든. 네가 담배를 피운다면 담배나 한 대 피우며 가볍게 읽어주길 바라. 

엄마는 요즘 앉아 있기가 싫어. 계약금을 받아서 시나리오를 써야 되는데, 말도 많고 탈도 많은 세상에 나까지 이야기를 더 보태서 뭐하냐는 생각만 들어. 쓰고 싶은 것도 없고, 딴짓하느라 시간 다 까먹다가 허리만 아픈데 앉아서 뭐하겠니. 척추 낭비지.

엄마는 밖을 나가기도 싫어. 나가면 뭐해. 한 발짝 뗄 때마다 돈인데, 돈 낭비지. 엄마 나이쯤 되면 머리숱이랑 친구들이랑 하나둘씩 사라지는데, 둘 다 참 안타까운 일이야. 엄마에게 친구란 것은 서로의 상태가 궁금하고, 그래서 듣고 싶고, 흉금을 터놓고 대화를 나누는 존재인데, 이제는 흉금을 터놓지 못해. 겉도는 이야기를 하거나 다들 자기 이야기만 하기 바빠. 다들 엄청 열심히 사는데 그만한 보상이 없는 시대에 살고 있어서 시간이나 마음의 여유가 없거든. 어쩌다 만나게 되도 웃지만 웃기지 않고, 슬프지만 울지 않아. 얼마나 재미가 없니. 재미만 없는 게 아니라 모든 게 괜찮은 척 연기하는 것도 지쳐. 

그래서 엄마는 최선을 다해서 누워만 있어. 차라리 누워만 있으면 좋을 텐데, 손가락은 어찌나 부지런한지. 누워서 손가락으로 스마트 폰 속 세상을 떠돌아다녀. 유령처럼. 1초 감동하고 넘기고, 1초 화내고 넘기고, 1초 웃고 넘겨. 타인의 삶도 1초 만에 판단하지. 재밌지만, 재미없어. 

뭘 해도 더럽게 재미없다. 이쯤 되면 너도 느끼겠지만 나도 알아. 엄마 인생은 망한 것 같아. 궁금한 것도 없고, 하고 싶은 것도 없어. 보고 싶은 사람도 없고, 가고 싶은 곳도 없어. 오직 식탐만 늘고 군살만 늘어가. 쉬운 것만 하고 싶고, 어려운 것은 무슨 수를 써서도 피하려고 하는 스스로가 한심하지만, 그 한심함도 1초야. 다 넘어가. 모든 게 너무 빨리 넘어가는 것이 슬펐던 때도 있었는데, 그 시기도 넘어가 버렸네. 

엄마는 이게 다 고인이 된 스티브 잡스 때문이라고 생각해. 죽은 사람을 탓해서 무엇하겠냐마는 이건 진짜 그 사람 때문이야. 총이나 마약처럼 사람의 육체를 죽이지는 않기 때문에 스마트폰의 위험함이 등한시되지만, 스마트폰은 정신을 죽여. 내 정신이 죽은 것은 지독하게 편리한 이 작은 폰 때문이라고 엄마는 확신한다. 딸아, 어느 순간에라도 지독하게 편리할 때는 의심해야 돼. 조심해. 세상에 공짜는 없거든. ‘그것’이 없을 때는 엄마도 책탐이 넘쳐서 자기 전까지도 읽어댔고, 심심하거나 외로울 때는 간절히 사람을 찾아 헤맸었어. 그런 시절이 있었지. 엄마는 뜨거운 사람이었거든. 하지만 그것을 만나고 나서는 책도 안 읽으려고 하고, 사람도 안 만나려고 해. 우리는 SNS로 많은 생각과 순간을 공유하고 살아가는 것 같지만, 실은 아무것도 나누지 못하기도 해. 1초짜리 감정은 그냥 쓰레기거든. 기억에 몸에 남지 않아. 경험한 것 없이 본 것으로만 다 안다고 생각하며 늙어가는 거지. 

잘 먹고, 잘 지내 보이지만 거대한 무기력에 정신을 못 차리고 있어. 상태의 이유조차 찾기 어려워졌어. 왜 이렇게 무기력한지 알고 싶지만, 알고 싶지 않아. 심심하지 않지만, 심심하고. 행복하지만 슬픈. 모든 게 엉켜있어. 심플한 게 없지. 마치 한글과 영어가 섞여 있는 방금 전 문장처럼. 

그래서 딸아. 

우린 만날 수 없어. 만나기 싫은 것은 아니야. 나도 네가 궁금하고, 너를 만난다면 인생이 바뀌는 기막힌 경험을 할 거라는 것도 알아. 돈이 없다는 것도 그냥 같잖은 핑계일 뿐이고. 어쩌면 네가 이 천국을 가장한 지옥 같은 삶을 구원해줄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많이 해. 

하지만 우린 만날 수 없을 거야. 

엄마는 크게 슬프지도 않아. 슬퍼하는 것도 대단한 능력이거든. 

만약에 어떤 사고가 일어나서 내가 돈이든 정신이든 개벽하게 되어 딸, 너를 만나게 되는 날이 올까 봐 그때를 위해 이 편지를 남겨 둬. 감정은 남겨두지 않을게. 그냥 이 편지의 존재만으로도 기뻐할 줄 아는 귀여운 사람이길 바라니까. 

- 2020년 36살의 엄마가 

P.S 고백할 게 있어. 이 편지 사실 장난으로 쓴 거야. 진심은 없어. 혹시 감동 받거나 화 난 건 아니지? 그렇다면 마음을 크게 키우렴. 이건 앞으로 네가 살아갈 인생의 예고편 같은 거니까. 혹시나 네가 진짜 나타날까 봐 적는 이 P.S 만이 진심이 담겼다. Good Luc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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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전고운(영화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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