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콕 특집] 이렇게 지내고 있습니다
<월간 채널예스> 2020년 6월호
일찍이 작가들은 집에서의 생활을 예찬해왔다. '집콕'에 대한 책 속 인용문을 통해, 집에 머무르는 일의 즐거움을 음미해 보자. (2020.06.15)
집은 밝고 조용합니다. 작가는 자신의 고독을 지켜줄 확실한 조치를 취하고, 그다음에는 수많은 방법으로 그 고독을 허비합니다. 창밖을 바라보고, 사전에서 아무 항목이나 찾아 읽어대죠. 저는 그 마법을 깨뜨리기 위해 보르헤스의 사진을 봅니다. 콤 토인이라는 아일랜드 작가가 보내준 건데, 캄캄한 배경에 대비된 보르헤스의 얼굴이에요. (중략) 그가 일하는 방식에 대해서 전혀 모르지만, 그 사진은 창가나 다른 곳에서 시간을 낭비하지 않았던 작가의 모습을 보여주지요. 그래서 그를 무기력과 표류 상태에서 벗어나 마법과 예술, 예언이라는 별세계로 데려갈 안내자로 삼으려고 노력했습니다.
- 올더스 헉슬리 외 11명 지음, 『작가란 무엇인가 2』 돈 드릴로 인터뷰 중에서
책꽂이로 가서 『노튼 현대 시선』 을 꺼내 들었다. 1800쪽이나 되는 두꺼운 책으로 헌책방에서 산 뒤 지금까지 딱 두 번 들춰본 게 전부다. 고대 기억술로 무엇이든 기억할 수 있다면 당연히 시를 암송할 수도 있을 것이다. 시 암송보다 더 인간적인 것이 있을까? (중략) 일단 나는 뭔가를 기억하는 일을 아침에 이를 닦는 것처럼 일상생활의 일부로 만들어 실천에 옮기겠다고 마음먹었다. 매일 아침 잠에서 깨 커피를 한 잔 마신 뒤에, 신문을 읽거나 샤워를 하거나 외출 준비를 하기 전에 책상에 앉아 10~15분 정도 시를 읽고 암기하는 습관을 길렀다.
- 조슈아 포어 지음, 『1년 만에 기억력 천재가 된 남자』 중에서
예를 들어 굳어진 시간 통념을 깨버리고 집에서 ‘브라질식 주말’을 꾸며보는 것은 어떨까? 먼저 모든 시계를 감추어두거나 시침과 분침을 멋대로 바꾸어버린다. 1년 이상 되지 않은 신문이나 잡지는 치워라. 물론 텔레비전은 꺼둔다. 그리고 시간을 이야기하지 말고 친구들을 초대한다. “그냥 너 좋을 때 와.” 그러고서는 시간을 그저 흐르게 내버려두는 것이다. (중략) 장소를 바꿈으로써 우리 인생의 속도에 영향을 주려 할 게 아니라, 거꾸로 우리의 시간 습관을 바꿈으로써 우리 집이라는 생활 공간이 가지고 있는 전혀 다른 특징을 돌연 깨닫는 것이다.
- 울리히 슈나벨 지음, 『아무것도 하지 않는 시간의 힘』 중에서
식탁 위의 책들. 이 은밀한 쾌락을 완성하는 책은 정해져 있다. 낯선 손님은 나의 식탁에 초대받지 못한다. 수십 번도 아닌 수백 번 읽어서 이미 외운 지 오래인 책들만 올라오고, 책장이 저절로 펼쳐질 정도로 같은 곳만 계속 본다. 좋아하는 음식을 좋아하는 그릇에 담아 좋아하는 책을 읽으며 먹는다. 세상에 이보다 안전한 쾌락이 있을까.
- 정은지 지음, 『내 식탁 위의 책들』 중에서
어느 이른 아침 자두 송이를 그려 보기로 마음먹은 것은, 아마도 내가 왜 ‘한 줌’이라는 표현을 반복해 쓰는지 좀 더 이해해 보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그림은 서툴고 형편없었다. 한 번 더 그린다. 그리기로 마음먹은 자두 송이에서 주먹 세 개쯤 떨어진 곳에 흰색 바탕에 검은 무늬가 있는 작은 달팽이 한 마리가 있다. 손톱만 한 달팽이는 먹고 있던 잎사귀 위에서 졸고 있다. 두 번째 그림도 첫 번째 것만큼이나 좋지 않았다. 나는 그만두고 일과를 시작했다.
이제, 이 주 전에 시작한 드로잉이 하나 있다. 매일 나는 그 작업을 한다. 나도 모르는 새 그 앞에 웅크리고 앉아, 수정하고 지우고, - 두꺼운 종이에 그린 커다란 목탄 드로잉이다 – 보이지 않는 곳에 숨기고, 벽에 걸어 보고, 다시 작업하고, 거울에 비춰 보고, 다시 작업하다가, 오늘에야 이만하면 마친 것 같다고 생각한다.
- 존 버거 지음, 『벤투의 스케치북』 중에서
미국의 절반이 그렇듯 나도 요새 감기에 걸렸다. 그 말은 내가 지금 집 맨 꼭대기 층 빈방에 격리되어 있다는 뜻이다. 창밖으로 사탕단풍나무와 그 뒤로 펼쳐진 초원이 보이고, 말들이 초원에서 눈을 맞으며 서 있다. 잠은 죽음을 제외하고 모든 것에 만병통치약이라고 믿으며 자랐기 때문에 잠들었다 깨기를 반복하며 비몽사몽간에 있다. 다락방을 개조한 3층을 나만큼이나 좋아하는 고양이 한 마리가 주로 찾아와 준다. 나는 눈이 오는 것을 볼 수 있고, 내가 얼마나 아픈지를 가늠할 수 있는 정도까지만 깨어 있다가 곧 다시 잠에 빠져든다. 자신이 졸고 있다는 사실을 알 정도로만 깨어 있는 것의 기쁨은 『모비딕』에 나오는 이스마엘의 동료 선원이 한 말에서 알 수 있다. “젠장, 잠만 푹 잘 수 있다면 세상에 태어난 보람이 있겠네.”
- 벌린 클링켄보그 지음, 『단순하지만 충만한, 나의 전원생활』 중에서
정원사로서는 아이러니한 일일까? 나는 정원이 있는 집에서 살아본 적이 없다. 그나마 흙을 만져볼 수 있었던 때는 작은 화단이 딸린 이층 주택에 살던 어린 시절이었다. 좁은 마당 끝 이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이 시작되는 곳에 돌로 막은 아주 작은 화단이 있었다. (중략) 분꽃의 까맣고 단단한 씨앗을 손 안에 굴리며 놀았던 기억이 생생하고, 해마다 화단에 피던 주황색 나리꽃은 지금까지 유년을 기억하게 하는 꽃이 되었다. 어느 집에나 흔하게 키우던 봉숭아도 귀퉁이에서 삐죽 자라났다. 꽃이 피는 여름이면 동네 아이들을 불러다 손톱에 물을 들였다.
-주례민 지음, 『그린썸, 식물을 키우는 손』 중에서
라우신이 집에 있다. 그는 내 맞은편에 앉아 있다. 오전 내내 하는 일 없이, 태평하고 무기력하게. 사람 손이 저 정도로 오직 쉬기만 하는 꼬락서니는 이제껏 본 적이 없다. 저런 휴식이란 화가가 되어야만 포착할 수 있을 듯. 그런 꼴을 바로 앞에 두고, 나는 지나치게 움직인다. 즉 계속 무슨 일이든 하긴 하는데, 그 ‘무슨 일’이 끊임없이 바뀌는 거다. 글 쓰고, 종이 한 장 집어 들고, 읽고, 칼로 연필심을 뾰족하게 갈고, 음반을 바꿔 틀고, 등등.
-롤랑 바르트 지음, 『소소한 사건들』 중에서
최근에 어떤 작가분과 대화할 기회가 있었는데, 글을 쓰려고 책상에 앉자마자 하는 일이 있다고 하더군요. 컴퓨터 자판을 치기 전에 책상 위에 있는 어떤 물건을 만진다고요. 그 이야기를 듣고서 글을 쓰기 전에 거치는 작은 의식들에 대해서 대화를 시작했지요. 처음에는 저한테 그런 것이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제가 아직 어둑어둑할 무렵에 일어나서 커피 한 잔을 만든다는 걸 알아차렸어요. 언제나 어두워야 하고요. 커피를 마시고 나서 동이 터오는 걸 바라보지요. 그랬더니 그분이, “아, 그것이 의식이네요”라고 말하더군요. 이 의식이 제가 비세속적이라고 부르는 공간으로 들어가기 위한 준비 과정이라는 것을 깨달았어요.
- 올더스 헉슬리 외 11명 지음, 『작가란 무엇인가 2』 토니 모리슨 인터뷰 중에서
요리는 나 역시 즐겨 찾는 변신의 한 양식이다. 가끔은 요리가 글쓰기의 정반대 과정이어서 즐겁게 느껴지는 것도 같다. 요리에는 모든 감각이 동원된다. 요리는 즉각적이며 다시 하는 것이 불가능하고, 일단 완성된 후 먹고 나면 끝이다. 작업은 단순하지만 손이 많이 가고, 향이 있으며, 짧고, 성공인지 실패인지 쉽게 판단할 수 있다. 어쩌면 요리는 생물학의 영역에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존재가 생겨나고 사라지는, 몸을 유지하는 그 영역에서 이루어지는 작업이기 때문이다.
- 리베카 솔닛 지음, 『멀고도 가까운』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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