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도, 에세이스트] 6월 우수상 - 3년차 직장인의 휴가 사용법
스트레스를 푸는 나만의 비법
‘작고 소중한’ 휴가를 알차게 쓰기 위한 일종의 전략으로, 연말연시 각 부서에서는 휴가 쓰기 좋은 날을 선점하기 위한 치열한 눈치싸움이 시작된다. (2020.06.01)
채널예스가 매달 독자분들의 이야기를 공모하여 ‘에세이스트’가 될 기회를 드립니다.
대상 당선작은 『월간 채널예스』, 우수상 당선작은 웹진 <채널예스>에 게재됩니다.
‘나도, 에세이스트’ 공모전은 매월 다른 주제로 진행됩니다.
2020년 6월호 주제는 ‘스트레스를 푸는 나만의 비법’입니다.
우리 회사는 특이하게 30분 단위로 휴가를 올린다. 하루를 통으로 쓰려면 8시간, 반차를 쓰려면 4시간. 이런 식으로 30분 단위로 계산해서 휴가원을 올리는 것이다. 9시 출근에 늦을 것 같다면 30분 휴가원을 급하게 올리고 9시 30분까지 출근하는 직원들도 많다. 이렇게 야금야금 휴가원을 올리다 보면 순식간에 1년 치 휴가를 다 써버리는 건 일도 아니다. 그래서 ‘작고 소중한’ 휴가를 알차게 쓰기 위한 일종의 전략으로, 연말연시 각 부서에서는 휴가 쓰기 좋은 날을 선점하기 위한 치열한 눈치싸움이 시작된다. 갓 입사했을 무렵엔 나는 그런 치열한 눈치싸움에서 이길 배짱도 없었고, 무엇보다도 쓸 수 있는 휴가일 자체가 굉장히 적었다. 그저 그 소리 없는 싸움에서 이겨 장기 휴가를 내고 여행가는 직원분들을 보며 부러워할 수밖에. 그래서 신입사원 꼬리표를 떼자마자 참 열심히도 휴가계획을 세우고 여행을 다녔다. 무계획으로 휴가를 낭비하는 건 절대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다. 정말 돌이켜보면 그 당시 휴가 쓰고 여행을 다니는 것만이 삶의 낙이었고, 직장생활에서 쌓인 스트레스를 풀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이렇게 스트레스 푸는 방법이 되려 스트레스 그 자체가 되었다. 계획 있는 휴가 사용에는 일종의 열정과 체력이 필요하다는 것을, 연차가 쌓임에 따라 조금씩 깨닫기 시작한 것이다. 주 5일 출근하는 최소한의 열정과, 집과 회사를 왕복할 최소한의 체력만이 남아있게 된 현재의 나에게는 휴가 계획에 쓸 몫은 남아있지 않았다. 휴가계획에 맞춰 어디를 가야 하나 고민하는 것도, 눈치 살펴 가며 원하는 날짜에 휴가 신청에 성공하는 것도, 전부 다 귀찮아졌다. 귀찮아졌지만 쉬고는 싶고, 그렇다고 휴가를 막 쓰기에는 마음 한 켠이 불편한. 그런 상황에서 코로나19로 그나마 세워 둔 여행계획마저 모조리 취소하고 나자, 나는 카오스 상태에 빠졌다. 대체 뭘 하면서 스트레스를 풀어야 하지? 사람들은 뭐하면서 스트레스를 푸는 걸까?
무미건조한, 어쩌면 이게 바로 평범한 직장인의 삶이라고 할 수 있는 나날을 보내고 있던 중 오랜만에 지사에서 근무하고 있는 동기와 연락이 닿았다. 사내 메신저로 오랜만에 밀린 이야기를 풀고 있었는데, 별안간에 동기는 곧 퇴근할 시간이라며 일을 마무리하는 중이라고 했다. 아직 오후 2시도 되지 않았는데, 무슨 일로 반차를 쓰나 싶어 걱정스레 이유를 물었다. 돌아온 동기의 대답은 걱정한 내가 되려 머쓱해질 정도로 간단명료했다. 오랜만에 집 대청소를 하고 싶어서 반차를 냈다는 것이다.
‘제정신인가?’
젊은 꼰대의 기질이 충만한 나는 그 대답을 듣자마자 휴가를 그렇게 아깝게 쓰면 어떡하냐고 타박 아닌 타박, 잔소리 아닌 잔소리를 퍼부었다. 동기는 휴가 쓰는데 굳이 특별한 이유가 있어야 하냐며 컴퓨터 시계가 14:00이 되자마자 메신저를 로그아웃했다. 동기의 행동에 꽤나 충격을 받은 건지, 그날 오후 내내 생각이 났다. 특별한 이유가 없어도 쉬고 싶으면 쉬는 게 맞지, 곱씹을수록 동기의 행동이 납득이 되면서 어느 순간 멋있어 보이기까지 했다. 그리고 그다음 날, 나는 입사 이후 처음으로 ‘특별한 이유 없이’ 휴가원을 올렸다. 굳이 이유를 붙이자면 ‘나도 그러고 싶어서’.
그 뒤로 나는 틈만 나면 충동적으로 휴가를 쓰고 스트레스를 푼다. 보고 싶었던 DVD가 도착해서 그다음 날 휴가 쓰고 몰아서 보기, 늦잠 자고 싶어서 오후 2시에 출근하기, 문득 생각난 빵집의 빵이 먹고 싶어서 일찍 퇴근하고 사러 가기. 매 순간 합리적이고 타당한 이유를 찾아다니며 빡빡하게 살았던 나에게 주는 일종의 ‘예외’ 같은 시간들이었다. 가끔은 그런 이유를 찾지 않아도 되는, 이유가 필요하지 않은 예외의 시간들. 과거의 내가 봤다면 분명 휴가 아깝게 쓴다며 타박했겠지만, 순간순간의 내 감정에 더 집중할 수 있게 된 지금이 나는 더 좋다.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는 오늘은, 오랜만에 하늘이 높게 보이는 화창한 날이라 일찍 퇴근했다. 활짝 열어 둔 창문에서 불어오는 늦은 오후의 바람은 역시나 사람을 기분 좋게 만든다. 오늘도 이렇게 나는 소중한 1년 치 휴가 중 하루를 특별한 이유 없이 막 썼다. 그럼 뭐 어때. 내가 그러고 싶었는 걸!
강계민 평일엔 직장인, 주말엔 작가. 잔잔한 울림을 주는 글을 쓰려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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