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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터 2-10] 92화 : 마지막으로 남편에게 물었던 것

『마터 2-10』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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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일철은 그날 해주에 도착해서 중앙당 사무실로 찾아갔다. 박헌영은 일철의 도착을 알고 사무실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2020. 03. 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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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널예스>에서 황석영 소설가의 신작 『마터 2-10』을 매주 월/수요일 연재합니다.

 


그는 아내에게 조카를 소개하고는 응접실에 앉자마자 말을 꺼냈다.


 “어째 너희 형제들은 세상살이가 그 모양이냐? 백만이 형님 사는 꼴을 봐도 그렇고.  두쇠 녀석이 죽기 전에 인천에서 오락가락했던 모냥인데 내게는 얼굴 한번 비춘 적이 없었다.”


 “결혼할 적에 뵙고는 못 뵈었습니다. 이제 뵙겠습니다.”


일철이 일어나 두 손 마주잡고 마루에 엎드려 작은 아버지 부부에게 큰절을 했다. 이십만은 고개를 끄덕이고 잠시 기다렸다가 말을 이었다. 


 “내가 일정 때에도 살아남았고 지금도 줄타기를 하며 살구 있구나. 그때는 주로 양곡이었는데 지금도 많이 달라진 건 없지만, 남북 간에 밀무역을 하구 있다.”


이십만은 막내 작은아버지가 정미소와 미곡상으로 부자가 되었다는 말은 들어 알고 있었다. 일철은 아우가 인천에 와서 활동하면서도 이 집에 찾아오지 않은 것은 계급적인 이유라기보다는 자신과 조직에 대한 안전 때문이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몇 년 후 닥쳐올 전쟁을 겪고 나서는 수백 년 동안 이어진 마을 공동체와 혈육의 정 따위는 흔적도 없이 사라지게 된다. 양측에 분리된 정부가 들어서기 전까지 삼팔선의 경비는 엄중하지 않았고 미군과 소련군의 주도 아래 도로와 철도의 통제만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이십만은 다시 말을 이었다.


 “언제까지 할 수 있을진 모르지만 나는 남과 북의 물자를 실어다 오고가면서 장사하구 있다. 북측에서는 공산품이 내려오고 여기서는 양곡이 올라가지. 너희 사람들이 너를 해주까지 데려다 달라는 부탁을 해왔다. 그냥 조용히 식구들 보살피며 먹구 살 수는 없었단 말이지?” 


 “두쇠가 죽고 나서 생각이 많이 달라졌습니다. 해방두 되었구요.”


 “세상은 너두 잘 알다시피 달라진 게 없다구. 아, 그리고 미리 말해두겠는데 나는 누구의 편두 아니다. 네가 혈속이 아니었다면 내 입장에서 이런 부탁을 들어줄 리가 없지 않겠냐?”


양곡을 싣고 가는 배는 그 다음 주초에 출발하기로 되어 있었다. 박선옥을 통하여 연락을 받은 신금이가 남편을 만나러 부랴부랴 인천에 간 것은 바로 하루 전날이었다. 신금이는 어찌될지 몰라서 지산이까지 데리고 갔다. 이십만은 그들 세 식구들을 위하여 별채를 내주었다. 이일철이 새벽에 부두로 나갈 때에 신금이는 율목동 그 집 대문간에서 작별 인사를 나누었다. 일철과 그를 안내하러 온 선원과 이십만이 있었고 금이는 그래도 계단 아래까지 따라 내려갔다. 


 “언제 와요, 소식은 어떻게 전해요?”


신금이는 남편에게 물었던 그렇게 어리석은 마지막 말에 대해서 내내 후회했다. 그 짧고 소중한 시간에 해줄 수 있던 말이 그뿐이었다니. 모든 이별은 찰나에 지나지 않는다. 바람처럼 언뜻 사라지는 서로의 표정이 오래 남아있을 뿐이었다. 


 “오래 걸리진 않을 거요.”


금이는 남편이 돌아서서 걸어가는 뒷모습을 보며 계단 아래 서있었다. 이십만이 몇 걸음 더 조카를 따라 걸어갔다.


 “나두 천만이 형님이 자리 잡은 일본으루 나갈까 생각 중이다. 여기선 시국이 불안해서 말이다. 몸 조심하구……이건 내 경험인데 너무 표내지 말구 살아라.” 


이일철은 그날 해주에 도착해서 중앙당 사무실로 찾아갔다. 박헌영은 일철의 도착을 알고 사무실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그도 역시 해방 전에 옥사한 이철을 기억하고 있었고 연락원 노릇을 해주었던 몇 가지 일화를 회상하며 짤막하게 얘기했다. 그러나 박헌영은 대중적 지도자가 아니라서 감정의 변화는 보이지 않았으며 냉정하고 무표정했다. 그와의 면담은 십분 정도로 끝났고 일철은 다른 간부에게서 지시를 받았다. 이일철의 지난 경력에 따라 운송부문에 필요한 인력이니 평양으로 가라는 것이었다. 당시에 북한에 남은 기관차 기술자는 이십 명이 못 되었고 정식 기관수는 여섯 명에 지나지 않았다. 그는 임시인민위원회 산하의 운수부에 배치되어 철도원 양성학교의 교장을 맡았다. 이일철이 경부선 경의선은 물론이고 안동 신경선의 대륙 운행에도 풍부한 경험이 있었으며 대륙철도의 꽃이라 할 수 있는 ‘히카리’ 특급열차의 기관수였다는 것이 눈에 띄었을 것이다. 무엇보다도 그의 가족이 빈농 출신으로 아버지가 식민지 산업화 초기부터 노동계급이었다는 것과 그의 아우가 투철한 항일혁명가였다는 성분 평가도 그에게 큰 도움이 되었을 것이다. 


당시의 남한 철도는 경부선 경의선 경원선 함경선 등의 대륙으로 향한 간선 이외에 지선은 사설철도회사가 건설 운영했으나 선로의 규격은 표준에 맞추었다. 특이한 예로 탄광과 해안 운송 등에 협궤 철로가 있었지만 일부 지역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북한은 간선 외에 산악지대의 지선에서 협궤 구간이 많았고 각각의 구간이 통일 연결되지 않는 선로가 많았다. 북한의 긴급한 운송 계획은 임시인민위원회에서 정부로 바뀌면서 교통국이 일원화된 행정체계로 이들 선로들을 개선하고 연결하는 사업을 밀고 나갔다. 일본인들이 빠져나간 뒤 철도 부문의 기술 인력은 너무도 부족했다. 교통국의 일차적 목표는 철로의 개선 연결과 기술 인력을 양성해서 시급하게 현장에 보충하는 일이었다. 이일철은 전평의 간부였지만 남로당의 당 사업에서 빠져 기술 인력으로 전환 되었고, 이것이 그의 이후 인생에 다행스런 일이 되었을지도 몰랐다.  


이일철이 월북한 몇 달 뒤에 좌우합작을 추진하던 중도좌파의 정치인 여운형은 몇 차례의 암살 위험을 모면하고서도 끝내는 저격을 당하여 사망하고, 나중에 남북협상을 주장하고 몸소 실천했던 극우 민족주의자 김구마저 암살당한다. 이미 제주도에서는 삼일절 행사 당일의 우발적 충돌로 시위와 파업이 시작되고 살상 또한 시작되었다. 이듬해 사월에 제주도에서 항쟁이 일어나자 미군정의 지휘를 받는 국방경비대 경찰대 서북청년단 등으로 구성된 진압 토벌대에 의한 대대적인 양민학살이 자행되었다. 좌익에 대한 검거선풍이 일어나 수천 명이 구속되었고 지방에서는 곳곳에서 크고 작은 학살이 벌어지고 있었다. 미국의 영향 아래에서 갓 창설된 유엔에 한반도 문제가 상정되었고 분단정부의 국회의원 선거가 실시되었으며 이승만을 대통령으로 한 대한민국 수립을 선포했다. 넉 달 뒤에 북에서도 최고인민회의가 구성되고 김일성을 수상으로 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선포했다. 남과 북의 국방경비대 인민보안대는 각각 국방군과 인민군으로 분단된 한반도의 적대적인 정규군이 되었다. 제주도의 폭동진압 차 출동 명령을 받은 국방군 일부가 여수 순천에서 항명 거사하고 이 지방에서는 좌우가 엇갈리면서 양민학살이 자행된다. 이후 한라산 지리산을 비롯한 남쪽의 거의 모든 산악지대는 유격대의 활동지역이 되었고 삼팔선에서는 남북 양 군대의 무력 충돌이 일상다반사가 되었다. 


 이일철이 월북한 뒤에 신금이는 시아버지 이백만을 모시고 아들 이지산의 뒷바라지를 하며 살아가야 했다. 이백만은 공방에 들어앉아 철물 공예품을 열심히 만들어냈고 신금이는 그동안 근검하여 모은 돈을 몽땅 털어서 영등포 시장에 작은 점포를 냈다. 그녀는 처음엔 경찰서에 잡혀가서 며칠 동안 남편의 행방을 조사 받았고, 석방된 뒤에는 가끔씩 형사들이 불시에 샛말 집에 들이닥쳐 집뒤짐까지 하더니 해가 가면서 차츰 느슨해졌다. 북에서는 혁명적 제도와 생활 조건에 맞지 않았던 사람들이 끊임없이 삼팔선을 넘어와 개성을 비롯한 서울 부근에 수용소와 집단촌이 생겨났다. 그러나 남한 민중의 미군정에 대한 불만과 저항은 그치질 않았다. 


이지산은 1947년에 2년제인 운수학교에 편입학 했다. 운수학교는 아버지 이일철이 다녔던 총독부 철도원양성소의 이름이 바뀐 것일 뿐 학제와 교육 내용은 거의 같았다. 지산은 어려서부터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영향을 받았고 소년 시기에 기관수였던 아버지가 운전하는 특급열차를 타고 만주의 광야를 달렸던 강렬한 기억을 잊지 않고 있었다. 철도국에 들어가 아버지처럼 기관수가 되겠다는 꿈이 있었지만 해방 이후 시국의 변화를 겪어오면서 지산은 그것이 어쩌면 불가능한 희망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는 서울과 영등포의 민청 친구들과 어울렸다. 운수학교의 학생들 중에도 많은 소년들이 전평 산하인 철도노동자들의 투쟁에 공감하고 있었다. 


미국은 유엔 소총회를 개최하여 남한만의 단독 선거를 실시한다는 결의안을 채택하도록 추진했다. 미국은 이로써 자신들의 동맹국 사이에서도 강한 반발을 불러 일으켰다. 유엔 임시위원단에 대표를 파견하고 있던 캐나다와 호주를 포함한 많은 나라가 반대의견을 표명했는데, 미국의 계획은 한반도를 영구 분단할 것이며 결국은 세계평화를 위협하게 될 것이라는 지적이었다. 스웨덴과 노르웨이 등 몇몇 나라는 총회 특별회의를 소집하고 양 점령국 사이의 새로운 협상을 통하여 문제를 해결할 것을 주장했다. 미국은 유엔에서의 지지를 받지 못하는 가운데 남한만의 단독선거를 강행하고자 시도했다. 캐나다와 호주가 반대표를 던졌고 콜롬비아, 덴마크, 이집트, 노르웨이, 스웨덴, 사우디아라비아 등 미국과 가까운 나라들이 기권했고 소련과 그 동맹국들은 아예 회의 참석을 거부했다. 유엔 소총회는 급조된 한국임시위원단애 대해서 아무런 지시나 결정권을 내릴 수 없는 위치였다. 총회로부터 권한을 위임 받은 유엔 임시위원단 9개 회원국 가운데 과반수도 안 되는 4개국만이 남한의 단독선거 방침에 찬성하고 있었을 뿐이었다. 이처럼 미국이 유엔이라는 간판을 내걸고 남한만의 단독선거를 결정하게 되는 과정은 유엔 본래의 창설 목표와 질서에 크게 벗어나는 일이었다. 


국토가 양단되고 민족과 혈육이 찢겨져 나갈 위기를 맞자 분노한 조선 민중은 전국에서 일어났다. 좌익은 이를 2.7 구국투쟁이라 부르고 우익은 2.7폭동이라 부르며 중도적으로는 2.7 사건이라고 부른다. 이후 단독선거와 남북 분단정부 수립에 이르기까지 억압과 무장투쟁의 단계로 들어가게 되고 민족주의자들의 남북협상마저 좌절되면서 전쟁으로 치닫게 되었던 것이다.     


그해 2월 초부터 이지산은 중학생 시절의 민청 동무들로부터 연락을 받고 있었다. 지산이는 경성지역 학생협의회 위원이었고 영등포 민청 조직에 참여하고 있었다. 운수학교 학생들 중의 활동가들은 전평의 전국 파업이 시작된다는 것을 미리 알고 있었다. 그들은 서울의 여러 학교들과 연합하여 동맹파업을 벌이고 전평의 삐라나 선전 벽보를 살포했으며 거사 당일에는 가두시위에 나설 계획이었다. 시월 항쟁 때처럼 전평의 전국적인 파업 돌입이 항쟁의 도화선이 되었다. 철도 전신 부분 노동자들의 선도파업은 미군정의 활동과 소통을 마비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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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도원 삼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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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황석영(소설가)

「객지」 「삼포 가는 길」 『무기의 그늘』 『장길산』… 소설의 제목만 들어도 역사가 그려지는 한국의 대표 작가. 1943년 만주에서 태어나 4.19와 5.18, 방북과 망명, 수감을 거쳐 한국의 현대사를 온 몸으로 받아낸 시대의 증인이다. 2000년대 이후 장편소설 『오래된 정원』 『손님』 『바리데기』 『개밥바라기별』 『강남몽』 『낯익은 세상』 『여울물 소리』 『해질 무렵』 등과 자전 『수인』을 잇달아 펴내고 왕성한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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