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경연 “좋아하는 것을 하며 살아도 괜찮아”
<월간 채널예스> 2020년 3월호 『나의 문구 여행기』
직업이 아니더라도 좋아하는 것을 당당히 말하는 것만으로도 용기라고 생각해요. 저도 ‘문구를 좋아하는 문경연입니다’라고 말할 때 훨씬 뿌듯하더라고요. 용기를 어렵게 생각하지 마세요. (2020.03.03)
손으로 쓴 편지, 부드럽게 굴러가는 펜 하나에 마음이 가는 사람. 문구 브랜드 ‘아날로그 키퍼’를 운영하는 문경연 디자이너의 첫인상이다. 36색 크레파스와 다이어리를 사랑했던 아이는 문방구 주인이 되고 싶었다. 취업, 학자금, 아르바이트로 치열하게 살던 20대, 꿈을 포기할 수 없어 세계의 문구를 탐방하러 여행을 떠났다. 불안감에 시달리면서도 꿈을 찾아가는 과정이 『나의 문구 여행기』 에 고스란히 담겼다. 자신을 ‘아날로그 키퍼의 디자이너’라 소개할 때 가장 행복하다는 문경연 저자와 좋아하는 마음을 지키는 용기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다.
여행의 기쁨과 슬픔
브랜드 ‘아날로그 키퍼’에 대한 반응이 뜨거워요.
고생한 만큼 좋아해 주셔서 기뻐요. 지금은 다이어리 출시를 앞두고 있어요. 제작부터 배송까지 직접 하기 때문에, 거의 작업실에서 생활하고 있어요. (웃음)
학창 시절 필통을 세 개씩 들고 다닐 정도로 문구를 좋아했다고요.
손으로 기록하는 게 좋아서, 문구를 하나둘 모으게 됐어요. 고등학생 시절, 단짝 친구랑 편지를 자주 주고받았어요. 화장실에 같이 가자는 말부터 고민 상담까지 다 쪽지로 했죠. 어느 날, 친구가 템플스테이에 가서, 돌아오는 날 주려고 하루에 한 장씩 편지를 썼거든요. 그런데 친구도 저처럼 매일 편지를 쓴 거예요. 마음이 통한 거죠. 그때 무언가를 기록하고 주고받는 게 행복한 일이라는 걸 처음 느꼈어요.
문구 여행이라니 콘셉트가 독특해요.
대학교 졸업을 앞두고 충동적으로 떠난 여행이었어요. 일과 학업을 병행했는데, 아이디어를 갉아먹으면서 디자인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어떤 디자이너가 되어야 할지 아무것도 정의되지 않은 상태였어요. 어디든 떠나고 싶다는 생각에 항공권을 검색했는데 너무 저렴한 거예요. 일단 티켓을 사고 나서 의미를 찾기 시작했어요. 이왕이면 제일 좋아하는 것으로 의미를 만들고 싶어서 문구를 테마로 정했고요.
처음에는 여행을 떠난다고 말하는 게 부끄러웠다고요.
한창 취업을 준비해야 할 시기에, 철없어 보일 것 같았어요. 도피하는 게 아닐까 불안하기도 했고요. 그래서 가족한테도 문구 여행이라 하지 않고 디자인을 공부하러 가겠다고 했어요. (웃음) 파리, 베를린, 런던 등 다양한 도시의 문방구를 탐방했어요. 좋아하는 것을 과연 어디까지 좋아할 수 있는지 실험해본 여행이었죠.
여행기는 보통 즐거웠던 순간을 부각하잖아요. 그런데 실망했던 문방구, 불안했던 심정도 같이 실으셨어요.
굉장히 불안하고 힘들었던 여행인 건 사실이었거든요. 좋다고만 쓰면 거짓말이 되잖아요. 차라리 실망했던 건 솔직하게 말하기로 했어요. 느낀 그대로 ‘좋지 않다’고 말하는 걸 한 번도 배워본 적이 없더라고요. 문방구를 소개하는 책인데 내용이 어두워질까 봐 걱정도 했어요. 그래도 책의 마지막에는 용기를 내는 장면이 나오니까 있는 그대로 쓰자고 결심했죠.
도시마다 문구를 대하는 태도가 다르다고요.
가장 독특했던 곳은 상해예요. 문구를 소모품처럼 빠르게 소비하는 곳이었죠. 노트 여러 권을 그램 수로 판매하거나 다양한 연필을 한꺼번에 묶어 팔기도 하고요. 상해 사람들에게 문구는 생필품처럼 막 쓰고 다시 사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반대로, 뉴욕이나 도쿄 사람들은 노트 한 권도 고심해서 고르고 오랫동안 간직해요. 상해에서 문구는 가볍게 즐기면서 사용하는 도구라면, 미국과 일본 사람들에게는 개인 소장품 같은 거죠.
특별히 인상적이었던 문방구가 있었나요?
먼지 하나 없었던 런던의 문방구가 기억에 남아요. 굉장히 많은 문구가 진열돼 있었는데, 신기하게도 너무 깨끗한 거예요. 주인이 매일 청소하고 이상한 제품이 있으면 바로 교체했기 때문이죠. 문구 하나하나에 애정이 없으면 할 수 없는 일이에요. 한국에 돌아와서 작업실을 준비하다 보니, 새삼 정말 대단한 공간이었구나 하고 느꼈어요.
좋아하는 마음이야말로 용기
여행을 돌아온 직후, 문구 브랜드를 만드셨어요.
원래 6개월만 하고 관두려고 했어요. 그 이상 끌고 갈 수익도 자신감도 없었거든요. 애써 취업을 위한 일시적인 프로젝트라고 합리화했죠. 취업과 브랜드 중 선택하기 힘들어서 무작정 취업한 친구들을 찾아갔어요. 제품을 보여주고 ‘나 취업할까. 문구 브랜드 할까’ 하고 물어봤죠. 친구들은 제가 당연히 문구 디자인을 계속할 줄 알았다고 하더라고요. 제가 이 일을 할 거라고 당연하게 생각하는 사람도 있다는 게 용기가 됐어요.
브랜드가 자리잡은 요즘에도 여전히 불안한가요?
한번 결정한 뒤에는 물러날 곳이 없다는 생각이 들어요. 불안함도 자연히 줄어들었죠. 물론 지금도 전혀 불안하지 않은 건 아니에요. 충무로 인쇄소에 가서 출력을 맡기고 대기하고 있으면, 점심시간에 직장인분들이 지나가요. 저는 돈을 아끼려고 가장 싼 커피 한 잔 시켜 놓고 계속 시간을 보내고 있는데요. 그러면 ‘모아둔 돈을 깎아가면서 지금 내가 뭘 하는 거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하죠. (웃음)
좋아하는 취미를 일로 해보니 어때요?
너무 좋아요. 제 삶을 보드게임 ‘젠가’로 비유한다면, 블록을 손수 다 쌓아서 올리는 느낌이 들어요. 잘하고 싶은 일이니까 더 고심해서 결과물을 내고 싶어지더라고요. 누군가 툭 건드려도 이건 절대 안 무너질 거라는 믿음이 생기더라고요. 물론 어려움도 많지만, 제가 주체적으로 삶을 걸어 나가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요.
아직 문구의 매력을 모르는 사람들에게 입문하는 법을 소개해주세요.
마음에 드는 펜을 찾는 거요! 나에게 맞는 펜을 찾는 게 생각보다 어려워요. 저는 글씨가 작고 날카롭게 글을 쓰는 편이라, 굵기 0.25mm의 날카로운 유성펜을 사용해요. 반대로, 글씨가 크고 빠르게 쓰는 분들은 볼이 부드럽게 굴러가는 펜이 적합하거든요. 일단 마음에 드는 펜이 있으면, 거기에 맞는 다른 문구를 찾는 식으로 연쇄 반응이 생겨요.
요즘에는 어떤 문구에 빠져 있나요?
연필 끝의 지우개를 교체할 수 있는 블랙윙 연필을 모으고 있어요. 보통 연필은 취향대로 바꿀 수 없잖아요. 그런데 이 연필은 지우개를 빼서 리필할 수 있어요. 지우개의 색깔도 다양해서, 기분에 따라 다양하게 바꿔 끼우기도 해요. 작은 차이지만 사용자에게 기쁨을 주죠.
좋아하는 것을 찾고 있는 사람에게 해주고 싶은 말이 있다면요?
너무 거창하게 생각하지 않으셨으면 해요. ‘좋아하는 것을 하는 용기’라는 부제가 누군가에는 폭력적으로 느껴지면 어쩌지 걱정도 했어요. 용기를 낼 수 없는 상황인 분들도 있잖아요. 다만, 직업이 아니더라도 좋아하는 것을 당당히 말하는 것만으로도 용기라고 생각해요. 저도 시행착오를 거친 끝에, ‘문구를 좋아하는 문경연입니다’라고 말할 때 훨씬 뿌듯하더라고요. 용기를 어렵게 생각하지 마세요.
나의 문구 여행기문경연 저 | 뜨인돌
미국, 유럽, 일본, 중국까지 7개 도시 27곳의 문방구와 문구 이야기가 아름답게 펼쳐진다. 작가가 여행에서 만난 문구 사진들이 풍성하게 수록되어 있으며, 문구 여행 중에 쓴 일기와 메모 등 작가의 손 글씨로 가득한 기록도 책 속에 그대로 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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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구 브랜드 ‘아날로그 키퍼’ 문경연의 문구 여행기. 여느 20대들과 마찬가지로 취업, 학자금 대출, 아르바이트 등으로 치열한 일상을 보내던 작가가 자신이 제일 좋아하는 문구를 보러 불쑥 떠난 ‘문구 여행’의 기록이다. 하고 싶고 좋아하는 일과 현실 사이에서 갈등하던 작가는 문구 여행을 하면서 문구를 너무나 좋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