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스플레쉬
한 번의 깨달음으로 족할 줄 알았는데 사는 것이 그렇지가 않다. 깨지고 부서지며 깨달은 뒤에도 같은 행동을 반복한다. 반복한다면 아직 제대로 깨달은 것이 아니라고 당신은 말할 지도 모르겠다. 제대로 안다면 제대로 행동하지 않을 리 없다고. 하지만 나는 문 틈 사이 반짝이던 햇빛을 기억하듯이 깨달음을 확신한다. 당시 나는 더 분명할 수 없도록 확실히 깨달았다. 다만 그 뒤로 따라야 하는 반복적인 수행을 잊었다. 그로 인해 처음부터 새로 시작해야만 했다. 무한히, 계속해서, 처음인 것처럼.
하루는 매일 반복되고 그 안에서 나는 새로운 것을 깨닫고 또 다짐한다. 다짐은 쉽고 간편하고 있어 보인다. 운동하겠다는 약속, 욕하지 않겠다는 약속, 작은 것을 사랑하겠다는 약속. 나와의 약속은 쉽게 체결되고 또 파기된다. 내가 나를 존중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내가 다른 모습의 나를 더 반기기 때문이다. 깨닫는 나만큼 즉흥적인 내가 좋다. 즉흥적인 나만큼 꾸준한 나도 좋다. 꾸준한 나만큼 재미있는 나도 좋다. 나는 나의 다양한 모습을 골고루 사랑하여 내가 다짐을 하도록 또 어기도록 허락한다. 곧 이것이 나의 아이덴티티가 된다.
박주연 : 다짐과 어김. 행위할 때는 몰랐지만 이렇게 명사로 만들고 보니 썩 마음에 들지 않는 나의 정체성, 나는 그런 나를 폐기하고 새로운 나를 쌓고 싶어진다.
박주연 : 다짐과 지킴. 한결 마음에 든다. 하지만 더 마음에 드는 것은 이것이다.
박주연 : (없음). 무엇으로도 정의되지 않는 편이 더 좋다. 하지만 그것은 무슨 의미일까? 이것이 다짐과 어김의 단순한 변주는 아닐까? 가볍고자 하는 열망, 잡히지 않고자 하는 열망이 약속을 지키지 않는 나에 대한 유치한 변명처럼 느껴진다. 나 원래 그런 사람이야, 하고 도망치는 것처럼. 결국 나는 다시 돌아간다.
박주연 : 다짐과 지킴. 이것이 좋겠어.
새로운 다짐이 추가된 셈이다. 다짐한 것을 지키겠다는 다짐, 그러니까 다짐에 대한 다짐. 가벼운 흥분과 열감이 느껴진다. 다짐했으니 새로운 일상이 시작될 것 같은 환상 때문이다. 그러나 안다. 다짐만으로는 바뀌지 않는다는 것을 경험으로 안다.
한 번의 깨달음이 기적 같은 변화를 이끌어내지 못한다는 것에 매번 실망한다. 그렇다면 깨달음은 무엇을 이르는 말인가? 반복은 이미 지겹도록 하고 있는데, 이런 반복을 끝내기 위해 깨달음을 원한 것이었는데. 찰나로 지나가는 것 뒤에 드리워진 긴 반복의 그림자 안에서 나는 또 길을 잃는다. 저는 지구력이 없어서 운동을 못하는 사람인데요, 사는 것도 지구력이 없어서 자신이 없어지려고 해요. 깨달음도 삶도 구루도 대답이 없다. 다만 어느 피아니스트가 말한다. 매일, 이 모든 걸 다시 터득해야 한다고.
아침의 첫 동작들을 의식하면 나머지 하루의 움직임 전체가 평온해진다. 그러면 몰입할 수 있다. 매일, 이 모든 걸 다시 터득해야 한다. 초심자인 채로 잠에서 깨어난 나는 모든 순간에 귀를 기울인다. 이 소중한 침묵 위에 독주회가 세워진다. 시간이 흐르면서 축적되는 이 다양한 에너지가 오늘 저녁에 부화할 첫 음에 풍성한 밀도를 안겨줄 것이다. 이제 나는 잠을 깰 때의 침묵이 콘서트가 탄탄하게 닻을 내릴 토대를 마련해준다는 걸 안다. 이 내면의 평화에 주의를 기울이면 시간에 개입할 수 있다. 시간을 다듬고, 빻고, 협상할 수 있다.
- 『이제 당신의 손을 보여줘요』 , 알렉상드르 타로.
이제 당신의 손을 보여줘요Alexandre Tharaud 저/백선희 역 | 풍월당
거울 속의 이미지에서 시작해 꿈속의 이야기로 끝나는 이 작고도 다채로운 에세이는 피아니스트의 내면을 가장 풍부하게 담아낸 기록 중 하나로 오래도록 남을 것이다.
수신만 해도 됩니까.
<알렉상드르 타로> 저/<백선희> 역12,600원(10% + 5%)
피아니스트들의 내면은 여전히 거의 알려지지 않았다. 작가들은 그 안으로 들어갈 수 없고, 피아니스트들은 그 내면을 충분히 묘사할 수 있을 정도로 열렬히 글을 쓰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글솜씨가 좋은 피아니스트들은 여러 명 있지만, 그 솜씨를 자기 자신을 관찰하는 데 사용한 이는 없었다. 혹은 충분히 성공적이지 못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