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색

냉탕과 온탕 사이

엄마의 온도

  • 페이스북
  • 트위터
  • 복사

엄마를 보며 어렴풋이 배웠던 것 같다. 나는 나 자신을 식히며 살아가겠다고. 비참해지고 싶지 않았다. (2020.02.28)

0228_효녀병_사진.jpg

언스플래쉬

 


엄마는 전생에 멧돼지였을지도 몰라. 가끔 그런 생각을 한다. 엄마는 멧돼지처럼 앞만 보고 달려가는 습성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일단 무언가에 꽂혔다 싶으면 바로 행동에 들어간다. 아빠를 사랑하는 일이 그러했고, 다친 마음을 보살피기 위해 여러 종교를 거친 시기가 그러했다. 좋게 말하면 주저 없이 노력하는 사람이고, 나쁘게 말하면 방향성에 대한 고민이 없다. 한 마디로, 늘 끓고 있다.
 
반대로 나는 대체로 식어 있다. 달리기 전에 이 길이 맞는지, 더 효율적인 길은 없는지 이리저리 둘러보고 두드려 보아야만 출발할 수 있다. 누구와 함께 뛰는지, 이 관계는 경쟁인지 협력 관계인지도 중요하다. 경쟁이라면 슬그머니 발을 빼려 하고, 협력이라면 어디까지 힘을 모아야 좋을지 마음의 선을 그려본다. 좋게 말하면 합리적이고, 나쁘게 말하면 겁이 많고 일이 느리다.

 

엄마가 온탕이라면 나는 냉탕이라고나 할까. 엄마는 특히 인간관계에서 굉장히 뜨거운 사람이다. 온 마음 쏟아 누군가를 사랑하고, 의지하고, 믿는다. 그리고 (당연히도) 상처받는다. 서로가 다르다는 점에, 이해할 수 없음에, 이해받을 수 없음에. 그러면서도 또 사랑받고 또 사랑하기 위하여 엄마 나름대로 끊임없이 노력한다는 점이 (내가 보기에 이해할 수 없는) 대환장파티인데, 어릴 때부터 그런 엄마를 보며 어렴풋이 배웠던 것 같다. 나는 나 자신을 식히며 살아가겠다고. 비참해지고 싶지 않았다.

 

언젠가 술자리에서 친구의 모험적이고 화려했던(?) 연애사를 들을 때였다. 나도 한 번쯤 눈이 헤까닥 뒤집히는 사랑을 해보고 싶다가도 하고 싶지 않아진다고 말했더니 친구가 물었다. “그럼 너는 정말 마음에 들고 완전히 네 스타일인 사람을 보면 어떨 것 같아?” 답을 들은 친구는 전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내 답은 이거였다. “그냥 지나가는 인연 정도로 남을 수 있게 적당히 거리 두고 피할 것 같아.” 불이 붙는 건 노 땡큐. 끓어오르면 그만큼 식기 마련이라는 진리는 질리도록 봐왔더랬다.

 

연애는 ‘자, 이제부터 시작합시다’ 해서 한다기보다 대책 없이 상대에게 푹 빠지는 거잖아. 그러면 이게 좋은 연애인지 나쁜 연애인지, 내가 이득을 볼지 손해를 볼지 애초에 가늠할 수가 없어. 사랑은 그냥 빠져버리는 것이니까. 행여 나에게 유리하거나 유익한, 절대 상처 줄 일이 없는, 그런 ‘좋은 연애’를 구하고 있는 사람에겐 ‘사랑에 푹 빠져버리는 사고’는 아마도 일어나지 않을 거다. 물론 누군가를 너무 좋아하게 되는 것 자체를 위험요소(리스크)로 바라본다면 뭐 그렇게 ‘안전하게’ 살면 되는 거고.


『여자로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중에서
 
푹 빠지는 사랑이란 뭘까. 나는 아직도 잘 모르겠다. 푹 빠지다 못해 적셔진 사랑을 해본 엄마는 내게 그런 사랑은 하지 말라고 한다. 하지만 엄마, 내가 냉정한 까닭은 열정이 싫어서가 아니야. 두려워서지. 비참해지는 것이 싫은 게 아니라 사실은 치열할 자신이 없는 거지. 사람이든 세상이든 치열하게 믿을 자신이.

 

냉탕과 온탕이 만났을 때, 물처럼 섞여 그저 미지근해질 수 있으면 좋으련만. 실제로 함께 있는 시간을 보면 물보다는 공기에 가까운 것 같다. 함께 있은 지 48시간이 지나면 서로가 피곤해지는 걸 보면. 고온다습한 북태평양 기단과 한랭습윤한 오호츠크해 기단이 만나 장마전선을 이룬다던데, 딱 그 모양이다. 그래도 조금 다짐하게 되는 것이 있다면, 내가 가질 수 없는 엄마의 뜨거움을 지켜주고 싶다는 마음. 차가우면 안전하기는 하지만 나 혼자 안전한 건 의미 없으니까. 그렇게 엄마에게 배운 믿음을 다시 엄마에게 대리하며 온탕에 발을 담가 본다.

 

 


 

 

여자로 살아가는 우리들에게요조, 임경선 저 | 문학동네
어린 시절 다른 이들이 침범할 수 없는 우정을 나누던 단짝소녀들이 그랬듯이 ‘교환일기’를 쓰기 시작한다. 완연한 어른 여성이 되어 여자로 살아가며 보고 느끼고 경험한 모든 것에 대해 낱낱이 기록한 교환일기를 주고받은 두 여자, 바로 요조와 임경선이다.


 


배너_책읽아웃-띠배너.jpg

 

 

 

 

 

 



‘대한민국 No.1 문화웹진’ 예스24 채널예스

이 기사가 마음에 드셨다면 아래 SNS 버튼을 눌러 추천해주세요.

독자 리뷰

(0개)

  • 독자 의견 이벤트

채널예스 독자 리뷰 혜택 안내

닫기

부분 인원 혜택 (YES포인트)
댓글왕 1 30,000원
우수 댓글상 11 10,000원
노력상 12 5,000원
 등록
더보기

글 | 이정연(도서MD)

대체로 와식인간으로 삽니다.

여자로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요조>,<임경선> 공저13,950원(10% + 5%)

이토록 무례하고 고단한 세상에서 여자로 살아가는 우리들 여자로 일하고 사랑하고 돈 벌고 견디고 기억하고 기록하며 우리가 나눈 모든 것. 두 여자가 있다. 한 여자는 솔직하고 ‘앗쌀하다’. 다른 여자는 자신이 대외적으로 하는 말과 행동에 가식이 많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 두 여자는 서로가 재미있고 흥..

  • 카트
  • 리스트
  • 바로구매
ebook
여자로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요조>,<임경선> 공저10,900원(0% + 5%)

다정하고 감동적인 침범 이토록 무례하고 고단한 세상에서 여자로 살아가는 우리들 ―여자로 일하고 사랑하고 돈 벌고 견디고 기억하고 기록하며 우리가 나눈 모든 것 여기, ‘낙타와 펭귄’처럼 서로 다른 두 여자가 있다. 한 여자는 솔직하고 ‘앗쌀하다’. 다른 여자는 자신이 대외적으로 하는 말과 행동에 가식..

  • 카트
  • 리스트
  • 바로구매

오늘의 책

방구석에서 만나는 한국미술의 거장들

출간 이후 베스트셀러로 꾸준히 사랑받고 있는 『방구석 미술관』 이 한국 편으로 돌아왔다. 이중섭, 나혜석, 장욱진, 김환기 등 20세기 한국 현대미술의 거장 10인의 삶과 그 예술 세계를 들여다본다. 혼돈과 격동의 시대에 탄생한 작품 속에서 한국인만이 가진 고유의 예술혼을 만나볼 수 있다.

마이클 샌델, 다시 정의를 묻다

현대 많은 사회에서 합의하는 '기회의 평등과 결과의 차등'은 제대로 작동하고 있을까? 마이클 샌델은 미국에서 능력주의가 한계에 다다랐다고 말한다. 개인의 성공 배후에는 계급, 학력 등 다양한 배경이 영향을 미친다. 이런 사회를 과연 정의롭다고 할 수 있을까?

아이들에게 코로나는 지옥이었다

모두를 울린 '인천 라면 형제' 사건. 아이들은 어떻게 코로나 시대를 헤쳐나가고 있을까? 성장과 소속감의 상실, 자율의 박탈, 친구와의 단절, 부모와의 갈등 등 코로나19로 어른보다 더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는 아이들의 외로움과 두려움을 세밀하게 포착한, 우리가 놓치고 있던 아이들 마음 보고서.

올리브 키터리지가 돌아왔다

퓰리처상을 수상한 『올리브 키터리지』의 후속작. 여전히 괴팍하고 매력적인, ‘올리브다운’ 모습으로 돌아온 주인공과 그 곁의 삶들이 아름답게 펼쳐진다. 노년에 이르러서도 인생은 여전히 낯설고 어렵지만 그렇게 함께하는 세상은 또 눈부시게 반짝인다는 것을 책은 보여준다.

.

주목! 투데이 포커스


문화지원프로젝트
KALIOP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