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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터 2-10] 86화 : 최달영 씨를 아시지요?
『마터 2-10』 연재
메이데이 이후 우익 청년단체의 노조 파괴와 노동 운동가 개인에 대한 테러가 시작되면서 전평에서도 자위 보안조직을 만들었다. 이일철도 노조 사무실에 청년 노동자들을 상주 시켰고 외부에 출타할 때에는 두 사람이 일개 조가 된 호위가 따라붙었다. (2020. 02. 17)
<채널예스>에서 황석영 소설가의 신작 『마터 2-10』을 매주 월/수요일 연재합니다.
이일철은 조선노동조합 전국평의회의 중앙위원이 되었고 영등포 지역 전평 산별노조의 부지회장이 되었다. 경성 지역의 모든 전평 지도부는 예전 재건파와 경성콤의 현장 조직원들이 확보했다. 그것은 삼십 년대 이후부터 줄기차게 이어온 항일투쟁의 결과물이기도 하였다. 해방되고 육 개월이 못되어 전국에 인민위원회를 조직하고 노동조합 전국평의회와 전국 농민조합총연맹을 조직한 민중들은 짧은 기간이었지만 자신들의 열망에 기초한 자주 독립국가와 민주사회 건설에 매진하는 경험을 갖게 되었다. 해방 초기부터 미군의 진주로 인하여 이러한 모든 희망이 좌절되어 가는 과정은 인민들에게 역사와 사회발전 법칙에 대한 풍부한 교육적 효과를 안겨주었다. 그들은 미군정의 비호 아래 정치권력과 공권력을 장악해 가는 친일 세력들에 의하여 시간이 지날수록 압박과 박해를 받게 되었으나 두려워하지 않았다.
우익 정치인들은 처음부터 노동자나 농민의 조직화에 별 관심이 없었다. 그러나 모스크바 삼상회의의 결의 문제로 반탁 찬탁의 정치적 대결이 현실화 하면서 노농 조직의 중요성을 인식하게 되었다. 이들은 산하에 대한독립촉성 청년총동맹이라는 청년 단체를 급조했고 마침 월남한 청년들과 실업자들을 그러모아 서북청년회 등의 우익 청년단체를 두게 되었다. 이들은 전평이 주도하는 노동운동을 우익 정치가들의 반공 논리로 와해시키려는 목적에서 어용노동자 단체를 만들었다. 노동단체를 표방했으나 노동자를 위한 노동자의 조직이 아니었다. 이들은 폭력적인 우익 청년단체들이 전평 소속 노조를 와해시키면 그 자리에 대한노총을 세우는 방식으로 조직을 확대해 나갔다. 우익 노동단체들은 공장주 기업가 경영인들의 적극 후원으로 만들어졌고 이들의 활동자금은 주로 이승만계의 한민당과 기업가 군정 관리들이 지원하고 있었다.
1946년 4월 중순 경이었다. 영등포의 철도노조를 비롯한 방적 전기 인쇄 금속 부문의 산별 노조 중앙위원들이 철도국 후생회관에 모여 회의 중이었다. 그들은 곧 다가올 해방 이후 최초의 메이데이 행사를 준비 중이었다. 모인 사람들은 이백여 명 정도 되었는데 일반 노동자들은 아니고 각 공장에서 그래도 작업반장이나 기술공원 또는 노조의 주요 부서를 맡은 노동자들이었다. 누군가 단상에 나서서 지난 2월에 결성된 북조선 임시인민위원회의 위원장 부위원장인 김일성 김두봉 등과 남측 좌익진영의 민주주의민족전선의 위원장 부위원장인 여운형 허헌 박헌영 등에게 보내는 성명 서한을 낭독하고 있었다. 같은 시기에 며칠 간격으로 남한 우익진영은 대한독립촉성국민회를 결성하고 총재 부총재에 각각 이승만 김구를 추대하고 있었다. 성명 서한의 낭독이 끝나고 참석자 일동의 박수갈채가 이어지고 있었는데 뭔가 요란한 소리가 들리면서 회의장의 앞뒷문으로 청년들이 쏟아져 들어왔다.
그들은 처음부터 다짜고짜로 격자유리가 달린 문을 부수며 들어왔다. 머리에 흰 천을 동여맸고 한 손에는 저마다 각목과 목검 개중에는 날카로운 낫을 쳐든 자도 보였다. 복도에서 문을 박차고 몰려들어온 일단의 청년들 앞에 홍 아무개 김 모 등이 보였다. 이일철은 홍의 얼굴은 알아보았다. 그는 일제 때에 원산에서 노동운동을 했다며 용산 철도국의 발령을 받아 영등포 철도공작창에 노무관리로 들어왔다. 그는 들어오자마자 주위에 청년 몇 사람을 취직 시키고 저희끼리 몰려다녔다. 전평의 조직 관리는 노련했기 때문에 일제 때처럼 철저하게 보안을 지키는 것은 아니었지만 조별로 분반 토론하고 문건을 읽으며 주말에 야외활동을 통하여 친목과 조직 관리를 해나갔다. 그들로서는 노조에 가입하지 않는 한 공장 안에서 작업하는 모습 이외에 아무 것도 파악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철도국 상부의 지원을 받는 그들의 주위에 모이는 자들도 있기 마련이어서 그들은 십여 명의 옹호자들을 만들었다. 이것이 공장 내 비전평파의 노동자 조직인 셈이었다. 맨 앞에 나선 홍 아무개가 함경도 사투리로 외쳤다.
“종간나 새끼들, 누가 너희들 맘대로 노동절 행사를 독점하라구 그랬나? 공장이 너희 빨갱이 새끼들 사유재산이가?”
“회의 중이니 조용하시오. 그러구 조합원이 아닌 사람들은 나가시오.”
“너희가 해산해야지. 이거 불법집회 아니가?”
홍이 팔을 들어 휘저으며 외쳤다.
“자아, 몰아내라우!”
그들은 무기를 휘두르며 회의장 안으로 들어와 아무나 닥치는 대로 후려치고 두들겨 패기 시작했다. 얼떨결에 앉은 채로 머리가 깨지고 어깨와 등덜미를 얻어맞고 나뒹굴던 노동자들도 일어나서 의자를 들고 저항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일단 피하고 보자는 집행부의 조치로 이일철 등은 창문에서 화단으로 뛰어내려 도주했다. 나중에 알고 보니 이날 영등포에서만 일어난 사건이 아니었고 다른 지역의 회의장에서도 비슷한 일이 벌어졌다. 물론 안면이 있는 노동자가 앞장섰던 경우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전혀 낯설고 이질적인 집단에 의하여 폭행을 당했다. 그들은 복장도 다양했다. 염색한 미군복을 입은 자도 있고 학생복 차림도 있었으며 그야말로 뒷골목 깡패답게 말쑥한 양복차림도 있었다. 이들은 대개 경찰용 점퍼나 군복 상의를 걸친 나이가 좀 들어 뵈는 자들의 지휘를 받고 있었다.
정작 5월 1일 국제 노동절 당일에는 대한노총은 서울운동장 육상경기장에서 그리고 전평은 서울운동장 야구장에서 각기 행사를 벌였다. 육상경기장에는 3천명, 야구장에는 3만 여명이 모였다. 좌우익의 행사장은 모여든 인원에서만 차이가 난 것은 아니었다. 대한노총은 행사장 결의문에서 ‘오늘 조선은 프로혁명기가 아님은 물론이니 계급투쟁보다도 민족의 해결기’라고 밝혀서 노조가 아님을 분명히 했다. 또한 기념식사에서 그들은 ‘건국을 위해 8시간 이상 노동해야 함’을 역설하고 ‘노동자들이 8시간 노동 대신 하루에 16시간, 필요할 땐 심지어 24시간 노동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이들을 배후에서 지원한 미군정 노무과의 조선인 실무자는 일제의 조선총독부 근로부에서 징용실무를 담당했던 자로 뒤에 노동부 차관까지 지낸다. 그러므로 미군정과 보수 측의 노동운동은 애초부터 노자협조주의가 그 이념이었고 강령에도 ‘노자간 친선을 기함’이라고 되어 있었고 오로지 반공과 전평 타도가 정치적 목표였다.
메이데이 이후 우익 청년단체의 노조 파괴와 노동 운동가 개인에 대한 테러가 시작되면서 전평에서도 자위 보안조직을 만들었다. 이일철도 노조 사무실에 청년 노동자들을 상주 시켰고 외부에 출타할 때에는 두 사람이 일개 조가 된 호위가 따라붙었다. 초여름에 군정 당국은 조선정판사 사건을 조작하여 악성 인플레의 책임을 조선공산당에 전가하려고 하였다. 같은 시기에 이승만은 정읍에서 남한 단독정부수립을 주장한다. 북에서는 북조선노동당이 결성되었고 김일성 김두봉 등이 위원장 부위원장을 맡았다. 미군정은 조공 지도부 박헌영 등에 체포령을 내렸고 이후 남한의 사회주의 조직은 완전히 지하로 들어갔다. 몇몇 전설적인 항일운동가이자 공산주의자인 인사들이 검거 체포되었다. 가을에 접어들자마자 전평의 총파업과 함께 10월인민항쟁이 벌어지고 피의 진압 속에서 남조선노동당이 결성되었다. 위원장에 허헌 부위원장에 박헌영이 선출되었다.
전평의 총파업 투쟁 이전까지 일 년도 채 안된 기간에 170건의 파업 투쟁에 총 5만 7천여 명의 노동자들이 참여하고 있었다. 1946년 9월 15일에 철도 노동자들은 군정 당국에 6개 항목의 요구조건을 제출하고 일주일 이내에 회답해 줄 것을 요청했다.
노동자에게 하루 4홉, 가족에게 3홉의 식량을 배급할 것, 일급제 반대 임금인상, 해고 감원 절대 반대, 점심 급식을 종전대로 계속할 것, 민주적인 노동입법의 즉각적 실시, 등이었다.
미군정 당국은 이러한 노동자들의 절실한 요구를 간단히 거부하고 말았으며, 그동안 쌓이고 쌓였던 노동자들의 불만을 일거에 폭발시켜버렸다. 9월23일에 부산지구 철도 노동자 7천여 명은 제시했던 요구사항들을 다시 요구하면서 파업에 돌입했다. 이튿날 서울에서 전평은 전국의 철도노동자에게 파업 결정을 선포했다.
이일철은 영등포 철도공작창을 대표하여 중앙위원의 한 사람으로 전평회관에서 논의되었던 총파업 결정 회의에 참석하고 있었다. 이때에 용산경찰서장 야마시타는 사찰과 형사들뿐만 아니라 정복의 경찰 병력을 건물 주위에 배치하고 있었다. 그는 오전에 군정청 경무국의 지시를 전화로 받았고 출동 전에 다시 확인했다. 우익 청년단체와 대한노총원들의 습격이 먼저 있을 예정이었다. 경찰 병력은 주변을 포위하고 있다가 양측이 격돌한 이후에 노조 지도부를 검거하기로 되어 있었다. 그는 작년부터 영등포에서 이일철이 활동해 온 내막을 보고 받아 자세히 알고 있었다. 그는 사실 메이데이 사건 이후에 일철을 찾아가 만난 적이 있었다. 당시에는 좌파 지도부와 정객들에 대한 검거가 시작될 무렵이었고 대중 사회단체는 내사를 하면서 지켜보던 때였다. 그는 시국이 어떻게 전개될지 알 수 없었고 그가 검거하여 옥사한 이이철의 형인 일철과 그 주변 사람들의 후문을 매우 궁금하게 여겼던 것이 사실이다. 이일철의 영등포 전평 사무실이 당산동에 있었고 그는 사찰과의 부하 형사를 보냈다. 그는 형사 보조로 오랫동안 야마시타 정탐조에서 활동했던 자였다. 형사가 이일철의 사무실로 찾아가니 이층으로 오르는 계단 앞에 건장한 청년이 지키고 서있었다.
“이일철 지회장님을 만나러 왔습니다.”
형사가 말하자 청년은 그의 아래 위를 훑어보았다.
“누구쇼, 무슨 일입니까?”
형사는 짐짓 웃고 나서 신분증을 꺼내어 내밀어 보였다.
“이런 사람이오. 의논드릴 일이 있어서 왔소.”
청년이 위에다 대고 누군가를 부르자 그가 뛰어 내려왔고 두 사람은 목소리를 낮추어 소근거렸다. 그가 올라갔다가 고개를 내밀더니 아래에 대고 외쳤다.
“올라오시랍니다.”
형사는 사무실로 안내되어 들어갔고 몇 사람과 함께 앉았던 이일철이 물었다.
“무슨 일입니까?”
옆에 둘러앉은 사람들도 그를 매서운 눈으로 노려보고 있었다.
“최달영 씨를 아시지요?”
철도원 삼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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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객지」 「삼포 가는 길」 『무기의 그늘』 『장길산』… 소설의 제목만 들어도 역사가 그려지는 한국의 대표 작가. 1943년 만주에서 태어나 4.19와 5.18, 방북과 망명, 수감을 거쳐 한국의 현대사를 온 몸으로 받아낸 시대의 증인이다. 2000년대 이후 장편소설 『오래된 정원』 『손님』 『바리데기』 『개밥바라기별』 『강남몽』 『낯익은 세상』 『여울물 소리』 『해질 무렵』 등과 자전 『수인』을 잇달아 펴내고 왕성한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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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반도 100년의 역사를 꿰뚫는 방대하고 강렬한 서사의 힘 지금의 우리는, 끊임없이 싸워온 우리들의 결과다 어쨌든 세상은 조금씩 아주 조금씩 나아져간다 세계적인 거장 황석영이 장편소설 『철도원 삼대』로 한반도 백년의 역사를 꿰뚫는다. 철도원 가족을 둘러싼 방대한 서사를 통해 일제강점기부터 해방 전후 그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