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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터 2-10] 85화 : 어서 일어나, 식구들 먹여 살려야지

『마터 2-10』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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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물가와 실업의 홍수 사태 속에서도 미군정 당국과 일단의 자본가들은 오히려 이 상황을 악용하여 고율의 이윤을 착복하는데 혈안이 되어 있었다. (2020. 02.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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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널예스>에서 황석영 소설가의 신작 『마터 2-10』을 매주 월/수요일 연재합니다.

 


해방되던 그해 겨울 물가는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았다. 공업생산의 파탄과 식민지 반봉건적 소작 관계를 개혁하지 않고 방치한 탓에 농업생산력의 정체 등으로 인하여 전반적인 물자 공급이 크게 축소된 가운데, 미군정은 통치비용의 조달을 목적으로 화폐를 무책임하게 마구 찍어냈던 것이다. 그해 12월에는 이전의 8월에 비하여 물가가 무려 칠십 배 수준에 올라가 있었다. 그러나 노동자들의 임금은 물가 인상폭에 비하여 형편없이 뒤떨어져 있었기 때문에 일제의 전쟁 경제체제이던 삼십 년대 중반의 기아임금에 비해서도 삼분의 일 이하로 하락해 있었다. 노동자들은 한 달에 쌀 두 세 말 값의 임금을 받으려고 일주일에 백여 시간이 넘는 장시간 노동에 시달려야 했다.  일본인 기업주가 물러간 대신 수개월의 자치 기간이 지나고 미군정의 불하를 받거나 군정 당국의 직영에 의해서 새로이 편성된 공장의 경영진과 노동자들 간에 쟁의가 일어나기 시작한 것은 이듬해 봄부터였다. 이미 전평은 전국적인 산별노조를 조직한 뒤였기 때문이다. 방직공장의 노동자 대표는 파업 현장에 찾아온 산별노조 동료들에게 실상을 과장하지 않고 말했다.

 

 “회사와 우리 노동자 사이의 이번 문제는 쟁의가 아니라 차라리 애걸이라고 해야 할 겁니다. 하루에 광목 두 마 반과 백 원을 준다는 감언이설에 속아 지난 십이월에 공장을 찾아왔는데 광목이라고는 삼월에 고작 이십 마를 받았고 밥은 수수밥만 주니 어떻게 먹고 살겠소?”

 

이러한 기아임금 상태에서도 일자리가 절대적으로 부족하여 실업자가 도처에 넘쳐났다. 당시의 서울시 인구가 160만 정도였는데 그중 97퍼센트가 안정된 직장을 갖지 못하였다. 광란적 고물가와 실업의 홍수 사태 속에서도 미군정 당국과 일단의 자본가들은 오히려 이 상황을 악용하여 고율의 이윤을 착복하는데 혈안이 되어 있었다. 이들은 살길을 찾아 방황하는 부녀자와 어린 소년 소녀들을 무더기로 끌어다가 살인적인 저임금 노동현장으로 몰아 세웠다. 어느 미국인 기자는 당시 상황을 기사로 썼다.

 

 “미 군정청 관리 하의 어느 방적공장에는 천 삼백여 명의 종업원 중에 구백여 명이 나이 어린 소녀였으며 이들은 모두가 영양부족 탓인지 9세도 채 안 되어 보였다”

 

미군정 통치 하의 남한에서 그 무엇보다 심각한 것은 식량문제였다. 반봉건적 지주제도의 광범위한 온존과 비료 등 농업자재 공급의 절대적 부족 및 비용의 폭등은 전반적인 농업생산성을 감퇴시켜 사상 초유의 식량위기를 초래하고 말았다. 식량 공급의 절대적인 부족 상태에서 미군정의 비호를 받는 일부 친일파들은 높은 물가상승을 악용하여 양곡을 매점매석하였고 미군정 당국은 식량을 은밀히 일본으로 반출함으로써 이러한 위기를 더욱 가중시켰다. 식량 부족으로 인한 민중들의 고통은 참혹하기 그지없었다. 이러한 사정은 남한 어디서나 마찬가지였으며 대부분의 공장 노동자들은 점심을 굶은 채 하루 종일 고된 작업에 시달려야만 했다.

 

3월 말에 소년 소녀 노동자를 포함한 수백 명의 서울 시내 노동자들이 시청으로 몰려가, “일을 하려 하나 배고파 못하겠소. 쌀을 주오!” 라고 외치며 처절한 시위를 벌였다. 4월에는 용산구 일대의 시민들이 시청으로 몰려가 쌀, 쌀, 쌀을 다오. 쌀이 아니면 죽음을 다오, 하면서 항의했다. 당국은 토지개혁 등 근본 문제의 해결은 미룬 채 ‘미곡수집령’을 발표하고 식량위기에 강압적으로 대처하고자 하였다. 그들의 계획이라고는 생산비의 7분의 1에도 미치지 못하는 가격으로 양곡을 강제로 수집한 뒤 배급제를 통해 필요한 사람들에게 전달한다는 것이었으며, 그나마 양곡 수집을 위한 기금도 극심한 물가상승을 부채질하는 가운데 무더기로 돈을 찍어서 충당했다. 그러나 봄이면 9할 정도가 식량이 모두 바닥나고 마는 당시의 농촌 실정에 비추어 볼 때 사실상 강탈과 다름없는 양곡 수집은 남한 전역의 농민들로부터 심각한 저항을 불러일으킬 수밖에 없었다. 경기도 어느 마을에서는 노인들이 식량 공출 트럭 앞에 몸을 던져 결사적으로 저항하는 사태까지 벌어졌다.

 

난관에 부딪친 미군정은 중무장한 미군의 호위 아래 경찰과 관리들로 이른바 탈취대를 구성하여 강제 공출에 나섰다. 공출에 저항하는 농민은 그 즉시 수갑이 채워져 경찰서로 연행 되었으며, 유치장에서는 터무니없이 비싼 값으로 경찰들이 파는 것 이외에는 아무런 음식도 먹을 수 없었다. 이 기간 동안 8천 6백여 명의 농민들이 미곡 수집 위반자로 체포되어 형을 받았다. 한마디로 미군정은 식량 배급제를 통해 남한 민중의 생존 여부를 결정할 수 있는 강력한 무기를 손에 넣게 되었다. 그리하여 정치적 반대자들에 대한 탄압의 일환으로서 식량 배급을 중단하는 조치를 활용할 수가 있었다. 요컨대 군정 당국은 총과 배급표를 쥔 자가 한국의 모든 것을 지배한다는 점을 정확히 간파했던 것이다.

 

신금이가 몽롱한 꿈결 속에서 주안댁이 배급하는 쌀을 받은 기억은 있었지만 그 쌀을 자루에 가득 담아서 집으로 가져온 기억은 없었다. 그 몇 달 동안에 처음으로 온 식구가 포식을 했던 며칠 동안의 기적이 있었다. 마루보시 철도연변의 공장에서 불이 났다. 한밤중이었는데 신금이는 잠결에 누군가 자기를 흔들어 깨우는 기척을 느꼈다.

 

 “어서 일어나, 식구들 먹여 살려야지.”

 

역시 그것은 주안댁이었고 언제나 그랬듯이 아낙네치고는 키 크고 각이 진 어깨까지 떡 벌어져 그림자만 보고도 알 수 있는 자태였다.

 

 “예? 어디, 어디루 가요?”

 

신금이는 아직 잠이 덜 깨어 이부자리에서 상반신만 일으켜 앉았는데 주안댁이 며느리의 겨드랑이에 손을 넣어 일으켜 세웠다.

 

 “모두들 시방 마루보시 공장으루 달려가구 있구나.”

 

얼결에 일어난 신금이가 마당에 뛰쳐나가자 주안댁이 쌀자루를 두 개나 쥐어 주었다.

 

 “여기다 가득 가득 담아 오너라.”

 

길 바깥으로 나가니 사방에 희끗희끗한 사람들의 모습이 보였고 멀리 동남쪽으로 벌건 불길이 보였다. 샛말 쪽에서 본다면 영등포 역 방향이 틀림없었다. 어둠 속에 서로 찾고 부르며 사람들이 몰려들고 있었고 그들 틈에는 역시 회색빛의 그림자들이 끼어 있었다. 주안댁도 그러한 회색빛 헛것들 중의 하나였다. 영등포 시장 거리를 지날 때에 사람들은 수백 명으로 불어나 있었다. 역사를 돌아서 여러 겹으로 줄지어 놓인 철로를 건너니 바로 눈앞에 마루보시 공장의 활짝 열린 정문으로 사람들이 꾸역꾸역 몰려 들어가는 게 보였다. 공장의 창고들마다 문이 열려 있었고 사람들이 하얗게 몰려 들어갔다. 불이 난 곳은 공장 건물이었는데 기계와 기름이 타는 냄새가 고약했다. 마루보시는 원래가 사케와 맥주를 양조해 내던 공장이어서 아무리 생산을 멈추고 있다고는 하지만 양곡이며 밀가루 등속의 식량 부대자루가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 어둠 속에서 신금이는 밀가루 자루를 두 개나 짊어지고 나왔다. 다시 들어가 더듬거리며 쌀 같은 것을 자루 속에 담아서 너무 무거워 땅바닥에 질질 끌며 나왔다. 이제 이것들을 샛말 집에까지 운반해 갈 일이 꿈만 같았다. 신금이는 자루들을 질질 끌어다 놓고 다시 모아다 놓기를 거듭하며 겨우 철로를 넘어 역전 광장 쪽으로 나왔다. 남편은 며칠째 들어오지 않았고 시아버지 이백만이나 중학생 지산이 녀석이라도 깨워서 데리고 올걸 하면서 그녀는 후회했다. 그때에 어둠 속에서 어디론가 사라졌던 주안댁이 나타나 밀가루 자루 두 개를 덥석 끌어안더니 등에 짊어지고 휘적휘적 걸어가는 것이었다. 그녀는 곡식 자루 두 개를 양어깨에 걸쳐 메고 헛것 시어머니 뒤를 부지런히 쫓아갔다. 어느 틈에 집에 당도했는지 온몸이 땀에 젖었는데 신금이는 부엌에 갖다 짐을 부려 놓으며 아들부터 찾았다.

 

 “지산아 지산아 얼른 나오너라!”

 

지산이가 자다가 놀라서 마루로 뛰쳐나오고 공방에서 자던 이백만도 부스스한 몰골로 마당에 나섰다.

 

 “밤중에 웬 소란이냐?”

 

 “아버님 이럴 때가 아니에요. 마루보시에 불나서 사람들이 양식 가지러 하얗게 모여 들었다구요. 얼른 다시 가야해여.”

 

신금이는 함지를 내어 지산이에게 내주고 자기는 다시 홑이불을 꺼내어 어깨에 둘렀다. 그러고는 집 밖으로 나서며 시아버지에게 다급하게 말했다.

 

 “아버님, 자전거, 자전거 끌구 나오세여.”

 

그들은 시장 사거리에 이를 때까지 마주 오는 사람들이 저마다 쌀자루를 짊어지거나 지게를 지고 또는 운 좋은 이들은 리어카에 밀가루 부대를 잔뜩 얹어 끌고 지나가는 것을 보며 더욱 마음이 급해졌다. 역시 역전을 돌아서 철로를 건너는데 아까보다도 사람들은 더욱 많아져서 길을 메울 정도였다. 그들이 인파에 밀려 공장 안으로 들어가는데 창고들마다 모두 문이 활짝 열어 젖혀져 있고 밀가루 더미와 곡물의 언덕은 훨씬 줄어들어 있었다. 갑자기 총소리가 들리기 시작하며 어둠 속에서 전조등을 켠 트럭들이 몰려 들어오고 있는 게 보였다. 신금이네 식구들은 우선 손에 잡히는 대로 밀가루 포대를 이백만이 끌고 온 자전거 화물대에 실었고 양곡을 함지에 가득 채워 신금이가 머리에 이었으며 쌀자루 두 개는 지산이가 짊어졌다. 트럭에서 내린 미군과 경찰들이 공포를 쏘며 창고 앞으로 달려왔다. 그들은 아슬아슬하게 공장 정문을 빠져나와 철로를 건넜다. 역전에서 길을 건너자마자 큰 길가를 걷지 않고 골목으로 접어들었다. 이제부터 공장은 출입 금지 구역이 될 것이며 그들은 그나마 운이 좋았다는 걸 깨달았다. 집에 돌아와서 살펴보니 쌀이 네 자루에 밀가루가 다섯 포대나 되었다. 나중에 보니 쌀은 온전한 것이 아니라 부스러진 싸라기였고 맛도 형편없었다. 그래도 채소를 넣고 죽을 끓이면 먹을 만했다. 밀가루는 반죽을 하여 수제비를 끓여먹기에 좋았고 얇게 밀어서 칼국수를 해먹을 수도 있었다. 그해 봄은 그렇게 운이 좋아서 영등포 사람들은 몇 달 동안 굶주리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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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황석영(소설가)

「객지」 「삼포 가는 길」 『무기의 그늘』 『장길산』… 소설의 제목만 들어도 역사가 그려지는 한국의 대표 작가. 1943년 만주에서 태어나 4.19와 5.18, 방북과 망명, 수감을 거쳐 한국의 현대사를 온 몸으로 받아낸 시대의 증인이다. 2000년대 이후 장편소설 『오래된 정원』 『손님』 『바리데기』 『개밥바라기별』 『강남몽』 『낯익은 세상』 『여울물 소리』 『해질 무렵』 등과 자전 『수인』을 잇달아 펴내고 왕성한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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