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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좋은 것

지금 좋은 것이 지금이라 좋은 거라면, 그걸 남겨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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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할 것은, 하고 싶은 것은, 그것이 슬픔이든 외로움이든 불안이든 좋은 것, 지금을 말하는 것, 아는 것. (2019. 10.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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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읽은 후에는 그 마지막 날짜를 기록한다.

 

 

지금 좋은 것은 지금이라 좋은 거구나. 라는 생각이 들자 지금을 기록 해야겠다는 생각도 든다. 으레 습관처럼 해온 이런저런 글쓰기 끝의 날짜 표기가 새삼 의미 있게 다가온다. 그것이 단순히 그 글쓰기의 마침표인 것만이 아니라, 기록을 위한 기록이 아니라, 나를 보여주는 하나의 표시라는 것. 지금 무엇이 좋은지 반대로 무엇이 싫은지 이야기하고 써 남기는 것, 그래서 어제와 오늘 그리고 내일의 변화를 느끼는 것. 책을 읽은 후에는 그 마지막 날짜를 기록한다. 역시 어떤 독서 활동의 의미라기보다는 지금의 나를 거기에 새기는 것. 간단한 감상과 날짜 정도의 기록이지만 언젠가 다시 본다면 몰랐던 것, 잊었던 것이 보이지 않을까. 겸사겸사 정리해보는 2019년 가을, 지금 좋은 것들.

 

가벼운 것. 몸도 마음도 가벼운 것. 하지만 가벼운 그것만으로도 모자람이 없는 것. 명확한 것. 꼭 필요한 핵심이 있으면 그것으로 족하다. 전에는 묵직하고 복잡한 것에 대한 거부감이 덜했다. 가끔은 즐겼는지도 모르겠다. 지금 돌이켜보면 무척 버거운 생각들, 무거운 마음들이 있었다. 푸는 방법을 몰라 무작정 키워버린 생각의 타래였던 것도 같다. 그 무거운 가방들은 또 어떻게 들고 다녔는지. 지금이라면 상상 못할, 그 자체가 짐이 됐을 묵직한 가방들. 이제는 적당히 내려놓게 된, 그때는 가지고 있는 것만으로도 내 온 신경을 차지했을 복잡한 고민들. 그 무게로 괴로워할 필요 없는, 감당할 것은 나 자신의 무게 정도면 충분한, 그런 것이 지금은 좋다.

 

혼자. 나는 혼자를 좋아하는 사람이었는데 꽤 오랫동안 혼자 무언가를 잘 하지 않았다. 인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자연스럽게 그리 되어, 지금에서야 생각해보니 그랬더라. 다시 혼자 동네를 산책하고 물건을 사고 밥을 먹는다. 혼자 여행을 간다. 일인분의 표를 준비하고 묵을 방을 고르고 할 것과 볼 것과 먹을 것을 계획한다. 오랜만의 혼자 여행은 생각보다 익숙했다. 내키면 오래 머물렀고 쓸데없이 걸었다. 게을렀고 특별히 중요하지 않은 순간에 부지런했다. 무언가는 더할 수 없이 충만했고 어떤 지점에서는 정도를 가늠하기 어려울 만큼 허전했다. 둘도 셋도 넷도 좋다. 혼자도 좋다.

 

카페나 도서관에 앉아 책을 읽는 한 시간 반. 이것은 최근에 더 좋아하게 됐다. 그때그때 상황에 따라 하기도 말기도 했던 것을, 이제는 시간을 만들어 하려고 한다. 일주일에 한 번 정도는 카페에 가 앉아 책을 읽거나 편지를 비롯한 이것저것을 쓴다. 한 시간 반, 길게는 두 시간 정도가 좋다. 너무 길어지면 그 시간도 무겁다. 어디서든 할 수 있는데 집에서도 할 수 있는 일인데, 그것이 그렇지 만도 않다. 간섭 받지 않고 오롯이 그것에만 쓸 수 있는 시간이 필요하다. 모두가 나를 그냥 내버려두고 신경 쓰지 않는 곳이어야 한다. 무언가 해보려는 나를 가장 크게 방해하는 것은 나 자신, 나를 자꾸 눕게 하고 자게 하고 뒹굴뒹굴 바닥에 붙어 모든 일을 하도록 허락하는 나 자신. 그래서 그런 나 자신이 있는 집도 곤란하다. 그냥 그럴듯한 곳에 가고 싶어서가 아니다. 괜한 낭비라고 할 수도 있지만 나름의 고충이 있다. 가장 큰 적은 내부에 있다. 내 내부에.

 

상냥한 사람. 책읽기가 더 재미있어진 요즘, 근래 읽은 책 중 가장 좋았던 것은 『상냥한 사람』 .

 

그때 그는 병원에서 나와 집까지 걸어갔다. 네시간인가 다섯시간인가, 그렇게 걸렸다. 길을 걷다 고개를 올려 하늘을 보았는데 별이 듬성듬성 보였다. 별자리를 찾아 보려다 아는 별자리라고는 북두칠성밖에 없어서 자신에게 실망했다. 집에 돌아와보니 엄지발가락에서 피가 나고 있었다. 피가 나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피를 닦지 않고 아내가 자고 있는 침대까지 걸어갔다. 발이 닿는 곳마다 핏자국이 남았다. 그는 아내를 깨웠다. 그리고 말했다. 아는 별자리가 북두칠성밖에 없다고. 그게 너무 슬프다고. 그는 아내를 붙잡고 울었다. 그 소리에 아기였던 딸이 잠에서 깨어 울었다. 잘 울지 않아 억지로 울려야 했던 딸이 자지러지게 울었다. 그때 아내가 그의 등을 토닥여주며 말했다. 지금부터 공부하면 된다고. 별자리도 공부하고, 들꽃이랑 나무의 이름도 외우고, 그래서 나중에 딸과 함께 걸어다니며 모든 걸 말해주는 척척박사 아버지가 되면 된다고, 그는 그런 아버지가 되어야겠다고 결심했다.

-윤성희,  『상냥한 사람』  232-233쪽

 

인간이란 존재는 어느 정도의 슬픔을 감당할 수 있을까? 집으로 돌아와 옷을 갈아입기 전에 나는 주머니를 들여다보고 물었다. 작가는 어느 정도의 슬픔이 적절한지, 또 어느 정도의 희망이 적절한지 판단할 수 있는 존재일까? 두 손을 가만히 쳐다보면서 나는 물었다. 그 질문에 답을 할 수 없어서 나는 무서웠다.


잘 모르겠다고 수십번 중얼거린 뒤, 나는 겨우 용기를 내어 상냥한 사람을 주머니에서 꺼냈다. 닳고 해진 이야기. 나는 그 이야기를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그리고 천천히 문장을 적었다.
-윤성희, 『상냥한 사람』  309-310쪽. 작가의 말 중

 

그저 이렇게 흐르고 있는 지금 우리 삶의 이야기. 뭉클하기도 저릿하기도 벅차기도 한데 이걸 어떻게 말로 할지 몰라 답답해 하다가, 책 뒤 표지에 적힌 ‘한 사람의 인생을 들여다볼 때 밝아지는 슬픔, 무수한 별처럼 작고 희미한 삶들에 대하여’라는 표현에 무한 공감하기도 했다. 윤성희 작가의 소설을 볼 때마다 느끼는 수많은 ‘나’들의 이야기, 나와 내 옆만이 아니라 건너건너까지 보게 만드는 그 힘을 이 책에서도 느낄 수 있다.

 

그리고 또, 해질 무렵, 탄산수에 청을 잔뜩 넣은 음료, 멕시코 음식, 손글씨, 이 짧은 계절의 하늘, 등등, 꽤 많은 것이 좋다 지금. 좋은 것을 자꾸 말해야지. 이제 할 것은, 하고 싶은 것은, 그것이 슬픔이든 외로움이든 불안이든 좋은 것, 지금을 말하는 것, 아는 것.


 

 


 

 

상냥한 사람윤성희 저 | 창비
실제로 존재하는 인물인 듯, 실제로 일어난 사건인 듯 구체적인 실감으로 가득한 장면 장면에서 윤성희 특유의 풍성한 이야기가 펼쳐지는데, 오로지 따뜻한 시선으로 주변을 바라보는 윤성희만이 그려낼 수 있는 삶의 진실된 모습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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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ㆍ사진 | 박형욱(도서 P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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