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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영장 햇빛을 가리는 나무 다듬기도 디자인
영화 <디터 람스>
나의 일, 나의 직업을 대입하며 오래 상념에 잠기게 한 특별한 영화. 홀로 깊이 그대로 자신을 놓아둘 수 있는 ‘나홀로 극장’ 시간은 그래서 축복이다. (2019. 09. 19)
영화 <디터람스>의 포스터
애플 수석디자이너 조너선 아이브가 ‘영감의 원천이자 롤모델’이라고 밝힌 독일의 대표 디자이너 디터 람스. 영화 <디터 람스>는 공부로 치자면 복습이었다. 디자이너 삶의 숨겨진 이야기를 알려주는 건 없었다. 파편적으로 알고 있던 사실과 정보를 잘 정리한 매끈한 다큐였다. 그런데 내 삶과 직업에 대해 이토록 많은 상념을 갖게 한 것은 또 특기할 만하다. 책 만드는 편집자로서 출판이라는 업에 대한 자의식을 끊임없이 호출하는 영상이었다.
1932년 독일 비스바덴에서 태어난 디터 람스는 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혼란과 폐허의 땅을 재건하는 사회 분위기에 힘입어 열일곱 살에 목공 기술을 직접 익히는 ‘테크니컬 아트 컬리지’에 입학한다. 건축 회사를 거쳐 브라운과 비초에에서 디자이너로 재직하며 세계적인 명성을 얻게 된다.
백과사전의 한 단락처럼 요약할 수 있는 그의 활동, 브라운에서 만들었던 디자인의 신기원이 된 제품 등은 누구나 알 수 있다. 그럼 영화 <디터 람스>에서는 무엇을 보게 되는가. 바로 살아 있는 그의 표정과 말, 걸음걸이와 손짓, 무엇보다 디자인에 대한 그의 생각을 직접 듣게 된다. 아주 깊이 있고 품위 있는 디자인 철학을.
‘디터 람스의 좋은 디자인 십계명’이라고 일컫는 항목을 영화에서도 숫자 붙여 설명한다. “좋은 디자인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철학이다.
1. 좋은 디자인은 혁신적이다. 2. 좋은 디자인은 제품을 유용하게 한다. 3. 좋은 제품은 미적이다. 4. 좋은 디자인은 제품을 이해할 수 있게 한다. 5. 좋은 디자인은 과시하며 드러내지 않는다. 6. 좋은 디자인은 정직하다. 7. 좋은 디자인은 오래 지속된다. 8. 좋은 디자인은 마지막 디테일까지 철저하다 9. 좋은 디자인은 환경친화적이다. 10. 좋은 디자인은 최소한의 디자인이다. 한마디로 “Less, but better”, 덜한 그러나 더 나은 디자인이 좋은 것이다! 역시나 익숙한 범용의 낱말과 뜻이 담긴 십계명이다. 그런데 이 열 가지 항목에 내 직업을 대입하면 숙연해진다. 내가 만든 책이 혁신적인가, 세상에 이로운가, 아름다운가, 쉽게 다가가는가, 담백하고 단정한가, 정직한가, 오래오래 읽히는가, 끝까지 철저한가, 환경을 생각했는가, 과대포장은 없었는가를 생각하면.
1970년대 42세 디터 람스는 독일에서 가장 유명한 디자이너가 되었다. 포토제닉한 그에게 세상의 조명은 일제히 방향을 맞추었고 ‘미스터 브라운’이라고 불렸다. 1961년에 입사하여 1995년에 물러날 때까지 브라운 디자인팀에서 디터 람스는 브라운 전자제품의 디자인을 끌어올리며 자신의 철학을 실천했다. 디자인은 협업이고 좋은 사람과 함께 일하는 것의 미덕을 누구보다도 잘 아는 디자이너였다.
디터 람스가 만들었던 브라운 제품들은 그의 85세 생일에 오픈한 독일 프랑크푸르트 ‘응용미술 박물관’의 상설 전시장에 영구 보존되었다. 순수 미술 작품도 아니고 산업 디자인 제품, 상업용 판매 제품이 공공 박물관에 ‘브라운 컬렉션’으로 전시되는 사실만으로도 디터 람스의 영향력이 얼마나 대단한지 짐작할 수 있다.
영화 <디터람스>의 한 장면
사실 나는 이 영화를 보면서 그의 아내와 집에 탄복했다. 50년 동안 한 번도 이사하지 않고 살았다는 크론베르크의 집은 많은 것을 보여주었다. 간결하고 단순한 선의 집, 큰 나무와 수영장, 세월의 이끼가 낀 작은 부조물들. 얼마나 이상적인 공간이던가. 또 브라운에서 만나 해로하는 아내의 백발 단발머리와 미소, 자세는 너무 아름다워서 아득했다. 책 <디터 람스:가능한 적은 디자인> 저자인 소피 로벨은 “그들은 지극히 프라이빗한 커플입니다. 큰 주목을 받지 않고 공식석상에서도 함께하지 않았습니다. 50년 동안 그들은 단둘이 지냈습니다. 꽤 사랑스럽죠”라며 이 커플을 표현했다. 사랑스럽다는 느낌이 맞다. 차가울 정도로 단순하고 간결한 디자인을 해온 디터 람스는 그의 아내와 함께 너무 사랑스러운 모습이었다.
디터 람스는 디자인이 세상을 더 좋게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더 잘 팔려고 디자인하는 게 아니라 사람이 사는 세상을 위해서 디자인해야 한다고. 그래서 새로운 것만 강요할 것이 아니라 개선하는 게 더 낫고, 외적인 부분만 지나치게 강조하지 않고 내부로부터 시작하는 ‘리엔지니어링’ 정신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그가 50년 된 집의 수영장에 햇빛을 가리는 나무를 다듬는 것도 디자인이라고 말한 지점에서 ‘일상의 디자인’을 깨닫는다. 특별한 취미 없이 집의 조용한 공간에서 재즈를 듣고 무언가 골몰하는 모습. 일이 곧 삶이고 인생이 곧 일일 수 있었던 디자이너의 어떤 경지는 고요 속에 자신을 놓아두는 시간에 있었던 것일까.
나의 일, 나의 직업을 대입하며 오래 상념에 잠기게 한 특별한 영화. 홀로 깊이 그대로 자신을 놓아둘 수 있는 ‘나홀로 극장’ 시간은 그래서 축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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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태그: 영화 디터 람스, 디자인, 햇빛, 미스터 브라운
<마음산책> 대표. 출판 편집자로 살 수밖에 없다고, 그런 운명이라고 생각하는 사람. 일주일에 두세 번 영화관에서 마음을 세탁한다. 사소한 일에 감탄사 연발하여 ‘감동천하’란 별명을 얻었다. 몇 차례 예외를 빼고는 홀로 극장을 찾는다. 책 만들고 읽고 어루만지는 사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