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현미, 노신회 “동화 속 소녀들, 다시 보니 달랐어요”
캔디부터 삐삐까지 『우리가 사랑한 소녀들』 북 토크
좋아했다는 사실까지 부인하고 싶지 않았어요. 소녀들은 ‘나’를 다시 생각하게 해주는 고맙고 사랑스러운 존재였죠. (2019. 09. 09)
빨간 머리 앤,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인어공주를 다시 만난다면? 『우리가 사랑한 소녀들』 은 ‘소녀’라는 키워드로 연결된 50대 엄마와 20대 딸이 동화 속 소녀들을 글과 이미지로 재해석한 책이다. 30년이라는 나이 차 만큼 표현도 생각도 다르지만, 두 저자는 “소녀들을 다시 만나는 과정은 ‘나’에게 이르는 길이었다”고 한목소리로 이야기한다.
지난 8월 31일 토요일 오후 서울 ‘서촌 그 책방’에서 『우리가 사랑한 소녀들』 의 북 토크가 열렸다. ‘내가 사랑한 소녀’라는 드레스 코드에 맞춰 각각 꽃무늬 블라우스와 진분홍 드레스를 입고 등장한 최현미, 노신회 저자는 준비한 자료 화면을 한 장 한 장 넘기며 북 토크를 이끌었다. 20여 명의 독자들은 두 저자가 만난 소녀 이야기에 귀 기울이는 한편, 각자의 소녀들을 떠올리며 추억 속으로 빠져들었다.
행사가 시작되고 자기소개에 이어 출간 배경을 설명한 최현미 저자는 “소녀에 관한 이야기를 쓰면서 추억과 정치적 올바름 사이에서 고민했지만, 쓰는 과정에서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이어 “추억한다고 해서 올바르게 볼 수 없는 건 아니고, 올바르게 본다고 해서 추억할 수 없는 건 아니라고 생각한다”며, “ 『우리가 사랑한 소녀들』 이 자신을 다시 생각하게 하는 책이 되기를 바란다”고 덧붙였다.
어른이 되어 다시 읽은 동화가 어린 시절만큼 재미없다고 해서 어른이 된 나에게 도로시가 소중하지 않다는 건 아니다. 어린 시절 읽고 본 이야기는 우리 존재의 출발점이자 바탕인 ‘어린 나’를 만든다. 그리고 이들 주인공은 ‘나’와 함께 커나간다. (25쪽)
지금, 소녀를 이야기한다는 것
최현미 : 동화책이 좋아서 프뢰벨에서 하는 그림책작가 양성 과정을 듣고 2016년에 『이토록 어여쁜 그림책』 을 냈는데 이 책을 쓰고 나서 ‘동화 속 주인공에 관한 이야기를 쓰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내가 지금까지 읽었던 동화책의 여자 주인공들을 모아보자’라고 생각했고, 이즈음 대학생이 된 딸이 엄마랑 공동 작업을 하면 좋겠다고 제안했어요. 그때는 결과물이 책이 될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죠. 딸이 사진 찍기를 좋아하니까 콘셉트를 정해서 같이 사진을 찍을까 정도로 생각했어요.
노신회 : ‘소녀’라는 키워드가 ‘나’라는 사람을 표현하는 것 중에 하나라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저한테는 소녀를 이야기하는 일이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일이었죠. 때가 되면 책이 아닌 다른 매체를 통해서라도 소녀에 관해 이야기해야겠다고 생각하기도 했고요. 무엇보다 어떤 결과물로 남기면 더 많은 사람과 이야기할 수 있을 거라는 생각에 『우리가 사랑한 소녀들』 출간 작업에 참여했어요.
최현미 : 그런데 막상 책을 쓰려니 쉽지 않았어요. 2017년 무렵에 쓰기 시작했는데 당시에 이른바 ‘미투’ 이슈로 사회가 시끄러웠잖아요. 이런 상황에서 내가 소녀에 관한 이야기를 쓴다는 게 무슨 의미인가, 어떻게 이야기해야 할까 하는 고민이 컸죠. 실마리를 찾기 위해 원전을 찾아 읽기도 했는데 더 어려워졌어요.(웃음) 저는 축약본을 읽고 자랐거든요. 원전을 읽으니까 제가 아는 게 전부가 아니더라고요. 많은 작품이 실망스러웠고 더 쓰기 어려워졌죠.
노신회 : 저는 더 답답했어요. 실제로 학교 내에서 비슷한 이슈들이 너무 많았는데요. 이런 상황에서 소녀를 이야기하는 일에 대한 의미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죠.
최현미 : 고민 끝에 이런 시점에 소녀를 다시 이야기하는 일이 오히려 의미가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이 소녀들한테 문제가 있다면 그 책을 읽고 자란 나는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해야 할까?’라는 의문이 들었고 ‘그 시대로 돌아가서 작품을 보자’라는 결론에 이르렀어요. 지금 보면 문제가 많은 소녀들이지만 그 시대에서는 절대 그렇지 않았거든요.
우리가 사랑했던 그녀들을 진짜 제대로 만나려면 그녀들과 함께 그녀들의 시대로 가야 한다. 그곳에서 그 소녀들이 등장한 당대의 눈으로 다시 봐야 한다. 그렇게 보니 그녀들은 나름대로 무척 용감했고, 도전적이며 때로는 전복적이기까지 했다. (7쪽)
공주는 유죄, 왕자는 무죄?
최현미 : 소녀를 이야기할 때 생기는 어려움 중에서 가장 상징적인 게 공주였어요. 1990년대 후반부터 “인어공주, 신데렐라를 보지 말자”는 이야기가 나왔던 것 같은데요. 다시 책을 읽으면서 ‘공주는 유죄인가?’하는 의문이 들었어요. 16, 18세기에 결혼은 가문과 가문의 결합이었잖아요. 그런데 공주는 ‘개인 대 개인’으로 왕자와 만나서 사랑을 이뤘어요. 공주의 이런 행동을 개인의 탄생이자 낭만적 사랑의 시작으로 볼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죠.
인어공주와 다른 공주들의 운명을 가른 결정적인 차이는 왕자의 사랑을 기다리지 않고 왕자를 선택했다는 것이다. 옛 이야기에서 이런 일을 할 수 있는 여성은 마녀밖에 없다. 여성이 먼저 사랑의 감정을, 욕망을 드러내는 건 마녀의 짓, 바로 ‘나쁜짓’이었다.(134쪽)
노신회 : 여성이 직업이나 재산을 가질 수 없는 당시 상황에서 결혼은 살아남기 위해 성취해야 할 목표이기도 했어요. 지금도 결혼이 쉽지는 않지만, 당시에 공주에게 결혼은 투쟁에 가까울 만큼 쉬운 일이 아니었죠.
최현미 : 왜 항상 여성만 비판의 대상이 되는지도 의문이었어요. 어릴 때 인어공주를 읽으면서 왕자가 왜 에리얼을 못 알아보는지 답답했는데 아무래도 왕자는 계산이 빠른 사람이었던 것 같아요. “결혼한다면 아가씨와 하겠다”고 해놓고 부모 핑계를 대면서 이웃 나라 공주를 만나러 가잖아요. 이뿐만이 아녜요. 백조의 호수에 나오는 왕자도 자신이 사랑한 여인의 얼굴을 잘 몰라요.
추억과 정치적 올바름 사이에서
최현미 : 저는 책을 쓰기 위해 옛 기억을 떠올리는 게 힘들지 않았는데, 딸은 힘들어 했어요. 예를 들어 인어공주라고 했을 때 저는 동화책을 떠올리는데 딸은 디즈니의 주체적인 인어공주를 생각해서 훨씬 어려워했죠. 그래서 비판적인 입장과 우호적인 입장에서 어떻게 균형을 잡아야 하는지 고민한 것 같더라고요. 알아서 해결하라고 했었는데… 어떻게 해결하셨죠?(웃음)
노신회 : 문제의식을 가지고 바라보면서도 사랑하는 마음을 놓치지 않으려고 했어요. 예를 들어 ‘소공녀가 과거에는 이랬지만, 지금은 어땠을까?’하는 생각으로 이미지를 만들었죠. 그리고 21세기 소공녀라고 해서 운동화를 신은 건강하고 당찬 여성의 이미지로만 생각한다던가 하는 식으로 과거의 소공녀와 현재의 소공녀를 정형화하지 않으려고 노력했어요.
최현미 : 이런 맥락에서 보니까 소녀들이 조금 다르게 느껴지더라고요. 처음 오즈의 마법사를 영화로 봤을 때는 도로시가 눈에 잘 들어오지 않았어요. 그런데 지금 다시 보니 도로시라는 인물에 더 집중할 수 있겠더라고요. 나중에 도로시를 뺀 모든 등장인물이 왕이 되는데 도로시만 그냥 돌아와요. ‘만약 도로시가 소년이었다면 조금 다르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또 도로시가 세 명의 성인 남성을 세상에 끌고 가서 그들이 목표를 이루도록 돕고, 자신을 발견하게 하는 걸 보면서 ‘현재의 관점으로 보면 도로시는 훌륭한 리더가 아닌가’ 싶었죠.
“서로 다른 부분도 있었어요”
노신회 : 좋아하는 소녀가 달라요. 저는 앤을 좋아하고요.
최현미 : 저는 삐삐가 자유롭고 독립적이어서 좋아요. 무엇이든 혼자 잘 즐기는 모습이 보기 좋아요. 삐삐는 자기 삶을 어떻게 꾸려야 하는가를 잘 아는 캐릭터 같아요. 혼자 잘 노는 사람이 다른 사람과도 잘 놀 수 있다고 생각하는데 삐삐가 그래요. 정신도 육체도 건강하죠. 그리고 무엇보다 돈이 많아요.(웃음) 실제로 작가가 싱글맘이었고 어려운 시기를 보냈기 때문에 여성의 독립에 대해 생각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해요.
노신회 : 앤도 혼자 잘 놀잖아요. 꽃이나 나무랑 이야기하거나 아무도 없지만, 마치 누군가 있는 것처럼 혼자 강의하듯이 떠들기도 하고요. 그리고 끊임없이 상상의 나래를 펼치는데 그런 앤의 모습이 약간 저랑 겹쳐 보인 것 같아요. 삐삐 이야기는 그 자체가 모험담인데 앤의 경우는 그냥 살아가는 이야기인데 그 안에서 수많은 상상의 세계가 나와요. 이런 모습이 앤의 상상력과 ‘나’라는 사람이 만나서 새로운 모험담을 만들어 가는 느낌이 들게 해서 좋아요. 무엇보다 앤이 성인이 될 때까지 이야기가 계속 이어지는데 여성 주인공의 이야기를 오래 지켜볼 수 있다는 점도 좋고요. 앤과 내가 함께 커가는 것 같아요.
최현미 : 똑같은 주인공을 다르게 생각할 때도 있었어요. 그중에 한 명이 나우시카였는데요. 저는 나우시카를 보면서 마음이 아팠어요. 회사에 다니고 육아를 하면서 힘든 시간을 보낼 때 봐서 그런지 ‘왜 이 가냘픈 소녀에게 이 모든 것을 다 요구하나?’라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바람 계곡도 지켜야 하고, 아빠도 지켜야 하는데 적까지 사랑하고 품어야 하잖아요. 이게 1980년대에 나온 작품인데 당시에 쓰인 미야자키 하야오의 기사를 읽어 보면 ‘남성 중심의 사회는 이제 힘이 없기 때문에 여성 중심의 시대가 되어야 한다’는 식의 이야기를 하면서 여성을 주인공으로 만든 이유를 밝혀요. 아마 이때 미야자키 하야오가 여성에 대해 과하게 기대하지 않았나 싶어요. 원래 우리가 새로운 것을 말하고 기대할 때 과장하기 마련이잖아요.
노신회 : 나우시카가 비행기를 타고 다른 곳에 가서 채집하고 그것을 모아서 방도 만들고 적과 싸우다가 누군가를 구하는 이런 서사가 저한테는 즐거운 모험 이야기로 들렸어요. 공주로서 다른 사람을 구하기 위해 나서는 모습도 좋았고, 소중한 가치를 지키려는 마음과 동시에 날아가고, 달려가는 강력한 신체를 가진 것도 좋았고요.
독자와의 질의 응답
노신회 저자님의 분홍색 원피스를 보면서 저자님께서도 전형적인 소녀의 모습을 거부하면서도 한 편으로는 공주로 상징되는 소녀의 이미지를 원하시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노신회 : 요즘에는 복장을 이야기할 때도 다르게 표현하는 것 같아요. 이를테면 ‘여성스러운 옷’보다 ‘분홍색 옷’, ‘레이스가 달린 옷’, 이런 식으로 옷 자체의 특성을 표현하는 식으로 문장과 언어가 바뀌고 있어요. 소녀라고 하면 막연하게 떠오르는 이미지가 있잖아요. 우리가 공유하는 어떤 이미지, 표현들이요. 그동안은 그런 걸 대체할 만한 게 없었던 것 같아요. 소녀를 표현하는 방법, 소녀에 대한 재해석이 추가될 뿐, 제게도 소녀의 감성이 있다는 걸 말씀드리고 싶어요.(웃음)
최현미 : 요즘 젊은 세대는 기성세대가 생각하는 것보다 고정적인 이미지에 갇히지 않고 자유롭더라고요. 예를 들어 기성세대가 분홍색을 좋아하는데 소녀라고 불릴까 봐 싫어하는 척했다면 젊은 세대는 소녀라는 카테고리와 상관없이 내가 분홍색을 좋아하면 그냥 좋아한다고 이야기하더라고요. 저는 이런 거야말로 세대의 차이가 아닌가 싶었어요.
책에 나오는 캐릭터 중에 새롭게 각색하거나 새로운 장르로 작품을 쓴다면 다루고 싶은 캐릭터는 무엇인가요?
노신회 : 책에 등장하는 소녀들을 물론 좋아하지만 사실 저는 매체에 나오는 소녀들에 관심이 많아요. K-POP에서 고전을 차용하는 경우도 많잖아요. 우리가 아는 고전이 현대에서 어떻게 재해석되고, 변화했는지를 이야기하고 싶어요. 오즈의 마법사에 관해 이야기할 때 도로시를 말하기도 하지만 도로시를 연기한 배우를 이야기할 수 있잖아요. 이렇게 새로운 캐릭터보다는 이미 나온 소녀들의 다른 이야기를 더 알리고 싶어요.
우리가 사랑한 소녀들최현미, 노신회 공저 | 혜화1117
마음 맞는 여성들끼리 형성한 사적 친밀감을 바탕으로, 좋아하는 공통의 대상을 통해 공적 결실을 만들어내는 이들의 관계는 그 자체로 여성 연대의 유의미한 사례이자 나아가 출판계의 소중한 자산이 아닐 수 없다.
관련태그: 우리가 사랑한 소녀들, 최현미 노신회 작가, 캔디, 삐삐
'이야기하면 견딜 수 있다'는 말을 좋아합니다.
<최현미>,<노신회> 공저14,850원(10% + 5%)
당신의 ‘어린 나’와의 새삼스런 조우, 그것의 매개가 되는 그 시절 ‘우리가 사랑한 소녀들’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은 동화 속의 세계처럼 착하지도, 아름답지도 않다. 그러나 사람들은 누구나 자신이 주인공인 상상의 이야기를 만들고, 그 안에서 그 이야기와 함께 성장하며 한 시절을 보낸다. 그 이야기 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