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 연재종료 > 아이가 잠든 새벽에
네 살은 이런 나이구나
조금 아팠지만 괜찮아
집 앞 고깃집에서 밥을 먹고 돌아오는 저녁엔 잠깐도 멈추지 않고 5분을 내내 달렸다. 주말의 삼청동 거리에서도 “아빠한테 잡히지 않을 거야!” 외치며 달렸다. (2019. 06. 07)
언스플래쉬
아이 무릎에 상처가 늘어간다. 상처의 딱지가 떨어지기도 전에 새 딱지가 생긴다. 퇴근해서 “지안아 여기는 왜 다쳤니” 물으면 늘 “달리다가 넘어졌어” 답한다. 아이는 요즘 쉴 새 없이 뛰고 달린다. 내가 보고 있을 때도, 내가 옆에 없을 때도 달리고 달린다.
그러다 보니 넘어져 상처도 생긴다. 두 돌 즈음에는 달리는 데 능숙하지 않아서 넘어져도 상처랄 게 거의 생기지 않았다. 세 돌이 지난 지금은 자기 움직임을 주체하기 힘들 정도로 내달리다 보니 넘어지면 상처가 생긴다.
다행히 두려움을 남길 정도의 상처는 아니었다. 아니면 달릴 때 느끼는 쾌감이 넘어질 때의 두려움보다 훨씬 더 크거나. 아이는 상처 따위 아랑곳 않고 계속 내달린다. 어린이집 등하원을 시켜 주시는 할머니는 지안이가 너무 빨라 쫓아가기 힘들다고 하신다.
집 앞 고깃집에서 밥을 먹고 돌아오는 저녁엔 잠깐도 멈추지 않고 5분을 내내 달렸다. 주말의 삼청동 거리에서도 “아빠한테 잡히지 않을 거야!” 외치며 달렸다. 지나가는 차와 오토바이를 경계하랴 주변 사람들에게 폐 끼칠까 주의하랴 엄마 아빠는 정신이 없다. 내리막길에서도 다다닥 내달리는 아이를 보면 넘어질까 걱정도 된다. 그래도 연신 웃는 아이를 보니 즐겁다. 땀을 잔뜩 흘리고 헉헉 대면서도 아이의 표정은 너무 좋다. 잘 걷지 않고 너무 많이 안아 달라고 하는 건 아닐까 생각한 적도 있었는데 어느새 이렇게 컸다.
“넘어져서 아프진 않았어?” 물으면 “조금 아팠지만 괜찮아” 씩씩하게 답한다. 적혈구와 백혈구, 혈소판이 나오는 과학동화를 읽어줬더니 “혈소판이 딱지를 만들어 줬으니까 이제 곧 낫겠지”하기도. 몸이 자란 만큼 말도 늘어서 아빠가 책 읽으며 했던 말을 흉내 낸다. 그리고 흉내에 멈추지 않고 자기 말을 꽤 능숙하게 한다.
한 번씩 <바람이 분다> 놀이를 하면 깜작 깜짝 놀라곤 한다. <바람이 분다> 놀이는 가수 이소라의 노래 <바람이 분다>의 멜로디에 맞춰 하는 말 잇기 놀이다. 내가 먼저 “바람이 분다~” 하면 아이가 “꽃이 빨갛다~” 하는 식으로 눈에 보이거나 지금 느끼는 것을 말로 만드는 놀이다. 지안이가 좋아해서 이따금 하는데, 처음엔 내가 말한 후 아이가 답하기까지 약간의 시간 간격이 있었다. 요즘은 거의 곧바로 나온다. “자동차가 간다~”, “고양이가 있다~” 같은 말은 물론이고, 이제는 사이사이에 자기 의중을 전하기도 한다. “빵집이 있다~”, “식빵을 사자~”하는 식이다.
긴 문장도 곧잘 만들게 되었다. “기범이는 배가 아프고 열이 나서 오늘 어린이집에 못 왔어.”, “아빠, 운전은 꼭 필요할 때만 하세요. 미세먼지가 나와요”, “과자가 두 개 밖에 없으니까 나는 이거 먹을 게 엄마 아빠는 그거 나눠 드세요” 같은 말을 하니 이제 우리 사이에 제대로 된 대화가 된다. 정말 많이 컸다.
네 살이라는 나이는 이런 나이구나. 아이를 바라보며 내가 네 살이었을 때를 상상해보기도 한다. 어떤 말을 재잘대고 있었을까. 내 무릎에도 상처가 있었겠지. 부모님도 지금 내 마음 같았을까. 사람은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다른 사람의 삶을 상상해 볼 수 있는 존재지만, 네 살이라는 나이는 다른 사람의 네 살을 보면서 자신의 네 살을 상상해야 한다.
물론 아이는 아직 한참 더 자라야 한다. 기저귀를 거의 떼긴 했지만 응가는 꼭 기저귀를 차고 한다. 자다가 이불에 지도도 그린다. 몸을 들어 앉혀주지 않으면 그네를 탈 수 없다. 혼자 밥을 먹으라 하면 옷에 묻히고 바닥에 흘린다. 어떤 날은 밥은 안 먹고 우유만 먹겠다고 떼를 쓰기도 한다.
반말과 존댓말은 기준 없이 뒤섞인다. “엄마 아빠한테는 높임말을 써야 해” 했더니, “엄마 아빠, 높임말이 아니라 로켓말이예요” 하며 곧 죽어도 높임말이 아니고 로켓말이라고 우긴다. 처음 ‘높임말’이란 단어를 들었을 때 ‘로켓말’이라고 저장되었나 보다. 그렇게 들릴 수도 있는 발음인 것 같긴 하다.
아이는 많은 것에 능숙해졌지만 능숙해진 것들조차도 아직 어설프다. 그저 어느새 이만큼 자랐구나 대견할 뿐, 손이 갈 일도 가르칠 것도 아직 많다. 당연하다. 하지만 분명히 아이는 새로운 단계로 진입했다. 부모의 보살핌을 받고, 부모의 가르침을 흡수하던 최초의 단계는 이제 지나왔다. 말을 얼마나 잘하느냐, 몸을 얼마나 잘 놀리느냐를 떠나서, 나는 아이의 이 말을 듣고 하나의 단계가 지나갔다는 생각이 들었다. “잠깐만”, “조금만 있다가”, “말하고 싶지 않아”
처음의 아이는 부모에게 모든 걸 맡겼다. 몸을 가누지 못하고 우는 것 외에는 의사 표현을 할 수 없는 시절은 물론이고 어느 정도 커서도 그랬다. 산책을 하면 산책을 가고, 목욕을 시키면 목욕을 하고, 밥을 주면 밥을 먹었다.
그러다 돌이 꽤 지나고 나서부터는 거절의 행위들이 분명해지기 시작했다. 밥을 먹일 때 고개를 확실히 홱 돌린다든지, 한참 놀다가 “이제 자야 돼” 할 때 “싫어 싫어” 한다든지, “이 닦아야지” 하면 악을 쓰듯 울고 고집을 부리며 버티는 경우가 생겼다. 이 역시 아이의 내면이 성장하고 있으며 독립적인 존재감에 발산하기 시작하는 징표였지만, 여전히 아이의 반응은 부모의 action에 대한 re-action이었다. 수긍하거나 거절하거나 둘 중 하나였다. 아이는 부모의 요구에 반응은 했지만 자신의 의사를 보다 상세히 제시하는 존재는 아니었다.
지금은 다르다. “이제 잘 시간이야”하면 “잠깐만, 책 좀 읽고”라 답하고, “약 먹어야지”하면 “조금만 있다가 먹을게요” 한다. 어린이집 알림장에 친구랑 다퉜다는 얘기가 있어서 “지안아, 오늘 친구랑 왜 다퉜니?” 물어봤는데 묵묵부답이라 여러 번 계속 물어봤더니 “말하고 싶지 않아”라 말한다. 부모의 요구에 수긍하거나 거절하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의사를 구체적으로 제시한다. 부모와 협상하고 조율하며 심지어 행동을 중단시키기도 한다.
이런 모습이 점차 잦아지니 아이가 내 옆의 한 사람이라는 실감이 새삼 든다. 보살핀다는 명목으로 좌우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라 대화하고 합의하며 인생을 함께 걸어갈 동료라는 느낌이 솟아나기 시작했다. 우리는 여전히 끌어안고 볼을 비비고 목말을 태우며 자주 찰싹 붙어있지만 서로의 ‘거리’를 점차 의식하게 될 것이다. 앞으로도 아이를 보살피고 가르치는 것이 부모의 역할이겠지만 그 보살핌과 가르침이 ‘아이의 납득’이라는 과정을 반드시 거치도록 보다 세심히 신경 써야 할 것이다. 존중하고 존중받을 때 우리는 삶을 밀고 갈 힘을 얻으니까. 동료란 그런 힘을 주고받는 관계니까.
네 살은 이런 나이구나. 씨앗이 흙 속을 뚫고 완연한 싹을 드러내며, 이제 줄기를 길게 뻗어 올릴 준비를 마친 것 같은.
아이가 자랐다. 새로운 세상으로 나아간다. 육아도 이제 달라져야 한다.
다행히도, 책 읽는 게 점점 더 좋습니다.